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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18)화 (118/150)

아드리안이 정신을 차린 것은 만 이틀이 지난 새벽. 동이 터 오는 무렵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몰라, 너무 찰나 같았다.

칼 린드버그는 그의 품 안에서 색색 잠을 자고 있었다.

입이 있으나 말하지 않고 귀가 있으나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헤네켄의 사용인들은 유령처럼 들어와 엉망인 침대를 정리했다.

덕분에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따듯한 이불에 푹 파묻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칼 린드버그의 얼굴을 양껏 감상했다.

얇은 입술과 눈가가 통통하니 부어올라 있다.

“힘들었겠지.”

아드리안이 칼 린드버그를 끌어당겼다.

시트에 쓸린 살이 아팠는지 이마를 찡그리며 끙끙 앓는다.

목뒤의 선명한 상처를 아드리안이 핥고 또 핥았다.

그러다가 또 식욕이 돋아서 상처 부분을 깨물자 칼 린드버그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똑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쓰다듬었다.

짝 없는 알파는 다 비슷비슷하겠지만, 특히 아드리안에게 러트는 늘 고통과 상처뿐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 사람과 함께 맞은 이 시기가 반갑고 좋아서, 각인의 순간에는 저도 모르게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

“나한테 정떨어진 거 아니지?”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다시는 안 한다고 하진 않겠지?

그런다고 해도 이 손을 놓을 일은 이제 없겠지만.

하도 물고 빨아서 자글자글 주름이 잡힌 손끝에 입을 맞추고 움켜쥐었다.

“무서웠지. 나도 그랬어. 그래도 후회는 없어. 너도 그렇지?”

소곤소곤 답도 없는 상대한테 잘도 묻는다.

정작 답을 해 줄 사람은 잠에서 깨지를 못하고 오물오물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잠꼬대처럼 한다. 아드리안은 혼자 끄덕끄덕 좋아하며 이불로 둘둘 칼을 말고 자기 위에 얹어 놓았다.

아드리안의 주관에 의하면 ‘새털처럼 가벼운’ 이 사람은 이제 날아갈 곳이 없다.

애초에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칼 린드버그의 영혼이 다른 세상의 것이라서 기뻐하는 이기적인 자신을 용서해 줬으면.

아드리안이 숨 쉬며 살아가는 이 장소가 칼 린드버그에겐 고작 종이 몇 장 사이의 것들이라지만 그 안에서라도 자신이 주인공이었다는 것이 못내 감격스럽다.

아드리안 헤네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주인공이었으면 칼 린드버그는 그에게 잡혔을지 모르니까.

간밤, 칼은 울먹울먹하면서 제 마음을 터놓았다.

“너라서 다행이다.”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칼 린드버그를 죽을 만큼 몰아붙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다는 지배 욕구로 혼탁한 정신에도 그 말은 또렷하게 와닿았다.

깰 기미가 없는 칼 린드버그의 이마가 닳도록 입을 맞추면서 아드리안 헤네켄은 낯간지러운 생각을 했다.

‘여태 살아 있기를 잘했다.’

글렌 황제가 들었다면 숨이 멎을 만큼 웃고 테레자 황후가 들었다면 숨이 멎을 만큼 등짝을 때렸을 텐데.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칼 린드버그, 내 삶의 전부.”

소리 내서 말하니 더 선명하게 가슴에 박힌다.

칼 린드버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겹치고 속눈썹이 맞닿는 감각을 느끼며 아드리안은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그렇게 하염없이 짝의 자는 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 * *

“거, 오늘따라 더 반짝반짝 빛이 나는군요.”

어딘가 샐쭉한 느낌이 나는 레아의 말에 아드리안 헤네켄이 영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습니까? 기침과 행복은 감출 수 없다는 말을 요즘 실감합니다.”

칫, 하고 레아가 고개를 돌렸다.

뱃속이 살짝 뒤틀렸다. 벨프리에겐 뼈저린 실연의 아픔을 줘 놓고 둘은 레아가 없는 사이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끝끝내 그것까지 해치우다니.

제니스는 레아의 뒤에서 소리 없이 웃었다.

말은 얄밉게 하지만 레아에게서도 드물게 좋은 느낌의 페로몬이 미량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칼은 아직도 몸이 좋지 않아 누이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로 침실에서 요양 중이었고 그 곁을 지키던 아드리안을 보고를 명목 삼아 끌어낸 것이 레아였다.

그보다 성안은 사랑과 페로몬이 넘치는 하하 호호 꽃밭이어도 바깥은 우당탕탕 잿더미였기 때문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린드버그의 구 귀족들 중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레아의 단호한 말에 아드리안은 금세 낯빛을 달리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지만, 살릴 놈이 하나도 없었습니까?”

“예, 단 한 명도.”

레아는 생각보다 덤덤했다.

오히려 후련해 보였다.

발밑에 구더기가 들끓고 있던 것을 여태 몰랐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먼저였고, 직접 그들의 악행과 폭정을 눈으로 확인하고 난 후로는 일절 자비를 거두었다.

정도에 따라 일부는 즉결 처분했고 다수는 효수하여 목을 걸었으며 몇 명의 영주들은 광장에 산 채로 매달아 두었다.

영주에게 돌을 던지면서도 동정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 그곳에서 레아는 피 묻은 검을 닦으며 사람들의 얼굴을 빠짐없이 새겼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그 빈자리는 어떻게 채울 예정입니까?”

“일부는 평민 중에서 선발하고 일부는 제국에서 영입하면 어떨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드리안의 물음에 레아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귀족들이 전부 죽었다는 것도 파격적인데, 제후를 타국 사람으로 세우면 어마어마한 파장이 일지도 몰랐다.

“헤네켄에서요? 두 나라가 과거에는 친밀했다고 하지만 국경을 닫고 지낸 지가 한참인데, 반발이 우려됩니다.”

틀린 말은 아닌지라 레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게다가 지금 몇 안 되는 신흥 귀족을 포함한 헤네켄의 제후들은 전부 역할이 정해져 있어 이주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저는, 평민들을 위한 공국을 만들고 싶습니다. 아드리안 전하.”

몸매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연두색 드레스 차림에도 레아는 용맹한 전사처럼 보였다.

“공국의 틀은 유지하지만, 저는 공왕, 공국의 얼굴이자 기둥으로 남고 영지를 모두 평민에게 돌려줄 생각입니다.”

칼과 똑같은 얼굴의 단호한 눈빛을 한 전사가 아드리안의 앞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반론은 불허했다.

“영지를 분배하겠다는 말씀입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 모두에게, 공평하게요?”

아드리안의 질문에 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공평한 세상은 없습니다. 전하. 다만, 그간 귀족에게 집중되었던 법과 경제권을 전부 뒤엎고 사람과 사람으로 서로 마주하게끔 해 보려고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너도나도 다 알았다. 하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 또한 자명했다.

“애초에 귀족이 등장한 것은 마법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린드버그에서 마법을 직접 구현하는 마법사가 권력을 쥔다는 말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레아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중앙에서 누가 잡지 않으면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는 것이 또 사람인지라.”

그 말에 아드리안이 곰곰이 생각했다. 헤네켄에서 귀족이 아닌 자를 평민의 지도자로 영입하면서 반발이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역이주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군요. 린드버그에서 헤네켄으로 넘어온 난민들 말입니다.”

정답이었다. 레아가 찻잔을 쥐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맞습니다. 이주민 중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요직에 근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장 황성에도 칼 린드버그와 나란히 반죽을 주무르던 성의 조리장부터 기사단까지 많은 이주민이 존재했다.

자신 있는 분야라면 귀천에 관계없이 등용되는 헤네켄의 정책을 눈여겨보던 레아였다.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주민 중 린드버그에 돌아오고 싶은 사람들도 여럿 있을 걸로 생각됩니다.”

특히 린드버그에 남겨 둔 가족이 있는 자들이라면 개혁을 환영하고 새 왕실에도 힘을 실어 줄 테니.

“서두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왕국을 비운 동안 어느 정도는 평민들이 알아서 자리를 잡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여 그들의 마음을 추스르는 데 힘을 쏟고, 기틀을 다진 뒤에 제국과 별도로 논의를 하는 방향으로 할게요.”

“좋습니다. 그럼 오늘의 이야기는 폐하께도 전달해야겠군요.”

아드리안의 말에 레아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쪽이 러트로 정신없을 때 이미 전했습니다.”

행동력에 있어서는 아드리안을 앞서는 레아가 글렌에게 연락을 취했을 때, 그는 양 국가 간의 결속 때문이라도 레아의 의견을 환영한다 말했다.

표면적으로 황실에 완전히 편입되는 것은 칼 린드버그 하나뿐이었지만 레아의 새로운 정책이 실행되고 나면 린드버그와 헤네켄을 분리하는 것이 더욱 힘들어질 테니 글렌이 반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분주하셨겠습니다.”

“뭘요. 그쪽은 이제 전장으로 나가니 나는 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야죠.”

레아와 아드리안은 마주 앉아서 술잔 대신 찻잔을 들어 보였다.

“그나저나, 어땠습니까? 첫 러트 사이클의 느낌은?”

레아는 알파로서의 순수한 궁금증을 담아 물었다.

‘첫 러트’라는 말은 옳은 표현은 아니었지만 어떤 의미의 ‘첫 러트’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까?”

아드리안이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릅니다. 이전의 내가 어떤 마음으로 러트를 견뎠는지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품 안의 존재가 사랑스러워서 나 자신이 희미해질 정도로.”

순간 목구멍이 타는 듯하여 아드리안이 식은 차를 넘기고 말을 이었다.

“황홀 그 자체였습니다.”

부럽다. 레아의 입술이 어쩔 수 없이 반쯤 벌어졌다.

“부디, 제 동생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군요.”

괜한 말을 하는 것은 부러움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어떻습니까. 이제 저를 ‘아직’ 가족도 아닌 아드리안으로는 더 이상 지칭하지 못하시겠지요?”

지난번에 아직 가족도 못 된 아드리안이라고 일갈했던 것을 잊지 않았던 모양이다.

레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별수 없죠. 제가 졌습니다. 가족이 된 걸 환영하는 연회는 전쟁이 끝난 후에 성대하게 열어 보도록 하죠.”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며 아드리안은 능글맞게 웃었고 레아는 다시 찻잔을 부딪쳤다.

“아, 그러고 보니 파르만에 당도한 헤네켄의 군은 어쩌고 있답니까? 보고할 것이 많았던 나머지 미처 귀담아듣지 못했군요.”

레아가 물었고 아드리안은 기억을 더듬었다.

“이틀 전에 파르만의 성벽에 당도했고, 공성전에 돌입했다고 하니 지금쯤 성벽이 반은 부서져 내렸을 겁니다.”

아드리안과 레아가 동시에 찻잔을 내려놓고 눈을 마주쳤다.

“진입을 하고도 남았겠군요.”

“니키타 신전의 성기사들이 투입되었으니 지금쯤 난도질이 한창이겠습니다.”

팔짱을 낀 레아가 아드리안의 뒤쪽, 침실 문을 가리켰다.

“잠자는 왕자님을 깨우시지요. 벌인 일의 책임을 져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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