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퍼가 닭살이 돋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황태자와 왕자, 둘만의 시간이 더 깊어지기 전에 그들의 등을 떠밀어 이동 마법진에 태웠을 무렵, 아수라장의 가운데서 성기사 듀벨은 쥐새끼 한 마리를 발견했다.
“늙고 추한 데다 염치까지 없다는 브루스트 키치너.”
듀벨의 고저 없는 음성에 키치너는 반박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보자마자 알겠군. 네게서도 시궁창 냄새가 난다.”
어렵지 않게 늙은이를 들어 올린 듀벨이 마치 물건을 감정하듯 이리저리 살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키치너가 “이런 무례한 자를 보았나!” 하고 일갈했지만 듀벨이 한 일은 오히려 제 코를 틀어쥐는 일이었다.
표정이며 행동이 전부 더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어 키치너는 수치심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것 놓으시오.”
“쉬이, 가만히 있어라.”
버둥거리는 키치너의 뺨을 가볍게 때린 듀벨은 제 손을 탈탈 털었다.
무지차왕이야 원래 미친놈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이 위아래도 모르는 기사 나부랭이에게 뺨을 얻어맞은 키치너는 충격에 휩싸였다.
저벅저벅 걸어 후방으로 자리를 옮기며 그사이 달려드는 마수 두어 마리를 단칼에 베어 넘긴 듀벨이 근처에 있는 다른 성기사에게 뭐라 뭐라 명령을 하달했고, 키치너는 오래 지나지 않아 작은 가축을 가둘 때 쓰는 작은 짐수레에 묶여 실렸다.
세로로 길고 위로는 짧은 게 꼭 시신을 옮기는 수레처럼 보여 공포를 느낀 키치너가 돌아서는 듀벨을 불러 세웠다.
“이봐! 헤네켄 제국의 기사여! 내 얘기를 듣게!”
그가 멈출 기미가 없어 초조해진 키치너가 언성을 높였다.
“내 얘기를 들으라고! 파르만의 왕이 뭘 꾸미고 있는지 이곳에서 나만큼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네!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헤네켄 제국에서 되레 내게 상을 내릴 거라고!”
솔직히 말해서 개소리였다.
키치너가 아는 것은 무지차 파르만의 꿍꿍이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라, 그도 그가 오래 공을 들여 마수를 길들이고 땅을 헤집었다는 것밖에 몰랐다.
하지만 협상은 하기 나름이 아니던가.
이 중에 파르만 왕국에 들어와 시간을 보낸 사람이 키치너 외의 누가 또 있냐는 말이다.
귀가 따갑도록 소리를 질러 대는 통에 듀벨이 다시 뒤돌아 키치너에게 다가왔다.
“파르만의 왕이 마수를 길들이고 있다고! 그 수준이……!”
신나서 떠드는 키치너는 듀벨의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듀벨은 이 늙은이가 성가시고 하찮았다.
끈도 다 떨어진 신세. 왜 살려 둬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사제의 명만 아니었다면.
지금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마수들만 봐도 쉬이 눈치채겠다. 저들이 명령을 받고 있다는 걸 누가 모르겠나. 멍청한 인간 같으니라고.
주변의 성기사들이 전부 한마음 한뜻으로 키치너를 노려보았다.
듀벨은 힐끗 그를 내려다보고는 주문을 외웠다.
성기사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성력이 키치너의 주둥아리를 옭아맸다.
“으읍!”
몸은 진작 구속되었고 입까지 막히자 키치너가 허리를 펄떡거리며 눈을 뒤집어 깠다.
평생 내키는 대로 살아온 몸이라, 별것 아닌 구속에도 답답함이 배가 되었던 탓이다.
듀벨이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불쌍한 인간. 너를 당장 여신의 심판대로 보내야 하나, 네게 볼일이 있는 분이 따로 계셔서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미루는 내 심정을 네가 알까.”
성호를 긋고 듀벨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이후 마수들은 숨 돌릴 틈 없이 몰아쳤고 병사들도 다소 희생되었다.
얼굴에 피가 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성기사들이 눈만 나온 갑주를 입은 데 반해 무게를 최소화하는 얇은 갑주에 머리 보호구 하나만 찬 병사들은 이미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화약을 사용한 터라 매캐한 냄새와 함께 주변이 뿌옇게 물들었다.
“민간인들이 없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군.”
수라장 안에서 잠시 숨을 돌리던 어떤 병사가 말했다.
훈련이 잘된 병사들조차 무아지경으로 검을 흔들다 보면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분간하기 힘겨울 정도의 환경이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전투가 시작된 이후 1군과 2군은 번갈아 가며 진영을 바꾸었다.
한쪽이 부상병을 솎아 내고 치료하며 휴식을 취하는 동안 다른 한쪽이 또 전투에 임한다.
마수의 대가리를 짓밟고 허공에 피를 뿌리며 버번 백작의 곁으로 다가간 듀벨은 마치 춤을 추듯 유려한 그의 검날에 잠시 넋을 잃었다.
여기가 전장의 한복판인지 연회장인지 알 수 없는 몸놀림이었다.
‘나이가 무색하다.’라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 있는 거겠지. 경건하고 자비 없는 그의 칼춤에 어째서 버번 백작이 성기사가 아니라 일반 기사로 남기를 자처했을까 안타까울 뿐이었다.
듀벨이 다가옴을 눈치챈 버번 백작이 후미로 살짝 물러섰다.
부관이 가까이 와 그에게 물을 건네고 깨끗한 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었다.
사소해 보여도 전시에는 꼭 필요한 루틴으로 혹시나 생겼을지 모를 상처를 초기에 발견하여 감염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백작은 가까이 다가온 듀벨을 유심히 살피며 말을 걸었다.
“움직임에 패턴이 없어, 마구잡이로 인간이면 다 죽이라고 명 받은 것 같아.”
그렇게 말한 백작은 돌연 솟아난 마수의 앞으로 듀벨을 턱 밀었다. 동시에 재빠른 손놀림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보호구를 제거했다.
마수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한 걸음 물러났다가 손인지 발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것을 뻗어 듀벨의 팔을 움켜쥐려고 했다.
듀벨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처리하고 백작을 향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백작은 빙그레 웃었다.
“다만 특정 인물은 살려서 데리고 오라고 한 모양이야.”
듀벨의 샛노랑에 가까운 금발과 파란 테두리를 가진 홍채를 보며 백작이 말했다.
“아마도 금발에, 파란 눈.”
부상자 중에 금발의 파란 눈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상기한 듀벨은 그가 아는 범위 내의 가장 유명한 금발 벽안의 사내를 떠올렸다.
“……이 시기에, 여기에서 살려 데리고 갈 만한 건 역시 그 왕자뿐이군요.”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왜?
듀벨의 궁금증을 눈치챈 백작은 “무지차 파르만도 알파야. 왕자는 알파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우성의 오메가이고.”라고 대답했다.
그래도 듀벨은 뭐 하러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왕자를 성적으로 유린하고 싶어 하는 겁니까?”
듀벨은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제 짝으로 삼고 싶은 거겠지.”
백작이 짧게 혀를 차자 듀벨이 검을 탈탈 털었다.
“왕자는 이미 황태자의 짝이 아닙니까?”
의외로 상식적인 말을 하는 그를 향해 백작이 키득키득 웃었다.
“일단 둘이 짝을 맺었다는 것은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고 무지차 파르만은 몰라. 곧 알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관계를 맺고 임신을 요구하는 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 주의해야지.”
듀벨은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겼다.
“억지로 결합을 원하는 것이 유린이지요. 오오, 하나부터 열까지 역겹군.”
성호를 긋는 듀벨에게 백작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슬프게도 인간사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네.”
듀벨이 양손을 모았다.
“이런 아수라장을 만들고 고작 원하는 게 제 씨앗을 퍼트리는 거라니, 악인의 인생은 어쩌면 이렇게 하찮고 가여운가. 반드시 지옥으로 보내고 말 것입니다.”
기도문을 외듯 경건한 말투에 백작이 기가 찬다는 시선을 보냈다.
“최종 목표는 대륙 제패고 곁다리로 왕자까지 얻어 가려는 것뿐이야. 원래 인간은 하찮은 일로 목숨도 잃고 그렇단다.”
넌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겠지만.
백작은 주변을 슬쩍 살핀 뒤 듀벨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단은 날뛰고 싶은 만큼 날뛰고 계시게나. 두 분도 오고 계실 테니. 나는 잠시 대열을 이탈하겠어.”
백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듀벨은 다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백작의 부관이 묘하게 희희낙락 신나 보이는 듀벨의 뒷모습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참나, 성기사는 뭐 인간 아니랍니까? 싸우는 것이 뭐가 좋다고.”
백작은 부관에 말에 언뜻 하얀 유령 같은 성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규율과 제약이 많은 성기사들이 유일하게 그것을 벗어던지는 시간이라서 그럴 게다. 전시에 그들이 지켜야 할 규율은 단 하나뿐이지. 여신의 편에 선 사람을 해치지 않을 것.”
물론 듀벨은 그것보다는 순수하게, 합법적으로 피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겠지만.
그런 사정까지 세세히 밝혀 섬세한 부관이 듀벨을 멀리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던 백작은 말을 아꼈다.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단에 입단한 뒤엔 성서에 기록된 율법을 주입받고 훈련을 하는 것이 전부인 성기사들은 대부분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신의 검으로만 오롯이 취급받는 탓에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거다.
그들이 일반인과 구분되는 독특한 기질이 있다면 신체 능력이 뛰어나고 형질 구분 없이 후각과 페로몬에 예민한 것뿐이었다.
성기사 집단 안에서는 알파도, 오메가도, 베타도 없었다. 성별의 구별은 더욱 없었다.
황제가 성기사들을 꺼리는 데는 그것도 있었다.
한창때의 젊은이들이 한 장소에서 오래 부대끼는데 마땅히 벌어지기 마련인 어떤 감정적인 교류나 대립이 일체 배제되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었다.
듀벨은 그중에서도 유별난 작자였다. 신도 아닌 인간 주제에 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아주 작은 일도 혐오했다.
그는 아장아장 걸음을 걸을 때부터 선별되는 다른 성기사들과 다르게 한창 머리가 굵어지는 12살의 소년으로 버번 백작의 손에 이끌려 입단했다.
애초에 오갈 곳 없는 거지 소년의 범상치 않은 눈빛을 보고 굶어 죽기보다는 사제가 되라고 배려한 것이지만, 막상 그를 거둔 대사제는 그가 기사 서임을 받기를 바랐다.
성기사가 되는 일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험난한 길인지 아는 백작은 반대했지만 대사제는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고 단언하며 밀어붙였다.
뭐, 결론적으로는 대사제가 옳았다.
인간답게 살기에 듀벨의 성향이 심히 사이코패스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사 서임 후에 듀벨이 교리에 완전히 감화되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듀벨의 종착지는 먼 섬에 있는 중범죄자용 감옥이었을 것이다.
‘그간 너무 평화로워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을지도.’
다른 성기사들 사정도 마찬가지겠지만.
누차 말하지만, 저쪽 고삐는 대사제가 단단히 틀어쥐고 있으니 같은 편 일 때는 아주 든든한 집단이다.
뒤에 매달아 둔 말을 부관이 풀자 백작은 그 위에 곧바로 올라탄 채 병영을 뒤로하고 왔던 길로 다시 달렸다.
그의 갑주 중앙에 박힌 마정석이 반짝하고 빛을 흩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