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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20)화 (120/150)

파르만의 성벽 중 열 겹째 되는 벽을 뚫을 때부터 버번 백작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벌써 40마일은 온 것 같은데.”

부관이 혀를 내두르며 하는 말에 버번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앞에는 또 다른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것 참, 마치 거대한 미로에 들어온 기분이군.”

수 킬로미터에 하나씩, 겹겹이 쌓인 벽 사이 드문드문 있는 엄폐호를 제외하고서는 인간들이 사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생명력이 감지되나 움직이는 것 같진 않습니다.”

마도구를 들고 따라 들어온 다른 기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거대한 무덤 위에 발을 딛고 있는 기분이군.”

심지어 토양도 어쩌면 이렇게 기분이 나쁠까.

땅이 온통 질척질척했다. 성벽의 벽돌이 바싹 말라 있는 것으로 봤을 때 비가 온 것은 아니었다.

제국이 파르만의 첫 번째 벽을 뚫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공기는 건조하기만 했다.

버번 백작은 가슴이 두쿵두쿵 뛰는 소리를 들으며 검 손잡이를 꾹 쥐었다.

“뚫어라. 중심부까지. 그사이에 길을 막는 것은 무엇이든 쓸어버린다는 명령도 유지한다.”

척.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댄 부관이 다시 병사들을 재촉했다.

‘파르만, 이 기분 나쁜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파르만 왕국. 두 세기 전부터 인구수 미상, 가축 수 미상, 왕실 계보도 중앙 귀족의 계보도 모두 베일에 싸여 있는 전대미문의 폐쇄 국가다.

헤네켄 제국의 제도만큼 작은 토지에 두꺼운 성벽을 올리고 하늘에서도 그들을 관찰할 수 없도록 촘촘한 그물망을 덮어씌운 모양으로 지은 것을 보며 그럭저럭 건축이 발달하지 않았나를 짐작만 하고 있다.

처음 성벽을 쌓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주변국들은 그러려니 했었다.

면적이 넓은 데다 영지도 세분화되어 있는 헤네켄 제국에서는 군데군데 망루를 놓고 일부 요지에만 벽을 쌓았으나 일부 소국에서 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벽을 쌓는 일이 비교적 흔했기 때문이었다.

안쪽에서부터 한 줄씩 한 줄씩 쌓여 가던 벽이 두 겹이 되고 세 겹이 될 때 까진 파르만과 여타의 국가를 오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공 이전의 마석이나 공산품을 거래하며 이민자도 적지 않게 받았던 파르만은 영토의 가장자리에 가장 높은 벽을 쌓은 뒤 국경 문을 걸어 잠갔다.

그때 파르만의 국왕은 주변 국가의 어떤 전문에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어쩌다 사절이 방문해도 국왕이나 고위 귀족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맨몸으로 내쫓기기가 일쑤였다.

국경 폐쇄의 초반에는 주변 국가들이 파르만의 의중을 궁금해하며 정복 전쟁을 꾀하려고도 있었다. 하지만 대륙의 중심에 있는 헤네켄 제국이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선뜻 먼저 나서지 못한 채로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다.

사실 움직이지 않아서 불안을 유발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주변국에 피해를 끼치는 일이 없어 덮어놓고 공격에 들어가는 것이 껄끄러웠을 뿐이지만.

“한 번쯤은 이 단단한 껍데길 부숴야겠다 생각했지, 이렇게 또 칼 린드버그 왕자님께 감사할 일이 생겼군.”

한 번에 스물 정도 나란히 입장할 만한 구멍을 뚫기 위해 병사들이 폭파 마법을 거는 동안 버번 백작은 성벽을 맨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손가락 끝에 점도 있는 흙이 묻어 나왔다.

중앙과 가까울수록 오래되었을 테니 보수를 했다 하더라도 마감에 균열이 있을 법도 한데, 굉장히 심혈을 기울인 건지 표면이 매끈했다.

파르만의 모든 기술의 집약체가 바로 이 성벽이 아닌지 버번이 의심할 때 누군가가 백작의 뒤로 와서 그림자처럼 섰다.

“기분이 별로입니다.”

초로의 백작도 풍채가 좋은 편인데 그보다 두세 배는 더 커 보이는 남자가 백작의 시야에 들어왔다.

“별로인 정도가 아니겠지.”

버번 백작의 말에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음성은 지극히 평온했지만 버번 백작은 그의 심기가 불편함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그는 흙이 묻은 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였다.

“어떠하냐. 냄새가 나는가.”

백작이 들어 올린 손가락 끝에 코를 가져다 댄 남자는 여전히 미간 한번 구기지 않고 자세를 바로 했다.

장시간의 이동과 더불어 성벽을 뚫기까지 하니 허리가 굽을 만한데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 때문에 더 위압적으로 보였다.

“구역질이 납니다. 파란과 타락의 냄새입니다.”

과연 여신의 개답다.

버번 백작이 작게 웃었다.

하나같이 인간다운 구석이 없는 성기사들 중에서도 특별히 인간 같지 않은 성기사 듀벨은 연신 코를 킁킁거리며 “악마의 냄새다.”라고 중얼거렸다.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일수록 악마나 귀신의 존재를 믿는다 했던가.

“웬 악마 노래냐. 저 안에 있는 것은 인간인데.”

“신도 인간의 형상이니 악마도 그러할 것이라 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여신의 축복을 벗어나 악의 길로 완전히 간 이는 이미 악마이고, 저는 그런 그를 여신의 품으로 돌려보내 줘야 할 의무가 있지요.”

그래라.

참, 내 편일 때나 든든한 여신 바보들.

평소에는 입이 무거워 탈인 성기사들은 신앙에 관하여는 유난히 말이 많아진다.

세 번째 발파음이 들리고 뚫린 구멍을 보던 부관이 백작에게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뻔하지 뭐, 벽이 또 있는 모양이었다.

“진군해라.”

버번 백작이 손짓을 하자 병사들이 일제히 말에 올라타거나, 혹은 걸어서 다시 다음 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백작도 훌쩍 말 위에 올랐다.

“이렇게 요란한데도 파르만이 가만히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듀벨 경.”

“저는 그런 것 모릅니다. 이유 불문, 악의 축을 제거하는 데 누군가 방해를 한다면 그 또한 그 속에 있는 악마의 소행이니 고통 없이 단칼에 하늘로 올려 보낼 것입니다.”

버번은 이마를 살짝 짚었다가 말 엉덩이를 때려 다음 성벽으로 움직였다.

듀벨은 말에 타는 대신 가볍게 뜀뛰기를 하듯 뛰었다. 발 구름 몇 번으로도 금방 백작의 말 뒤꽁무니에 따라붙은 듀벨의 눈에는 약간의 흥분이 서려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방금 전에 기분이 나쁘다 말씀드렸습니다만.”

백작이 저도 모르게 흘린 중얼거림에 달리던 듀벨이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크고 시커먼 남자가 갑주 차림으로 그러니 하나도 귀엽지 않았다. 게다가 백작과 나란히 달리면서 숨 한 번을 몰아쉬지 않는다니. 이 정도면 괴물이 따로 없겠다 싶다.

“네가 스스로 이 기분 나쁨의 원인을 제거한다 생각하니 꼬리가 저절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 같은데. 그것은 내 착각인가.”

“아아, 그런 뜻이라면.”

착각이 아니라며 듀벨이 환하게 웃었다.

이 꼴 저 꼴 다 보며 나이 먹은 버번 백작도 이번엔 소름이 돋았다.

“듀벨 경, 다른 사람은 몰라도 키치너와 파르만의 국왕 두 사람은 자네가 처단하지 말아 주게. 황제 폐하의 유일한 당부야.”

듀벨은 대답하지 않고 앞서 달려 나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발자국이 푹푹 패었다.

한숨을 쉰 백작도 앞을 보며 달렸다.

그나저나 이제 성이 보일 때도 되었건만.

수상한 점이 너무나 많아 이제는 수상하다는 느낌 자체에 둔감해지는 기분이었다.

버번은 말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성벽을 발파한 뒤 잔해를 거두고 위쪽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마감하는 것까지 완벽히 마친 터라 마치 새로운 입구를 만든 것처럼 일직선으로 길이 쭉 뚫려 있었다.

칼 린드버그 왕자와 아드리안 헤네켄 황태자의 길로, 공들여 닦았다.

헤네켄의 병력은 분산하여 성벽 안에 3분의 1, 중간 지점에 3분의 1, 그리고 성 밖에 나머지 3분의 1이 대기 중이다.

특별한 조치나 계획 없이 벽을 뚫고 들어가는 황제의 계획은 옳았던 것 같았다.

“죽은 자들이 무슨 꿍꿍이를 쥐고 있던 우리가 미리 알아내긴 어려웠겠지.”

아마도 이곳은 거대한 무덤, 그리고 인정하긴 싫다만 듀벨의 말처럼 성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악마일지도.

백작은 쓰게 웃었다.

구원할 백성이 없다면 토벌은 쉬워진다. 다만 이 아수라장을 볼 젊은이들의 충격이 걱정이지만.

버번 백작이 말 옆구리를 차고 고삐를 틀어쥐었다.

* * *

저놈은 미쳤어. 아주 단단히.

키치너는 몇 개 안 되는 보석을 챙겼다.

밖에서 일정한 속도로 발파음이 들리고 있다.

그러나 성안의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고 있으며 무지차 파르만은 뭐가 즐거운지 만면에 웃음이었다.

그는 웬일로 옷을 갖춰 입고 대전에 마련된 자신의 왕좌에 앉아 발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다는데, 적이 코앞에 왔는데 저런 여유라니, 저러는 이유가 따로 있는지 심히 궁금했지만 키치너는 국왕과 말을 섞을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이제 내 알 바가 아니지.”

키치너는 밖으로 나가 헤네켄에 투항을 하든 아니면 다른 나라로 망명을 하든 이 답답하고 어두운 성을 떠나기를 택했다.

성안의 사용인들이 공포에 떨었으나 그중 수군거리는 자들이 왕이 기르는 마수에 갈가리 찢겨 죽은 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그 때문에 남은 이들은 숨도 죽이고 발소리도 죽여 가며 평안을 가장하고 있었다.

키치너가 회랑을 지나 정문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 나갈 때 사람들은 그를 못 본 척하며 길을 터 주었다.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키치너는 작게 웃었다. 이대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과거의 영광을 찾는 것도 살아야 가능할 터. 무지차 파르만에게 키치너의 존재가 하등 쓸모없다는 것을 눈치챈 뒤에, 꾸준히 도피 생각을 하곤 있었지만 갈 곳이 없어 머뭇거리던 차였다.

하지만 헤네켄 제국이 움직였다.

그것은 키치너에게 또 다른 기회로 보였다. 그것도 아주 크고 화려한 기회였다.

다른 때라면 턱도 없을 소리였지만 전시에는 많은 것이 바뀐다.

파르만 국왕의 정보를 빌미로 투항을 한다고 하면 목숨은 살려 줄지도 몰랐다.

아니면 의외로 작위를 내린다거나.

제국의 황제는 물렀고 쓸데없이 정의로웠다.

원한다면 줄줄이 첩을 끼고 자식을 불릴 수 있었으면서 황후의 치마폭에 감싸여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런 그를 주무르는 건, 어쩌면. 린드버그의 국왕보다 쉬울지도.

키치너는 확신에 가까워지는 상상에 흐뭇하게 웃었다.

칼 린드버그처럼 상급의 오메가를 찾기는 힘들겠지만 뭐, 열성 오메가 정도는 그럭저럭 붙어먹을 만하니까.

코앞에 바깥이 있었다.

그 앞이 벽으로 가로막혀 있어도 통로는 반드시 존재할 테니.

볕을 제대로 쬐지 못한 몸뚱이가 삐거덕거렸다.

그때 무지차 파르만은 키치너가 성벽으로 향하는 것을 내려다보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어차피 다 그의 손안에 들어오게 될 텐데.

무지차가 자신의 배를 더듬었다. 타들어 가는 여름의 태양처럼 선명한 붉은빛의 마정석이 손끝에 걸렸다.

선대의, 또 그 선대의, 선대가 바랐던 것을 이루어 내는 것은 무지차 파르만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어.”

멀찍이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먼지가 솟아오르자 시녀 하나가 들고 있던 화병을 떨구었다. 새하얀 장미가 고개를 꺾었다.

“이런, 내 신부에게 줄 꽃이 엉망이 되고 말았군.”

파르만이 눈을 치켜떴다.

시녀가 오들오들 떨면서 자비를 구했지만 파르만은 그의 발치에서 웅크리고 있던 마수의 목덜미를 더듬었고, 이내 시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흰 장미가 어울릴 것 같아 준비했는데. 붉은색도 어울리려나.”

피에 전 장미를 들어 올린 무지차는 퍽 안타깝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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