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네 누이는 실로 잔인해.”
“무슨 소리야?”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심지어 칼 린드버그도 만류했지만 부득불 욕실까지 따라 들어와 목욕 시중을 들던 아드리안의 말에 칼이 눈을 반짝 떴다.
“네 자는 얼굴을 봤으면 알 텐데, 요정처럼 무해한 그 모습을 보고도 기어이 널 깨우다니.”
철썩.
칼이 아드리안에게 물을 뿌렸다.
젖어도 잘생긴 얼굴이 실실 웃는 꼴을 본 칼 린드버그의 표정이 아궁이에 들어간 고구마처럼 변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전부터 느꼈지만 너 혀에 기름칠 그만해.”
느끼해 죽겠어.
레아 린드버그는 확실한 선택을 했다. 칼을 깨운다며 침실로 향했던 아드리안이 2시간이 넘도록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몸소 등판하여 칼 린드버그를 깨웠던 것이다.
“기름칠이 아니라 진짜야. 맹세컨대 자는 모습도 깨어 있는 모습도 완벽한 건 이 세상에 너뿐이야.”
아드리안이 진지한 얼굴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와, 진짜 잘생긴 미친놈.”
칼이 입을 헤 벌리고 저도 모르게 속에 있는 말을 했을 때, 아드리안은 큭큭 웃으며 입술을 내밀었다.
질색하는 칼의 반응이 마음에 쏙 들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인데. 칼 린드버그의 사람 좋은 모습이 벗겨질 때마다 심리적으로 성큼성큼 가까워지는 기분이라 어쩔 수 없이 흥분하게 된다.
“그러니까 나를 빨리 깨웠으면 됐잖아.”
툴툴거리던 칼이 아드리안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갖다 댄다.
아드리안의 입꼬리가 당겨지는 것을 본 칼은 아차 했다. 닿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이러다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막 부대끼는 건 아니겠지.
공인된 상대지만 조심은 해야겠다고 칼이 속으로 다짐했다.
“깨우려고 했어. 레아 린드버그가 들어오기 직전에.”
자는 칼을 감상하며 허송세월 버린 아드리안의 뒤에 마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 레아가 칼 린드버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니 아드리안이 조용히 하라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 후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칼 린드버그는 비몽사몽간에 아드리안과 레아의 육탄전을 말려야 했다. 그러다 정신을 완전히 차린 뒤에는 자신이 알몸에 가운 한 장만 걸친 상태로 누이를 만났다는 것에 당황했다.
“누이라지만 남의 침실을 그렇게 막 박차고 들어오면 쓰나.”
“당연하지. 각인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곤 하지만, 한시가 급하니까.”
칼이 레아의 역성을 드는 것에 볼을 부풀리던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가 진짜로 당황하는 듯해 장난을 멈추었다.
솔직한 아드리안의 심정으로는, 영원히 깨우지 않았으면 하긴 했지만. 한시가 급하다는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칼의 두피를 문질렀다.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손길에 나른히 잠이 쏟아지는 것을 참으며 칼이 입을 열었다.
“파르만의 국왕이 그리고 있는 진은 여러 뜻이 있는 상형문자야.”
상형문자? 생소하지만 느낌으로 알아들은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가 물이 묻은 손가락으로 타일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구슬을 뜻하는 단어가 왼쪽에, 그리고 밭이나 논을 을 뜻하는 단어가 위쪽에, 그 아래쪽에 다시 땅을 뜻하는 단어가. 이렇게 세 가지가 조합되어 하나의 글자가 만들어지지.”
구슬과 밭을 다지고, 다듬는 것에 기원을 둔 ‘다스릴 리’는 사실 현대에 와서는 이치와 도리에 가까운 뜻으로 변모했다. 그것을 알려 준 것은 다름 아닌 루루였다.
“이 구슬은 특별한 구슬이래. 다듬고 깎아서 보물을 만드는데, 그게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라서, 나중에는 ‘고치다.’라는 뜻도 가지게 되었고.”
마정석이랑 닮은 것 같다고 칼 린드버그가 덧붙였다.
똑같은 단어라도 의미는 무궁무진한 것이 글의 세계. 도감에는 단 한 가지 뜻과 표현만이 존재했다. 칼 린드버그가 그것이 글자라는 것을 알려 주기 전까지.
“파르만의 국왕이 이게 그림이 아니라 문자인 줄 인지하고 있었더라도 좋은 뜻으로 사용하려던 것은 아닐 거야. 그랬다면 사람을 죽여 가며 굴을 파지는 않았을 테니. 나는 그걸 바꿔 볼 생각이야.”
목 뒤의 잇자국이 달아오를 정도로 몸을 데운 칼은 뻐근한 허리를 주무르며 벌떡 일어났다.
아드리안은 그 몸에 새 타월을 감싸며 물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칼 린드버그의 말은 대체로 일리가 있었지만 확실하지 않은 구석도 없지 않았기에 걱정이 앞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칼이 철회한다면 받아들이고 싶었다.
“으, 네 말도 맞는데.”
갑자기 일어나서 그런지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눈을 감고 잠시 아드리안의 팔에 기댔던 칼이 눈을 반짝 떴다.
“그렇다면 더더욱 들어가야 할 것 같아. 모르니까.”
칼 린드버그의 생각에는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가장 잘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자신이었다.
한자의 의미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이었으니까.
“나도 무섭긴 해. 이런 잡지식 수준의 것이 문제를 해결해 줄지 의문도 들고.”
사용인이 두고 간 옷을 주섬주섬 입는 칼은 아드리안이 자신의 알몸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것은 가뿐히 무시했다.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가 스스로 옷을 입는 장면을 보면서 그가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특히 지금처럼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그가 ‘양말’이라고 부르는 발싸개를 신을 때.
준 귀족 이상만 되어도 어릴 때부터 옷시중을 받기 때문에 사용인이 들어오기 전까지 알몸이거나 실내복 차림인 경우가 많은데 왕자는 유독 그 시간을 못 견뎌 했다.
유능한 시종 마르코는 왕자가 일어나기 전에 그의 머리맡에 외출복 일체를 가져다 두었다.
까다로운 구석도 없어, 편하기만 하면 아무거나 주워 입는 것도 그를 더 소탈하게 보이도록 했다.
“딱히 주목받고 싶은 건 아닌데, 멍석이 깔린다는 느낌인가. 어, 아니. 카펫이 말이야. 그래서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싶어.”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를 ‘먼치킨수’라고 지칭했다.
무지막지하게 힘이 세고 뭐든 다 척척 해내는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파르만의 국왕을 갱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드리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칼 린드버그가 뛰어난 건 맞지만 ‘무지막지하게 힘이 센’ 건 아니었다. 신도 아니었고.
칼 린드버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갱생이라니. 이미 업보를 산더미처럼 쌓았다.
“아니. 꿈도 안 꿔.”
왕자는 바지를 털고 일어나 겉옷을 걸치기 전에 아드리안의 젖은 셔츠를 벗겼다. 마른 수건으로 아직 촉촉한 머리카락과 상반신을 꼼꼼히 닦은 뒤 새 셔츠의 단추를 끼웠다.
턱에 닿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워도 참고 가마를 내려다보는 아드리안은 별것 아닌 그 행위에도 행복을 느꼈다.
“우리 전하는 추위도 모르고. 아휴. 손 많이 간다. 많이 가.”
목 단추는 잠그지 않고 놔둔 칼 린드버그가 농담을 했다.
“손 많이 가서 싫어?”
“아니, 챙기는 맛이 있네.”
만지는 맛도 있고. 칼 린드버그는 은근히 입맛을 다셨다.
“그럼 매일 해 주지 않겠나.”
아드리안은 한 손을 내밀며 정중히 요청했다.
“프러포즈하는 겁니까?”
“예.”
장난인 줄 알면서도 눈빛에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이렇게 멋없는 청혼은 처음 봅니다. 그렇지만 그대의 얼굴과 몸을 봐서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칼 린드버그와 아드리안은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아드리안은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에 “다짜고짜 아이를 낳아 달라고 하는 것보다는 나았지요?” 하고 물었고 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만 놔두면 계속 깨가 쏟아진다,
첫사랑에 취해 있는 사람과 연애 불능 중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연애 불능 쪽이었다.
칼이 먼저 아드리안의 손을 놓고 재킷을 걸쳐 입었다.
“하여간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황태자 전하. 앞으로는 헤네켄의 군대가, 뒤로는 황실과 누이가 있고, 전하께서도 제 등을 지켜 주신다고 하니 제가 성의를 보여야지요.”
아드리안은 재킷 대신 망토를 걸쳤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빨리 해결 보고 얼른 돌아옵시다.”
부웅, 밖에서 뿔 고동 소리가 연거푸 세 번 들렸다.
아드리안과 칼은 서로의 손을 쥐고 밖으로 나갔다.
* * *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마르코는 기다렸다는 듯 왕자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도구를 내밀었다.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가 얽히고설켜 곧게 위를 향하고 그 정중앙에 영롱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마정석이 박혀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촘촘히 엄지손톱만 한 마정석을 둘러 둘러놓았는데 그것이 허리춤에 부적처럼 달고 다니는 아드리안의 〈네, 목, 들〉과 공명하는 것을 확인했다.
“아름다워요. 왕자님.”
칼 린드버그가 시험 삼아 붕붕 마도구를 휘둘러 보이자 마르코가 양손을 모으고 눈을 반짝였다.
“그래?”
“네, 이렇게 대놓고 커다란 마도구를 상시 들고 다니시는 분은 귀족 나리들 중에도 없으셨는데, 정말 잘 어울리고 위엄마저 느껴져요!”
모티브는 〈반지의 제*〉이다.
……마법에 대해 아는 것이 그것뿐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빈약한 상상력.’ 하고 속으로 한숨을 쉰 칼 린드버그는 특별히 아드리안의 망토 색과 맞춘 후드를 뒤집어썼다.
늑대 두 마리가 겹쳐 서서 한곳을 바라보고 있고 그 주변을 넝쿨 지어 만발한 꽃의 문양이 돋보이는 남색 후드는 칼 린드버그의 신비로운 외모를 돋보이게 했다.
칼이 루루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나 어때?’
‘오빠가 마음을 단단히 먹었구나.’
마르코의 옆에 있던 루루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아드리안과 눈이 딱 마주치자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내가 친동생이란 거 아직 말 못 했나 보네.’
최애의 흉흉한 기색에 오히려 루루의 가슴이 쫄깃했다.
레아 린드버그와 벨프리는 별관 정문 근처 회랑에 서 있었다. 머리를 맞대고 뭔가 의논하던 그들은 옷을 맞춰 입고 등장한 두 사람을 보며 짠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쯧, 저 지긋지긋하게 달콤한 기운 좀 보게나.’
각인 뒤라 칼 린드버그에게는 더 이상 그의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았고 오로지 그의 알파인 아드리안 헤네켄의 향기만 풍겼다.
벨프리는 소름 돋게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을 보며 뭉근해지는 마음을 다스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사람이 되지 않을 운명이었다.’
그래도 전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것은 레아 린드버그의 페로몬이 그의 코를 가려 주어서일 테지.
서슴없이 얄미운 말을 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다.
“무운을 빈다, 칼 린드버그.”
“걱정 마세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레아의 도닥임에 칼이 웃어 보였다.
“두 사람 모두 조심히 다녀오세요. 성공한다면 다음에 만나는 곳은 헤네켄 제국이겠군요.”
벨프리도 인사를 건넸다.
레아 린드버그를 도울 사람은 이제 따로 있었으니 황태자와 각인 한 오메가 남동생은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헤네켄으로 넘어가 황실 법도를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엘리자벳은 아까부터 칼의 곁에 붙어 킁킁거리며 칼의 냄새를 찾았다.
레아와 벨프리, 마르코와 루루에게 손을 흔들고 고개를 숙인 칼은 엘리자벳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수라 할지라도 여전히 엘리자벳은 그의 사랑스러운 강아지였다.
“다녀올게.”
“끼잉.”
익숙한 냄새를 찾지 못한 엘리자벳은 꼬리를 늘어뜨리고 마르코의 뒤에 숨었다.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별수 없었다.
“나중에 봬요.”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기립한 사용인들이 허리를 숙이고 기사들이 일제히 발을 굴렀다.
밖에서 다시금 두 번의 고동이 울렸다.
칼 린드버그와 아드리안 헤네켄의 출정을 알리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