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목욕을 마친 무지차의 욕조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시중드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홀로 몸을 닦으며 흥얼거리는 무지차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마치 파티를 앞둔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이기도 하고 발로 왈츠의 스텝을 밟기도 했다.
이제 귀가 따가울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펑펑 터지는 발파음을 효과음 삼아 곳곳에 나뒹구는 시신들을 발로 차 갱도에 밀어 넣었다.
“주인님, 제국군이, 마지막, 성벽에.”
“칼 린드버그는 어디쯤 있지?”
“가까이. 열, 세 번째, 성벽 안쪽에.”
지점토처럼 희고 윤기 없는 피부에 처음으로 홍조가 어렸다.
“가 봐.”
들어올 때 두 발로 걸었던 생물이 기괴한 몸짓으로 몸을 웅크리고 네발로 기어 나갔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들어 낸 무지차의 최고 걸작이었다.
마수를 완벽하게 길들이기 위해 평생을 바친 선친들은 다 자신들이 길들인 마수의 손에 생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어서 홀로 자라는 파르만 왕가의 후계들은 죽음의 위협 없이 컸다.
무지차는 어릴 때부터 어둠이 지겨웠다.
사람이 그리웠다.
“아, 나와 대등한 사람. 벌레처럼 천박한 것들 말고.”
천민, 평민. 무지차의 생각에 형질자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다 천박했다.
주무른다고 주물러지고, 가끔 튀어 올라서 귀찮게 하고. 평범한 인간은 번거롭기만 했다.
그런 면에서 칼 린드버그는 완벽한 짝이었다.
제국이 탐낼 정도의 우성 오메가에다가 그 피도 순수한 왕족의 것.
더 이상의 방해물은 없다. 술식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완전한 무지차의 세상이다.
인간이 하던 모든 노동은 마물이 대신하고 대륙을 호령하는 여타의 왕족들은 다 무지차의 발아래 무릎 꿇리고 나면 제국을 먹어 치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게 되겠지.
그때 무지차의 아이를 칼 린드버그가 낳아 준다면 파르만 왕국은, 아니 제국은 더없이 번성할 것이다.
그가 원한 것은 평범한 권력이 아니다.
울라고 명하면 울고 멈추라고 명하면 그치는 완전무결한 지배였다.
무지차는 수치도 모르고 알몸으로 그의 연회실을 배회하고 나서야 한 겹씩 옷을 걸쳐 입었다.
형형색색의 마정석을 꿰어 장식한 검은 정복은 화려했다. 연회를 즐기기에 이만한 복식이 없을 것이다.
그 옆에 얼룩덜룩 붉은 빛을 머금은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콰르릉.
마지막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제국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사방을 경계하며 들어왔다가 무지차의 성을 올려다보았다.
“지옥의 문을 열어라.”
무지차의 명령이 텅 빈 연회실을 울리며 저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바닥이 웅웅 진동했다.
성벽 근처의 바닥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균열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수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수십만이다.
인간이 사라진 자리를 꿰차고 있던 파르만의 새로운 백성들이었다.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피와 살점이 튀었다.
기껏 무장을 하고 쳐들어왔지만 며칠을 전투 없이 이동하여 안일해질 만도 한데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칼을 빼 들었다.
특히 흰 갑옷을 입은 거구의 사내들은 마수들을 단칼에 제압하며 무지차가 있는 곳을 향해 살기를 뿜어 댔다.
과연 제국군.
하지만 얼마나 버틸 것인가. 인간과 마물. 기본적으로 타고 나는 힘에도 마력에도 현저한 차이를 보이니 금방 지칠 것이다.
무지차는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즐겁다. 즐거워.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설레었던 적이 있었을까.
무지차는 발을 쾅쾅 구르며 즐거워했다.
몸을 구르며 웃던 무지차는 다시 명령했다.
“금발의 파란 눈, 칼 린드버그 왕자는 사지 멀쩡한 상태로 내게 데려와.”
파르만의 후계를 낳아 줄 귀한 몸.
어쩌면 그의 외로움을 채워 줄 마지막 인간일지 모르니.
* * *
뿌우우.
익숙한 고동 소리에 칼 린드버그와 아드리안 헤네켄이 멈춰 섰다.
“마침내 전투가 일어났군요.”
“더 서둘러야 하는 것 아닙니까?”
“괜찮습니다. 급하면 별도로 연락을 취할 겁니다. 지금까지 조용했던 게 이상하니까 저는 오히려 한시름 놓았습니다.”
눈이 화등잔이 된 칼 린드버그에 비해 아드리안 헤네켄도 그렇고 주니퍼도 덤덤했다.
주니퍼는 잠시 말에게 물을 먹이자며 아예 말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했다. 칼 린드버그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미리 지원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괜찮아. 지원 병력을 요청하는 신호는 따로 있으니 필요하면 그렇게 할 거야.”
특히 버번 백작이 지니고 있는 마도구는 불시의 습격에 대비해 황실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더 괜찮다.
아드리안의 설명을 들은 칼 린드버그가 “평소에 그런 걸 쓰면 좋을 텐데.” 하고 말하자 아드리안은 “마력이 계속 소모된다는 뜻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쓸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마력은 마법사에겐 생명력이나 마찬가지야. 괜히 우성과 열성을 나누는 게 아니니까. 직접 마법을 사용하는 대신 마정석을 이용하는 방법이 대두된 것도 그 때문이고.”
“아!”
이런 중요한 것을 왜 이제 알았냐고 머리를 두드리려다가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대충 듣고 흘러 넘겼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드리안이 레아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면 이 소설 속에서 자신의 할 일은 전부 끝난다고 생각했던 그때.
얼마나 많은 것들을 그냥 넘겼는지. 이제 와서 그 시절이 그리웠다. 누가 날 다시 초반으로 떨어뜨려 준다면 더 잘 대응할 자신이 있었는데, 하며 칼 린드버그가 이마를 짚었다.
아드리안이 걱정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를 향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이번 일이 끝나면 마법이나 형질에 대해 좀 더 심도 있는 공부를 하리라 다짐했다.
어쨌든 그것 때문에 더 마음이 급해진 칼 린드버그가 먼저 말 위로 올라갔다.
“버번 백작이 지칠까 두렵습니다. 조금 더 서두르죠.”
애초에 말에서 내린 적 없는 아드리안을 제외한 두 사람이 안장 위에 자리를 잡았다.
“버번 백작은 황제 폐하만큼은 아니지만 마력이 대단한 자입니다. 그 춤을 추는 것처럼 움직이는 칼 솜씨는 덤이고요.”
괜히 백전노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니퍼의 말에도 칼 린드버그의 불안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버번 백작이 안전하다 해도 병사들은 어떨까요. 불가피한 희생이란 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최선을 다해도 어쩔 수 없을 때나 쓰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자의 대답에 주니퍼는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가 다시 고삐를 흔들었다.
말을 가까이해 먼저 아드리안에게 무언의 허락을 구한 주니퍼는 칼에게 사담을 걸었다.
“왕자님은 생명에 경중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모든 생명에겐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살아 있음에는 그 나름의 역할과 가치가 있다고 배웠거든요.”
다그닥거리는 말의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주니퍼가 린드버그 왕실에서 그런 고차원의 교육을 했던가 궁금해하는 사이에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그걸 알든 모르든 두 사람의 사이가 변할 일은 없겠지만, 어쩌다가 저런 성격이 된 건지는 정말 궁금했다.
일찍 돌아가셨다는 부모님과 죽은 여동생의 이야기까지 포함해서 세세히 알고 함께 문제를 끌어안고 싶다는 욕구가 불쑥 치솟았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왕자님.”
“제가 대답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충분히 대답할 수 있으실 겁니다.”
일전에 했던 ‘다정한 무리’에 관한 발언은 귀족 사회에 작은 파장을 몰고 올 정도였으니까. 주니퍼는 일거수일투족이 아름답다는 왕자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 역할과 가치가 말입니다. 모두 동등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구분하는 왕자님만의 방법이 있습니까? 왕자님께서 단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공익에 이바지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혹은 개인적으로 아끼시는 사람입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칼 린드버그의 말문이 막혔다.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가 받기로 한 질문이고 그가 충분히 대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가만히 듣고만 있었지만, 칼은 제 코를 더듬는 엉뚱한 행동을 했다.
“으음, 답변을 잠시 미룰 수 있게 해 주세요.”
“언제든 좋습니다. 검을 잡는 사람이라, 모든 분들게 비슷한 조언을 구하던 참이었거든요.”
이런 곳에서 왕자님께 질문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주니퍼는 빙긋 웃으며 두 사람의 말과 살짝거리를 벌렸다.
한편 칼 린드버그가 코를 더듬었던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당초에 그렇게까지 철학적이고 똑똑한 인간도 아닌데, 여기 오고 나서 괜히 대단한 인간인 것처럼 추켜세워지니 저도 모르게 콧대가 높아지진 않았는지 염려하는 무의식의 행동이었다.
조금씩 빨라지는 두 사람의 말과 보폭을 맞추면서 칼은 생각했다.
어떻게 대답을 해 줘야 적당히 주니퍼가 걸러 들을 수 있을 건지.
그렇게 세 사람은 입을 다물고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다음 성벽을 향해 힘차게 달렸다.
선발대가 며칠에 걸려 간 거리를 단 몇 시간 만에 돌파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드문드문 깔려 있는 마법진.
여신이 직접 설치했다는 그 마법의 문을 본떠 만든 이동 마법으로 아드리안 일행은 마지막 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저 진만 넘으면 금방 파르만의 왕성을 볼 수 있을 거고 덤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겠지.
계속 형체 없는 공기나 시스템과 다투는 기분이었는데 적어도 정체가 명확하다고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칼 린드버그와 아드리안을 멀리서 알아본 병사들이 이쪽으로 달려 나왔다.
병사들이 당도하기 직전 칼 린드버그는 주니퍼에게 다가갔다.
“오, 벌써 답변을 주시려는 겁니까?”
예상보다 빠르다고 주니퍼가 감탄했다.
칼 린드버그는 입술에 괜히 침을 발랐다.
“가치나 효용은 시대에 따라 일정 바뀌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절대 가치라는 것은 있는 것 같아요.”
“어떤 것이 그렇습니까?”
“때 묻지 않은 모든 것이요. 이를테면 아기의 웃음과 울음 같은 것이지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꿍꿍이가 없잖습니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귀여운 동물들도 그렇고요. 가끔 자신을 위해 이기적인 행동을 하지만 주로 선량한 보통의 인간이 그렇습니다.”
‘보통의 인간’ 주니퍼는 이상하게 그 단어가 귀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은 반드시 살아야 하고요.”
“반대로 말하자면, 그렇지 못한 것들은 죽어도 싸다는 말씀이신가요?”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또 의외로군. 주니퍼가 제 턱을 쓰다듬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거나, 생명의 지장이 없더라도 나쁜 짓을 반복하며 살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줄 모르는 인간이 해당됩니다.”
“그렇군요.”
의외로 비장한 표정은 칼의 얼굴과 잘 어울렸다.
“마지막 질문에 답변을 드리자면,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겁니다.”
“공익은 어쩌고요?”
주니퍼의 질문에 칼 린드버그는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이 칼에게 대뜸 손을 내밀었고 칼은 그 손을 순순히 잡았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다행히 공익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 외의 인간을 염두에 두질 못해서요.”
칼 린드버그가 활짝 웃었다.
끄응, 괜한 질문을 해서 염장질에 박차를 가한 주니퍼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