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관의 한 층이 전부 비워졌다. 사용인과 병사들 중 형질자는 모두 다른 곳에 배치되었다.
극 우성 알파의 억제 효과를 제거한 본격적인 러트에 다들 긴장 상태였다.
대사제가 황제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는 소식이 먼저 들어왔다.
헤네켄에서 경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보내도 모자랄 러트를 우중충한 린드버그에서 보내게 했다고 말이다.
물론 다니엘은 칼 린드버그를 걱정해서 한 말이었겠지만. 우중충하다는 표현은 조금 슬펐다.
하여간 당사자들보다 더 호들갑을 떨어 대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칼 린드버그의 가슴이 약간 쪼그라들었다.
아드리안은 별일 없이 정무에 매달렸다. 전장과 별개로 린드버그 왕국은 새로 탈바꿈 하고 있었고 그 사이에 헤네켄의 입김이 들어가는 모든 서류는 아드리안의 손을 필요로 했다. 그 장소가 별관 2층 집무실에서 3층 침실로 바뀌었다는 것 빼고는 특별치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칼 린드버그는 내내 어슬렁거리며 아드리안의 곁에 머물다가 그의 페로몬에 특이점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며 조바심을 냈다.
결국 침실 밖으로 잠시 빠져나온 칼은 루루에게 갔다.
물을 사람이 그녀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재영아.”
“누가 들을까 겁나니까, 루루라고 불러.”
“그래, 루루야. 혹시 각인하다 죽는 사람도 있냐?”
황태자의 침실에서 응접실을 지나 복도 구석진 곳에 나란히 쭈그려 앉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예요.”
레아가 환궁한 후에 루루는 외부에서 꼬박꼬박 존칭을 썼다.
소설 속에서는 칼 린드버그의 악행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장치에 불과했던 레아와 현재 행보가 두드러지게 다른 것이 경외에 가까운 공포심을 유발했다.
그리고 전생의 남매라고는 하지만 동네방네 빙의 사실을 소문낼 일은 아니니까.
보송보송한 새 시트나 베게 커버 등을 부지런히 침실 옆방으로 옮기는 것을 지켜보던 칼이 다시 물었다.
“그럼 내가 아드리안과 러트를 보내다 죽을 확률은?”
“그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요.”
“그렇지?”
“갑자기 겁이 나세요?”
지금 딱 도망쳐서 아드리안 미치는 꼴 보는 것도 존맛탱이겠다며 루루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도망쳐 봐야 아드리안 손바닥 위니까 할 수 있는 소리긴 해도.
“예, 뭐, 그렇습니다. 조금.”
칼 린드버그가 뚝딱이가 되었다. 그가 푹 고개를 수그리니 내내 손에 쥐고 있던 한 줌의 들꽃이 덜덜덜 떨리며 꽃잎 몇 개를 떨궜다.
“그건 왜 들고 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이거? 정원에서 꺾어 온 거야. 겨울나기를 잘했더라고.”
그럭저럭 향기롭긴 했으나 루루가 궁금한 건 ‘왜’ 지금 꽃을 꺾었냐는 거다.
“우리의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는 의미로다가.”
아오, 각인하기 전에 부모님이랑 레아 린드버그 허락받아야 한다더니, 이 오빠는 지금 러트와 각인이 연애의 새로운 이벤트 정도로 생각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누가 러트를 그렇게 보내!
루루가 눈을 가늘게 뜨고 칼을 흘겼다.
그 시선에 칼 린드버그가 “들꽃은 좀 그런가? 백 송이 장미를 준비했어야 하나? 근데, 장미가 철이 아니라서.”라며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입으로는 죽는 건가 어쩐가 하면서 은근히 기대하는 꼴이 빤히 보였다.
웃기지도 않아 진짜.
순탄치 않은 스무 해, 짧은 인생에도 별별 일 다 겪었던 터라 빙의도 스무스하게 넘어갔건만. 혈육이 연인과 보내는 러트 상담을 하다니 이게 최고의 별스러운 일이다.
루루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녀도 모르는 영역임은 매한가지였다.
칼 린드버그가 톡톡 제 어깨를 두드리는 루루의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남자답게 해치우세요. 활자로 봤을 때는 아주 극락이랍니다.”
방긋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루루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시종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저, 왕자님. 슬슬 돌아가 보셔야겠습니다.”
“히익!”
얼굴이 희게 질린 왕자님은 그렇다 치고, 시종은 덩달아 새빨개지는 루루의 볼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 * *
그래, 횟수로 몸 섞은 것만 해도 벌써 열댓 번은 되는데, 그까짓 러트, 담대히 넘겨 주겠어.
주먹을 쥔 칼 린드버그가 조심스레 침실로 향했다.
“아!”
침실에 피톤치드향이 꽉 찼다. 그 언젠가 유행하던 쿨워터향처럼 미남의 정석으로 뇌리에 박힌 아드리안의 페로몬 냄새.
칼 린드버그는 자신이 숲을 산책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맡기만 해도 몸이 홧홧 달아오르니까.
침대에 누워 한쪽 팔로 눈을 가린 아드리안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뱉기를 반복하며 의도적으로 칼 린드버그를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사이 칼 린드버그는 정원에서 꺾어 온 꽃을 화병에 담고 손까지 야무지게 씻은 다음 심호흡을 한번 하며 아드리안의 짙은 페로몬을 만끽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에 아드리안의 귀가 쫑긋 섰다.
뭘 하는지 사부작거리며 혼자 분주한 칼 린드버그의 손목을 끌어당기고 발끝부터 샅샅이 핥아 올리고 싶었지만 한 방울 정도 남아 있는 이성이 칼에게 시간을 주라고 말하고 있었다.
“흐음.”
거울 앞에서 알몸으로 아직도 남아 있는 지난 흔적을 살피고 가운을 걸치는 칼 린드버그의 손길이 쓸데없이 비장했다.
오늘은 아드리안이 다소 거칠어도 다 받아 줘야지.
몸은 진작 씻었고, 아까부터 준비 완료 상태였으니까 이대로 무슨 짓을 당하든 상관 없었다.
“괜찮아?”
침대에 걸터앉은 칼 린드버그의 몸에서 뭐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좋은 냄새가 났다.
아드리안의 신경이 전부 살아 움직여서 칼의 피부를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이성, 이성을.
“아니.”
아드리안은 꼼작하지 않고 손바닥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땀이 다 나네. 이걸 어떻게 매번 참았어? 러트가 두세 달에 한 번이라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진작 고삐를 풀어 줬어야 하는데.
칼 린드버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아드리안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주고 습관처럼 입술을 가져다 댔다.
팔뚝에 힘줄 선 것 보게. 안 그래도 되는데.
칼은 열리지 않는 입술에 쪽쪽, 소리 내어 입을 맞추며 한 손으로 허리끈을 풀었다.
“옷은 벗어야지.”
아드리안은 감색의 실크 셔츠와 빳빳한 재질의 바지를 아직도 입고 있었다.
“하지, 하지 마.”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어 가던 칼 린드버그의 손이 잡혔다.
그제야 아드리안의 눈을 본 칼 린드버그가 작게 웃었다.
칼 린드버그가 손을 탈탈 털었다.
아드리안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가고 입술은 꾹 다물렸다.
“표정이 왜 그래?”
칼 린드버그가 단추를 마저 풀다 말고 깜짝 놀랐다.
눈썹을 찡그리고 하, 하고 뜨거운 한숨을 내쉰 아드리안이 턱에 주름이 질 정도로 서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그래? 응? 기대했잖아.”
다급히 아드리안의 양 뺨을 잡으며 가까워지는 칼의 얼굴, 그리고 그 아래로 매끈히 뻗은 목선과 판판한 상체를 보면서 아드리안은 침을 꼴깍 삼켰다.
“조금 있으면 네 앞에 있는 사람은, 인간처럼 보이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도 날 사랑해 줄 건가 싶어서.”
아드리안은 세상에 자신을 두렵게 만들 수 있는 한 사람을 눈앞에 두고 그에게 손톱과 이를 세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아, 정말.”
칼 린드버그는 키득키득 웃었다.
두려움이 삽시간에 증발했다.
우람한 상체 근육과 위협적인 기세와 상반되는 아드리안의 얼굴이. 또 그의 이성과 본능의 마지막 경계선인 것처럼 꽉 조인 허리띠가 칼의 마음을 달궜다.
“진짜야. 나는 무서워.”
웃는 칼 린드버그가 얄미워서 아드리안은 그의 가운을 붙들었다.
잡티 없이 깨끗한 몸에 새겨진 그의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이 사람을 더럽히고 싶다, 엉망진창으로 구겨서 범하고 싶다는 욕구로 눈앞에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칼 린드버그는 순순히 끌려와 벗은 몸을 겹치고 아드리안의 허리춤을 잡았다.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예쁜 건 칼 린드버그 자신이었지만 그런 그의 눈에는 아드리안이 환장하게 예뻤다.
둥근 구석이 없는 각진 얼굴과 단단한 몸에 네게 미움받기 싫다고 말하는 요 입술도.
귀여워 죽겠다.
철컥철컥, 풀리는 허리띠 소리와 함께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의 허벅지로 내려앉았다.
아드리안은 눈을 뜨고 자신의 위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서워하지 마. 주저하지 마. 다 줄게.”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고 중얼거린 아드리안은 자세를 뒤집어 칼 린드버그를 깔고 앉았다.
아드리안이 한 일은 칼 린드버그의 손목을 자기 허리띠로 묶는 거였다.
그대로 묶인 손목을 제 목에 건 아드리안은 이성을 내다 버렸다.
“중간에 도망치고 싶어도 절대 안 보내.”
“보내지 마. 안 떠날게.”
칼 린드버그는 아드리안의 입술을 빨았다. 아드리안은 화가 난 사람처럼 칼의 허리를 쥐어짰다.
손이 닿은 곳마다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변했다.
감히 러트 직전의 알파를 도발한 죄로 칼 린드버그는 찍소리도 못하고 울고불고 목이 쉬도록 신음했지만 절대로 아드리안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좋은 냄새. 사랑스러운 향기.’
‘내 사람. 내 거,’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서로의 몸을 물고 뜯었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의 입술을 갈구했다.
칼 린드버그는 그때마다 착실하게 요구에 응했다.
아드리안의 사랑은 밑 빠진 독 같았다. 쏟아부어도 모자란 사람처럼 굴었다.
짐승처럼 유린하다가도 어린애처럼 안겨 왔다.
발목을 터뜨릴 기세로 쥐어 잡고 몰아붙이다가도 칼 린드버그가 엉엉 우는 소리에 기세를 낮추고 정성껏 상처를 핥고는 했다.
마음대로 하라니까. 진짜.
칼 린드버그의 머릿속에는 그런 아드리안이 사랑스럽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어디에 이런 열정이 숨어 있었을까.
아드리안의 목을 끌어안으면서 칼 린드버그는 생각했다.
이 세상에 와서 다른 누구도 아닌 아드리안 헤네켄을 만나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 행운이라고.
그의 눈에 들어간 게 자신이고, 자신의 눈에 들어온 것이 아드리안 헤네켄이어서 다행이라고.
매일 아침 눈 뜨면 했던 생각을 또 하고 또 했다.
아드리안은 그런 칼 린드버그의 생각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러트, 무섭다. 근데, 진짜 좋아.
헐떡거리던 칼 린드버그는 불시에 평소와 다른 감각을 느꼈고 크게 비명을 내질렀다.
아드리안의 양팔에 온몸이 속박당했다.
뜨거워,
발버둥 칠 재간도 없이 덜덜 떨리는 몸을 아드리안이 놓칠세라 끌어안았다.
그리고,
칼의 목 뒤를 진득이 핥던 아드리안은 이를 세웠다.
“……!”
이번에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아파,
물어뜯긴 목덜미부터 몸 안쪽이 바스러지는 것 같았다.
자칫하면 정신을 놓을 것 같아 칼 린드버그가 발끝에 힘을 주고 버텼다.
“괜찮아. 괜찮아.”
다름 아닌 칼 린드버그 자신이 자신에게, 또 아드리안 헤네켄에게 하는 소리였다.
칼 린드버그는 간신히 한쪽 팔을 들어 아드리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깨에 아드리안의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똑똑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