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린드버그는 마치 거대한 동굴인 양 아치형 터널을 따라 쭉 펼쳐진 길을 보고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나라라고?”
뒤늦게 말에서 내린 아드리안 헤네켄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수십 개의 성벽을 연달아 쌓았다더니.”
이 정도로 뚫어 놨으면 우왕좌왕 혼란스러운 파르만의 국민들이나 병사들이 제국군과 한창 칼부림을 하고 있지나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간 것치고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왕국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패트론 공국의 변경 수비대와 제국의 군대가 함께 머무르고 있는 평지가 오히려 활기찰 정도였다.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간 버번 백작을 대신해 변경 지휘책을 맡고 있는 상그리아 자작은 “다 죽어 없어졌다 보기도 어려운 것이 묘비석 하나 없다고 보고 받았다.”며 석연치 않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전부 증발이라도 한 것 같습니다. 가축의 오물이나 털 한 오라기도 보이지 않아요.”
“말도 안 되지. 사람 하나 없이 어떻게 왕국을 유지합니까?”
드물긴 해도 공문서를 전할 때 파르만 왕국의 성벽에서 서신을 전달받는 역할을 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대체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텅 빈 왕국을 옆에 끼고 살았다는 말이 된다. 패트론 공국의 변경 수비대 대장이 오소소 소름이 돋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파르만 왕국은 지하 도시를 건설했을 걸로 추정되니 인간을 찾으려면 바닥을 파는 것이 나을 거야.”
주변을 살피는 칼 린드버그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아드리안이 말했다.
그의 몸이 아까부터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는 벽을 쓰다듬거나 귀를 대 보고 성벽 안쪽을 기웃거리며 안개가 자욱이 깔린 폐쇄된 도로를 비추는 것으로 시작하는 공포 영화를 떠올렸다.
달갑지 않은 조용함이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 저를 떨궈 놓은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크기의 나라에 거주하는 사람이 전부 땅속에서 살 수 있나? 알면 알수록 섬뜩해.”
땅속에서 나름대로 적응하여 살고 있다고 하면 차라리 다행이다.
발에 스치는 것이, 손에 닿는 것이, 전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는 이루어지기 힘든 것들뿐이었다.
나라 전체를 하나의 방공호처럼 만들어 놓는 데에 기여했을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일단 두 분이 오시면 바로 안쪽으로 모시라고 명을 하달받았습니다.”
어딘가 익숙한 외모의 젊은 기사가 새 말 두 필을 끌고 다가왔다.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말들은 당분간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다른 기사들이 진작 데리고 갔다.
칼 린드버그는 그를 유심히 살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선명한 보랏빛 머리와 눈 색. 전시에 주로 입을 법한 얇은 은제 갑옷 너머로 확연히 드러나는 근육질의 몸과 상반되게도 미묘한 색기가 어린 얼굴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잘생김과 예쁨에는 경계가 없다더니, 딱 이런 사람을 보며 하는 말이겠지. 그나저나 누굴 닮았는데.’
칼 린드버그가 그를 보며 연신 오, 소리를 내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아드리안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눈 돌리지 마.”
“그냥 본 건데…….”
칼이 고개를 요리조리 움직이며 아드리안 너머의 그 사람을 자세히 보려는 것을 솜씨 좋게 막은 아드리안은 애꿎은 기사에게 눈을 부라렸다.
별걸 다 질투한다 하면서도 흐뭇한 마음에 비죽 웃음이 나와서 칼 린드버그가 입꼬리를 올리니 아드리안이 눈썹을 꿈틀꿈틀한다.
헨드릭 공작가의 장자이자 황실 제1 기사단의 단장으로, 전쟁과는 별개로 황태자를 보필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주니퍼 헨드릭은 꼬마 시절부터 보살펴 온 주군의 속 좁은 행태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렇게 경계하시면 제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짝을 믿지 못하는 알파는 영 멋있지 않다고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각인까지 하셨으면서.
마지막 부분은 칼과 아드리안 두 사람에게 들릴 정도로만 작게 소근거린 주니퍼가 얼굴을 붉히는 두 사람을 보며 ‘참 좋을 때다’ 하고 생각했다.
“믿지 못하는 건 칼이 아니라 그대입니다. 주니퍼 헨드릭 공자.”
쓸데없이 잘생겨서는, 쯧.
아드리안이 툴툴거렸고 칼은 그제야 그가 벨프리의 형임을 눈치챘다.
“아! 혹시.”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의 팔을 붙들어 뒤로 보내고 성큼 앞으로 나왔다.
감히 제 앞에서 다른 남자를 향해 다가간 것에 충격을 받은 듯 가만히 그 자리에 선 아드리안을 힐끔거린 칼이 아드리안의 손을 붙잡아 손가락을 얽었다.
체온이 높은 손바닥이 부딪히며 열을 전달한다.
부드러운 손가락의 감촉에 아드리안의 마음이 녹았는지 손이 얼얼할 만큼 힘주어 잡아 온다.
칼 린드버그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질투가 많은 연인은 사랑스러웠지만, 임신 후 방에만 반강제로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는 황후를 생각하니 왠지 입이 바싹 말랐다.
판타지 소설에 들어와 올린 스탯이 남주인공 마음 풀어 주는 데에만 쓰이는 것 같아 민망하면서도 저 뿌듯해하는 얼굴을 보면 자연스럽게 또 이렇게 되고 만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잘난 쪽은 아드리안인데 왜 자신의 주변을 경계하는 것도 아드리안인지 칼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 짝에게 그렇게까지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는 사실은 기분이 좋기 때문에 내버려 두기로 했다.
세상 모든 사람을 제 시선에서 치우려고 하지만 않으면 뭐.
“동생이 신세 많이 지고 있습니다. 왕자님.”
주니퍼 헨드릭이 한쪽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칼 린드버그도 덩달아 허리를 굽혔다.
“신세는 제가 지고 있습니다.”
벨프리는 아는 것도 많고 똑 부러져서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받게 되는 편이었다.
물론 최근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살짝 멀어지긴 했다만. 그것도 헤네켄 제국으로 돌아가고 나면 아드리안 다음으로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칼 린드버그는 벨프리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약혼식 때는 황실 경비 일로 바빠 따로 인사를 못 드렸지요.”
“그랬나요?”
“네, 대신 둘째는 만나 보셨을 겁니다. 제드 헨드릭이라고 황실 의원이면서 동시에 기사 서임도 한 재원입니다.”
그러고 보니 벨프리의 둘째 형과 인사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주니퍼에 비해 흐릿한 인상이었지만 그때도 “형제가 나란히 미인이로군.” 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칼 린드버그가 혼자 생각에 빠져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억납니다. 그분도 훈훈한 얼굴이셨던 듯한데 공작가는 전부 미남들만 모였군요. 거기다 똑똑하기까지. 와, 그러기도 쉽지 않은데.”
당장 전우영, 전재영 남매도 똑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우영은 흔한 얼굴이었고 재영은 제법 미인이었다. 우영은 노력과 성실만이 답인 범인이었고 재영은 타고나기를 똑똑이로 타고났다.
하기야 그 공작과 그 대공 사이니.
황제 부처도 그렇고 다들 어려 보이는 열매라도 먹은 건지 50대 중후반의 중년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멋진 분들이다.
자칫하면 아드리안 헤네켄은 팽팽한데 칼 린드버그만 세월의 풍파를 정통으로 받을지도 모르니 관리에 힘써야겠다.
어쩐지 부러운 마음이 왈칵 올라와 칼 린드버그의 눈에 선망이 가득 담겼다.
주니퍼는 “칭찬 감사합니다.” 하고 웃으며 슬쩍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순수한 감탄이었다만, 그것도 꼴 보기 싫은 아드리안이 뚜둑 소리가 날 정도로 손가락에 힘을 줬다.
“칼 린드버그 왕자.”
아드리안은 웃는 얼굴이었으나 잇새로 식식 소리를 무의식적으로 냈다.
칼 린드버그는 우물쭈물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흠흠. 공작가의 자제분들이 전부 재원에 미남이지만, 제게는 더 멋진 배우자가 있습니다. 하하하.”
그냥 멋질 뿐이겠나. 외모 원톱, 지위 원톱의 황태자이다.
입 밖으로 구태여 낼 필요가 없는 소리지만 칼 린드버그의 필사적인 노력에 주니퍼가 장단을 맞추었다.
“아무렴요. 말하자면 입이 아플 지경이죠. 전하와 비교해 봐야 저희는 삶은 문어 대가리일 뿐입니다.”
아니, 대장이 문어 대가리면 우린 뭐야?
병사들이 대장의 ‘삶은 문어 대가리’ 발언에 눈을 치켜뜨고 그를 쏘아봤지만 칼 린드버그는 봤지? 봤지? 하며 아드리안에게 손에 힘을 빼라고 소곤거렸다.
눈에 빤히 보이는 작당이었지만 아드리안은 그쯤에서 넘어갔다.
실없는 농이 오가는 동안 칼 린드버그의 긴장이 풀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찰나의 순간 아드리안과 눈이 마주친 주니퍼가 아하, 하고 살포시 웃어 보였다.
제국 최고 팔불출은 제 아비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것도 저 황태자가 가져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칼 린드버그의 페로몬은 이제 알 길 없지만 황태자의 잔잔히 기분 좋아 보이는 페로몬은 짐승들을 흥분시켰다.
주니퍼는 푸르릉, 푸르릉 신이 난 두 말을 진정시키고 두 사람을 채근했다.
“두 분은 제가 직접 모시려고 합니다. 쉼 없이 달리면 서너 시간 안에는 이동 중인 버번 백작과 마주치겠지요. 그 외에도 거점마다 제국군이 진 치고 있으니 안전할 겁니다.”
칼 린드버그는 이제 누구의 도움 없이도 익숙하게 말에 올랐다.
“안쪽은 그저 진군할 뿐입니까? 정말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절박한 칼의 물음에 주니퍼가 머리를 긁적였다.
“예, 전혀, 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파르만의 국왕은 제 성에 틀어박혀 아예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살아 있는 이가 하나라도 있다면 구하고 싶었다.
파르만의 국왕이 하는 짓은 린드버그 왕국의 폭정과는 차원이 다른 정도였다.
마법이 고차원으로 발달했다지만 여전히 많은 것들이 중세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이 세상에서 이렇게 겹겹이 많은 성벽을 쌓기까지, 혹은 그렇게 많은 지하 소굴을 건설하기까지 인력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국왕이, 뭐가 어찌 될 줄 알고 가만히 있나.
저 왕좌에 앉아 있는 게 살아 있는 인간은 맞을까. 사실은 귀신을 상대하러 가는 거라고 해도 믿을 수 있겠다.
칼 린드버그의 이가 굳게 다물렸다가 이내 벌어졌다.
“새끼가 제대로 미쳤네.”
칼 린드버그의 중얼거림에 아드리안과 주니퍼가 동시에 찌를 것처럼 그를 주시했다.
“아니, 이게 제정신이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잖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욕설 비슷한 걸 하게 된 칼이 어깨를 으쓱했다.
“국왕이 아무리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도 다른 나라가 쳐들어온다고 하면 적어도 국토는 지키려고 나설 텐데, 그런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변명하는 칼에게 주니퍼가 동조했고 아드리안은 먼저 말에 오른 뒤 출발하며 덧붙였다.
“아니면 아주 자신 있는 모양이야, 자기가 사용하는 술식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그것이 정답 쪽에 가깝겠군요.”
주니퍼의 대꾸에 칼 린드버그가 묵직한 마도구를 움켜쥐었다.
칼은 제국군 진영을 뒤로 하고 파르만 왕국 안으로 진입하며 ‘그 오만한 계획이 얼마나 잘난 것이던 다 망쳐 주겠어.’ 하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