훅훅.
마르코가 목검을 몇 번째인지 모르게 휘두르고 있을 때. 루루는 멍하니 하늘만 봤다.
오빠가 각인을 한다.
졸지에 먼치킨이 된 오빠가 적진으로 쳐들어간다. 마법의 열쇠를 쥐고.
“시이불.”
대뜸 들려오는 걸걸한 욕에, 사실 욕인지는 모르겠지만 어감이 상당히 욕 같아서 놀란 마르코가 헉, 소리를 내며 루루를 돌아보았다.
“뭘 봐? 백 번 더 휘두르라니까.”
루루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걷어 올린 소매로 땀을 슥 닦은 마르코가 루루를 향해 벌컥 화를 냈다.
아까부터 혼자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일도 없이 매일 빵만 축내고,
“야,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아? 너 나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쓰읍! 쪼그만 게 말대꾸! 누님이 하라면 하는 거지 뭔 말이 많아! 이래 가지고 오빠, 아니 왕자님 따라가겠냐!”
그러면서 어깨가 내려간다느니 팔꿈치 각도가 어쩐다느니 잔소리를 했다.
“씨잉.”
마르코는 울상이 되어 다시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루루는 루루대로 심란한 상태였다.
소설 속 빙의의 별로 좋지 않은 점을 알아챈 탓이었다.
최애와 차애. 그리고 뭐, 오빠를 만난 것까지는 그럭저럭 좋은 편에 속했지만 문제는.
‘중요한 장면이 없어.’
칼 린드버그와 아드리안 헤네켄이 비장하게 각인 선언을 하고, 그 사실은 몇 명의 충실한 사용인들과 귀족들 외에는 비밀에 부쳤던 터라 그녀는 홀로 방에서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붕붕 뛰었다.
그러나 이윽고. 주인공이 각인을 하는 이 설레는 순간에 그녀가 완벽한 타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만 것이다.
두 사람이 잠자리를 하는 곳까지 따라 들어가서 관전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야말로 찍먹하는 수준에 그쳐 있는 소설 속 세상에서 그녀는 어떤 욕망도 실현시킬 수 없었다.
현실에선 주인공들이 알콩달콩하는 것을 볼 수 있어도 그들의 밤만큼은 오로지 그들의 것이라고.
이런 젠장.
욕구불만이다.
루루의 눈이 휙 치켜 떠졌다.
개나 소나 다 하는 연애 소재가 그녀에겐 비켜나 있다.
문득 그녀의 시야에 마르코가 들어왔다.
마르코가 양손으로 목검을 쥐고 공기를 가를 때마다 땀이 사방으로 튀었다.
키는 얼추 170센티 정도 되는 것 같고, 말랐지만 골격은 그래도 볼 만하고. 얼굴 그럭저럭 귀엽고. 나이가 지금 열다섯? 열여섯?
안 될 말이지. 신체는 미성년의 것이지만 속 알맹이는 스물하나인 루루에게는 마르코가 아직도 앵앵 우는 아기 같다.
그래도, 잘 키워 놓으면 괜찮지 않을까.
남자는 스무 살까지는 자란다고 하니까.
흠이 있다면 지독한 주인 바라기라 평생 그것을 이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뿐인가.
“헤에.”
연신 위아래로 자신을 훑어 대는 루루의 시선에 결국 마르코가 목검을 놓쳤다.
“왜, 왜 그렇게 봐?”
“뭐.”
“이상한 눈으로 사람을 그렇게 쳐다보면 집중을 못 하잖아.”
턱을 괴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루루에게 마르코가 왈칵 성을 냈다.
“소재는 좋은데. 잘 키워 놓으면 다른 놈팡이한테 뺏기려나.”
루루가 중얼거렸고 마르코는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을 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해 두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고 루루가 엉덩이를 탈탈 털고 일어났다.
“마르코, 목검 내려놓고 스쿼트랑 팔굽혀펴기할래?”
“스커트가 뭐야?”
루루가 자세를 잡았다.
“스커트가 아니라 스쿼트야. 봐. 이렇게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무릎이 밖으로 가지 않게.”
천천히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루루를 보던 마르코가 눈을 슬쩍 피했다.
날이 점점 풀리고 있어 얇아진 옷감이 그녀의 탄력적인 엉덩이를 매끈하게 감싼 것부터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나, 나는 그렇게, 이, 이상한 운동은 좀.”
말을 더듬는 마르코에게 루루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상한 게 아니야. 마르코. 남자의 힘은 다 여기 허벅지랑 엉덩이에서 나온다고. 알아?”
“몰라.”
“목검 휘둘러 봐야 팔뚝만 굵어지지. 너도 장가는 가야 할 거 아냐?”
“장가는 무슨 장가야. 안 가.”
마르코가 볼을 부풀렸다. 왕자님도 그렇고 루루도 그렇고 아직 어린 저를 장가보내지 못해 안달이다.
“왕자님이 각인하고 나면 왕자님은 이제 완벽하게 황태자 전하의 것이야.”
데엥, 데엥. 성벽 너머에서 영롱한 종소리가 울렸다.
최근에 새로 지은 니키타 신전에서 시간을 알려 주는 종이었다.
“지난 세월 후회하기 싫으면 너도 앞으로의 일을 좀 구상해 두는 게 좋아. 왕자님은 앞으로 소중한 것이 더 생길 거라고. 그럼 그사이에 네 자리는 조금씩 줄어든다니까! 그게 세상의 이치야.”
이미 왕자 마음의 가장 큰 부분은 아드리안 헤네켄이 차지했다. 그리고 아이라도 태어나면.
루루는 마르코의 축 처진 어깨를 두들겼다.
“이렇게 땀을 흘리다 보면 다 지나간다니까. 너에게는 식스팩과 굵은 허벅지가 남아. 그럼 왕자님의 빈자리는 또 누가 와서 채워 주려고 안달할 거야. 누님 믿지?”
의미심장하게 눈을 찡긋하는 루루를 잠시 흘겨본 마르코가 자세를 잡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다시 보여 줘. 어떻게 하는 거라고?”
* * *
마침내 레아 린드버그가 성으로 돌아왔다.
아일라가 치마 양 끝을 붙잡고 나는 것처럼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유모가 뒤에서 공주에게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소리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단 한 번 만난 사람을 이렇게까지 오래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상식을 벗어난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했다.
레아 공주가 별관 정문에 당도했을 때 아일라는 그녀가 눈이 부시도록 새파란 정복을 입고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것을 보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일라 공주의 푸른 드레스가 꼭 맞춰 놓은 것처럼 어울렸다.
별관 중앙 홀에 레아가 다른 기사들과 함께 들어왔다.
아일라는 한 층 위에서 그녀를 보며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기사들에게 무언가 지시하고 홀을 휙휙 둘러보던 레아 린드버그가 아일라 레바를 향해 환히 미소 지었다.
그녀에게 숨구멍을 만들어 줄 단 한 사람.
결혼으로 쓸모를 다 하는 소국의 공주를 평범한 한 사람으로 사랑받게 해 줄지 모를 단 한 사람.
어쩌면 그녀와, 어쩌면 그녀도.
아일라는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탁탁 털어 주름을 펴고 사뿐사뿐 한 계단씩을 내려갔다.
레아와 가까워질 때마다 입에서 심장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긴장하기 시작했다.
헤네켄 제국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훨씬 날카로워진 기운과 함께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페로몬을 맡으며 아일라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레아가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아일라는 눈을 홉뜨고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혹시 당신도.
“……!”
그러나 레아는 아일라를 지나쳤다.
마치 아일라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웃는 얼굴 그대로 지나쳐 그녀가 향한 곳은 아일라의 뒤편에 어정쩡히 서 있는 한 남자에게였다.
“벨프리.”
아일라는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강녕하셨습니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남자가 우물쭈물 레아 린드버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강녕해 보이나요? 공자가 울고 있지 않을까 걱정되어서 빨리 일을 맺음하느라 정신없었는데.”
남자가 헉, 소리를 내며 한 걸음 물러나자 레아는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저 남자는,
‘벨프리 헨드릭.’
헨드릭 공작가의 삼남. 아비가 정해 준 아일라의 또 다른 선택지인 헨드릭 가의 세 형제 중 유일한 베타. 그래. 그는 베타였는데?
레아가 벨프리의 뺨을 스스럼없이 매만졌다.
“그대는 얼굴이 상했군요.”
아일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선가 진한 꽃향기가 물씬 풍기고 기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 레아 린드버그가 중얼거렸다.
“역시, 좋은 냄새.”
“아직 갈무리가 잘 되지 않아서. 송구합니다.”
레아는 기사들에게 손을 휘적여 보였고 기사들은 잽싸게 흩어졌다.
“좋은 냄새예요.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나눠 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레아의 적나라한 호감의 표시에 벨프리는 비실거리며 떨었고 아일라는 절망했다.
“그런 소리 좀 안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누가 들으면 오해합니다.”
딱딱한 벨프리의 말투에 레아는 유쾌한 듯 웃었다.
“마음은 좀 추슬렀어요?”
“뭘요. 공주님 때문에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했습니다. 덕분에 일이 엉망이에요.”
틱틱거리는 말투였지만 벨프리가 레아와의 만남을 얼마나 기꺼워하는지 넘실거리는 아카시아 향기가 증명해 주고 있었다.
주먹을 틀어쥔 아일라가 크게 심호흡했다.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레아 린드버그 공주님.”
“아!”
그제야 이 층계 위에 저희 들만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한 벨프리가 허겁지겁 허리를 숙이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가 휘청거릴 때 레아가 그의 허리를 잡으려고 했으나 벨프리는 몸을 돌려 피했고. 레아는 멀어지는 벨프리를 보며 의뭉스러운 얼굴을 했다.
“축하 감사합니다. 아일라 공주. 지내기 불편한 것은 없으셨는지?”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배려해 주셔서.”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으며 아일라는 평정을 유지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레아의 금색 말총머리가 반쯤 잘려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아일라가 입을 가리며 “어머, 머리를 자르셨군요.”라고 말했다.
“아아,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일을 보다가 영 좋지 않은 것이 묻어서. 이참에 잘라 냈답니다.”
즉결처분을 들어 마음껏 검을 휘두르던 레아의 머리끝이 붉게 물들자, 그녀의 부관 중 한 명이 그녀의 머리를 잘라 냈고 레아는 그 머리카락을 미련 없이 태워 버렸다.
린드버그의 공주로서 억압받으며 살았던 세월을 아예 잊어버리겠다고 속으로 선언하면서.
아일라는 그녀의 아무렇게나 잘린 머리가 신경 쓰였다.
“잘 어울려요. 저, 제가 공주님의 머리를 만져 드려도 괜찮을까요?”
공주가 벨프리에게 어떤 마음을 지녔든, 둘 사이는 아직 그렇고 그런 사이. 헤네켄의 황태자와 칼 린드버그 사이를 파고들 마음은 이만큼도 없었지만.
레아 린드버그와 벨프리 헨드릭의 사이는 얼마든지 파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안에 얼마 되지 않은 용기를 뽑아낸 아일라에게 레아가 살포시 웃어 보였다.
“공주님께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맡기는 것은 대단히 실례 같습니다만.”
“아니요. 제게는 영광일 겁니다. 꼭, 제가 그 머리를 다듬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레아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업무가 채 마무리되지 않아 당분간 바쁠 예정이니, 그 후로 하겠다는 애매한 허락을 하고 레아는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아일라는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뒷모습도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우실까.
아직 린드버그가 정식으로 공국으로 독립하지 않았고 대관식도 미루어졌기 때문에 레아는 여전히 공주였다.
그러나 그녀가 이미 왕관을 썼다는 것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완벽한 왕 같았다.
“이 마음, 쉽게 내려놓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공주님.”
아일라가 조용히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