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14)화 (114/150)

아일라가 떠나고 난 뒤에도 칼 린드버그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아 초조해진 아드리안이 먼저 칼을 불렀다.

“칼 린드버그.”

“응.”

대답은 순순히 하면서도 아드리안 옆으로 오질 않는다.

“나는 네가 위험해지는 것이 싫어.”

“나도 네가 위험한 건 싫어.”

이게 무슨 바보 같은 대사야.

두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칼 린드버그가 얄밉고 좋아서 아드리안은 벽에 제 머리를 박고 싶었다.

유치한 싸움을 지속시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아는 칼이지만 이번에도 아드리안에게 얹혀 갈 수는 없다고 결심한 참이기 때문에 강경히 나왔다.

아드리안이 아일라를 경계하며 아침부터 사용인들이 벌벌 떨 정도로 페로몬을 방출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고집을 부리고 싶어 모른 척했다.

아드리안이 너무 싫어하니 하지 말까 하다가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이 가장 효율적인 것 같으니 해야만 한다로 마음이 기우는 것이었다.

부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아드리안을 향했다가 다시 찻잔을 향하기를 반복했다.

아드리안은 아드리안대로 기분이 바닥을 쳤다.

자꾸만 칼 린드버그에게 향하는 시선을 붙들어다 바닥에 잡아 두었다.

그의 얼굴을 보면 또 속절없이 뭉클한 감정이 피어올라, 하자는 대로 다 하게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칼 린드버그는 어젯밤 한 배게 위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해서 아드리안의 속을 뒤집었고 화해하지 못한 채로 아일라 레바를 마중하러 갔다.

말 한마디 섞지 않고 따로 식사를 한 것이 얼마 만인지 칼 린드버그도 아드리안 헤네켄도 떨어져 있는 시간을 어색하게 여겼다.

그러나 고작 아침나절 이어진 그 시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드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팔짱을 턱 끼고 앉아 있는 것조차 그림 같다고 팔불출 같은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져 버렸다.

시선을 아래로 깔고 못마땅함을 감추지 못하는 아드리안의 귓가에 칼 린드버그의 옷자락이 슥슥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나가 버리려는 걸까.

아, 싫어. 다투고 기분 상하더라도 한 공간에 있는 시간이 귀중했다.

아드리안은 자신이 곱게 미쳐 있다 생각했다.

칼 린드버그가 나가려고 하면 문을 닫아걸고 소파에서 아직도 화가 난 그를 안을지도 몰랐다. 일어나지도 못하게 안고 안아서 지친 그를 가두고 자신은 그 문 앞을 지키는 거다.

헤네켄과 연락할 수 없게 마정석을 전부 압수하고 아일라 레바의 분칠한 얼굴은 쳐다도 보지 못하게.

아드리안은 멘탈만은 베타에 가까운 칼 린드버그가 여자를 대할 때 습관적으로 더 부드럽고 다정하며 멋진 미소를 짓는다는 것을 아일라를 보며 알아차렸다.

다, 싫은 것투성이다.

상상이 아니라 실행으로 옮길까 두려운 나머지 눈을 감기를 택한 아드리안의 무릎 위에 따듯하고 말랑한 것이 닿았다.

“……무서운 생각 금지.”

칼 린드버그가 무릎에 올라와 있었다.

아드리안의 허벅지에 포동포동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그 가슴팍에 뺨을 기댄다.

간질간질.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어찌 알고? 그러고 보니 칼은 처음부터 그랬다.

아드리안의 변화하는 기분을 금방 알아차리고 그의 마음이 어떻게 하면 풀리는지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았다.

그러니 매번, 자신은 질 수밖에 없는 거겠지만.

버릇처럼 한 손으로 칼의 등을 받친 아드리안에게 칼이 후, 하고 웃어 보였다.

내가 진짜, 아니, 연애가 이렇게 무섭다.

남들은 다 보고 도망간다는 극우성알파의 분노 섞인 페로몬이 왜 칼 린드버그에게만은 이렇게 향기롭게 느껴지는지.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의 실크 타이를 매만졌다.

보통은 타이 종류를 잘 하지 않고 다니는데 오늘은 냉랭한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싶어 신경 쓴 시종의 노력이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먼저 말을 걸었다.

“칼, 나는 네가 여기 가만히 있어도 무슨 일이 생길까 겁나고 초조해.”

“알아, 네 마음.”

아드리안은 칼을 끌어안았다.

“아니, 넌 몰라. 알면 그렇게 쉽게 파르만으로 가겠다는 소리를 할 수 없어. 나를 여기 두고.”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자기 자신을 매개로 흑마법을 완성시킬 만큼 녹록지 않은 인간이었다. 파르만의 국왕이라는 자는.

그런 그에게 가서 칼 린드버그가 하려는 일은 그야말로 시전자를 바꾸는 위험한 일이었다.

“파르만이 실제로 자신을 매개로 삼았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잖아. 왜 이렇게 무모한 거야. 왜 이렇게 내 생각은 하지 않아?”

좋은 냄새가 나는 목덜미. 아드리안은 코를 박고서 웅얼웅얼 불만을 토로했다.

귀여워. 목덜미가 간지러웠던 칼 린드버그가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다시 차근차근 들어 봐. 전쟁을 유발했고 자신의 음모가 다 들통난 이 마당에 파르만의 국왕은 아직도 파르만에 있어. 당장 저 성벽이 무너지면 자신은 죽을 텐데. 가정은 두 가지뿐이야. 자포자기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거나…….”

아드리안은 칼을 꼭 끌어안았다.

“아니면 자신이 꼭 거기에 있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 내가 설마하니 자신의 수식까지 읽어 낼 줄은 몰랐겠지만.”

칼 린드버그가 루루에게 한자를 보였을 때. 루루는 말했다.

〈이거 그거 아니야? 자연의 섭리. 할 때 쓰는 그거.〉

그때 칼 린드버그는 뇌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릿했다.

“텐지라를 제거하고 식시귀를 없애는 데 이미 상당한 병력이 투자된 상태에서 지상에서 지하까지 땅굴을 파는 것도 비효율적이고, 그렇다고 포탄을 터뜨리자니 삶의 터전을 잃는 일이고. 또. 지하수가 오염되면 아예 그 땅 전체를 못 쓰게 될 수도 있어. 알잖아?”

아드리안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의 흉통이 심상치 않을 정도로 크게 팽창했다가 가라앉을 때마다 기대어 있던 칼 린드버그의 얼굴이 같이 들썩거렸다.

“땅을 복구하는 데는 또 얼마나 걸릴까.”

그러니까.

“하나만 죽이면 되는데, 그렇게까지 많은 것들을 잃을 필요가 있냐는 거야.”

칼 린드버그는 한 한자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동시에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마법과 연관시키고, 그 자신이 파르만의 왕과 자리를 뒤바꾼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으로.

“어차피 파르만의 철옹성은 한번 무너졌어야 했어. 그 김에 나도 들어가 볼게. 혼자가 아니라 헤네켄의 정예군이 함께하니까. 그리고 내 마법도 제법 쓸 만하잖아.”

아드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품 안의 칼 린드버그를 놓지 않았다.

칼 린드버그가 말하는 형태의 마법 따위는 그는 배운 적 없는 영역의 것이다.

그래서 왜 칼이 스스로 활대를 매려 하는지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 헤네켄의 양 볼을 쥐었다.

아드리안이 그제서야 눈을 들어 칼 린드버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얼빠’임을 인정하라던 루루의 말에 자신은 아드리안 헤네켄의 얼굴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소리쳤었지만. 무시하기 힘든 얼굴인 건 확실했다.

칼이 입술을 안 맞추고 보고만 있자 아드리안이 금세 샐쭉해졌다.

다 큰 남자가 말이야. 왜 이렇게 쉽게 풀 죽고. 쉽게 속을 드러내는지. 그것이 칼 린드버그 한정이라는 것이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네가 싸움에 나가도 여기 앉아서 기도밖에 못 하잖아. 그런 거 이제 그만하고 싶어. 나도 어엿한 예비 화, 황후잖아. 꽤 괜찮은 인재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고.”

그러니까 허락해.

하고 칼이 입술을 꾹 눌렀다.

“……내가 널 어떻게 이기냐. 칼 린드버그.”

아드리안이 칼의 입술을 반기며 중얼거렸다.

칼 린드버그는 ‘이 사건이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온 이유다.’라고 아드리안을 설득했지만 아드리안은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전우영은 칼 린드버그가 되어 아드리안 헤네켄과 사랑하기 위해 소설 속으로 들어온 것뿐이었다.

길었다. 단 몇 시간이어도 그와 냉랭했던 시간이.

아드리안이 반짝 눈을 빛냈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자기 손으로 닦아 내던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에게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칼 린드버그는 그게 뭐냐고 묻는 대신 혀를 내밀어 아드리안의 손가락 끝을 핥았다.

* * *

“폐하, 왕자님께서 연통을 주셨는데 직접 받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안 받는다 전해라.”

글렌 황제가 테레자의 부른 배를 쓰다듬었다.

모처럼 볕이 좋아 테레자를 안고 황제 부처 전용 후원에 앉아 피로를 풀던 황제는 말을 전달한 가신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벌써 두 번째인데. 급하다고 하시는걸요.”

가신이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러면 버번 백작에게 한 소리 듣는 것은 자신이다.

“아, 듣기 싫다. 뻔해. 파르만으로 보내 달라고 하는 거겠지. 그렇게 안 봤는데 고집이 아주.”

푹신하고 부드러운 감촉의 쿠션도 은은한 보온 마법도, 비와 햇빛을 가려 주는 작은 차양도 모두 황후를 위한 것. 황후는 그 작은 파티오 안에서 남편이 어린애처럼 불퉁해 있는 꼴을 보다가 결국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폐하.”

“응?”

둘뿐일 땐 글렌, 하고 이름을 부르는 테레자가 폐하. 라고 부를 때는 자신이 뭔가 잘못했을 때. 아니면 부탁이 있을 때뿐인 것도 잊어버린 글렌이 헤벌쭉 웃었다.

“왕자를 괴롭히지 마세요.”

마치 방벽처럼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쿠션의 탑을 부수며 테레자가 황제에게 가까이 갔다.

“무슨 소립니까?”

황제가 미간을 살포시 구겼다. 그 와중에도 황후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팔을 펼치는 꼴이 부전자전이다.

“말이라도 들어 보세요. 무슨 이유가 있어 저러는 게 아닐까요?”

“테레자. 나는…….”

“알아요. 부모는 마땅히 자식을 걱정하게 되어 있고 막상 얼굴 보면 흔들릴 게 분명하니 아예 안 보겠다 버티는 거.”

테레자가 남편의 허벅지에 얼굴을 대고 누워 가만히 배 속의 아이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제 형만큼은 아니지만 뻥뻥 발길질을 하는 폼이 제법 씩씩한 아이가 태어날 것 같았다.

글렌이 담요로 황후의 어깨까지 꼭 감쌌다.

“시련이 없으면 아이들은 무슨 수로 성장해요?”

그러라고 린드버그에 보내지 않았느냐고 황후가 되물었다.

“왕자가 결단력을 기른 모양이에요. 그 애가 헤네켄에 온 것은 자의로 보이나 사실 그것도 그 아이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불과했고. 그 후로도 쭉 어른들의 사정에 휘둘리기만 했잖아요.”

“……나도 알고는 있어. 그 애에게 비범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그렇지만 적진에 직접 찾아간다니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오. 그 애가 얼마나 뛰어나든 말입니다. 위험 요소는 한 톨도.”

“남겨 주지 않으면 되잖아요?”

테레자는 손을 들어 글렌의 턱을 쓰다듬었다.

맹수를 길들이는 사육사처럼 부드럽게 턱을 매만지는 손길에 글렌은 눈을 감고 그릉그릉 울었다.

“쥐 소굴에 쥐새끼 한 마리 남겨 두지 말아요. 그 후에 그 아이에게 카펫을 깔아 주면 되잖아요. 혹시 자신이 없어서 그래요?”

천연덕스레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테레자에게 황제가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다고 중얼거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