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린드버그와 아드리안 헤네켄이 백작을 만난 것은 두 사람이 마지막 마법진을 넘었을 때였다.
중간 지점마다 머무르던 병사들 일부가 함께 따라와 조금씩 불어난 일행은 이제 한 개 소대 정도는 되었다.
아는 얼굴을 만나 기뻤는지 칼 린드버그가 한달음에 백작에게 다가왔다.
“백작님!”
걱정과 긴장이 역력한 칼 린드버그 왕자의 표정에 버번 백작은 저도 모르게 아버지의 마음이 되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왕자님.”
아, 그리고 황태자 전하도요.
충심이 강한 버번 백작이 마치 황태자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을 잊어버렸단 투로 뒤늦게 덧붙이자 아드리안 헤네켄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말 등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뿐이었는데요. 일선에서 싸우는 분들이 수고로우시죠. 특이한 점이 있습니까?”
백작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남자를 찾는 것 같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쓸데없이 고급스러운 취향이군.”
짧게 함축된 백작의 설명에도 무지차 파르만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챈 아드리안이 대놓고 이를 드러내며 불쾌한 티를 냈다.
“이성이라곤 한 톨도 없는 주제에 금발 벽안의 남자만 보면 일단 멈칫하고 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부대를 별도로 편성할 걸 그랬지 뭡니까.”
농담 아닌 농담에 아드리안의 미간이 구겨졌고 칼 린드버그는 각인을 미리 하길 잘했다는 생각에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병사들은 어떻습니까?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사기가 꺾이지는 않았나요?”
뿌연 먼지와 소음으로 소란스러운 곳을 건너다보며 왕자가 묻자 그가 타고 있던 말이 주인의 마음을 대변하듯 제자리걸음을 했다.
당장이라도 그쪽으로 달려가고 싶다는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드리안 헤네켄은 혹시나 말이 튀어 나갈까 봐 왕자의 앞으로 위치를 옮겼고 칼 린드버그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웃으며 식은땀을 닦아 냈다.
긴장에 앞머리가 다 젖었다.
“다행히 사망자는 몇 되지 않습니다. 부상병들은 빠르게 회복하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사망자…….”
아무리 들어도 가슴이 푹 내려앉는 단어다.
눈썹을 축 늘어뜨리던 칼 린드버그가 도리질을 쳤다.
전투에 사망이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쓸데없는 감성에 젖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아직 성안으로는 진입하지 못했다면서요?”
마음의 근육을 긴장시킨 칼 린드버그가 쥐고 있던 마도구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여기서 더 이상의 피해가 없으려면 일을 빨리 마무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진입은 못 했지만 두 분이 도착하시면 통로를 뚫어 드릴 수 있습니다.”
병력의 규모와 그중 얼마의 병력을 빼서 길을 트고 호위해서 돌파하는 방법까지, 백작의 상세한 설명을 신중히 듣던 칼 린드버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멀뚱히 섰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을 만큼 흩날리는 흙먼지 너머를 보기 위해 애를 쓰며 대신 귀를 활짝 열었다.
철컹철컹, 갑주의 관절부가 부딪히는 소리.
스릉, 소름 돋을 만큼 예리한 검날이 검집에서 빠지는 소리나.
마법을 쓰는 건지 간간이 발포 탄 소리도 들렸다.
전투 시에 와아아, 하고 기합을 넣는 것은 아무래도 만화적 효과음이겠지.
칼은 악, 억, 큭, 하는 단말마와 기괴한 마수들의 울음소리에 집중했다.
저쪽을 우리를 지켜 가며 돌파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칠까.
이쪽 소대가 합류하며 빈 병력을 지킨다고 해도, 무려 황태자와 황태자 비를 엄호하는 일이니 정예 중의 정예가 따라붙을 테고.
“칼?”
아드리안이 그를 불러서 상념을 깨울 때까지 마도구를 신줏단지처럼 끌어안고 벙하니 앉아 있던 칼은 “어?” 하는 성의 없는 대답을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든 아드리안이 자신과 칼의 말을 나란히 세우고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칼 린드버그가 어깨를 움츠렸다.
“왜…… 왜?”
“혹시 달갑지 않은 생각을 하지는 않은가 해서.”
대뜸 눈을 부라리는 아드리안 때문에 뜨끔해진 칼이 괜히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생각은 무슨. 아니야.”
데구루루 눈을 피하는 폼이 요상했다.
“무슨 생각을 하든지 나한테 상세히 밝혀.”
비밀은 싫다고 말했잖아.
아드리안이 덧붙이자 칼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저쪽을 돌파하는 게 얼마나 어려울지 가늠해 보고 있었어.”
사람이 얼마나 달라붙어야 할지 같은 것.
칼은 손끝으로 흙먼지 너머를 가리켰다. 아드리안이 한숨을 쉬었다.
“무사히 들어갔다가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만 생각하지.”
“물론 그럴 거야. 그렇긴 한데.”
칼은 또 입을 꾹 다물었고 아드리안은 그를 채근하는 대신 고삐를 쥐었다.
아까보다는 조금 덜 빠른 속도로 칼 린드버그와 아드리안이 달렸다.
버번 백작은 ‘여러모로 희한한 사람이다.’ 하고 생각했다.
전투를 목전에 두고 보통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지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향해 저렇게 애타는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 전투가 자신과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면 더욱 그랬다.
이번 파르만과의 마찰은 칼 린드버그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긴 했지만 근본은 파르만이 검은 속내를 드러냈고 그것을 알게 된 제국이 저지하는 것뿐이다.
왕자가 특별히 파르만을 막을 방법이 있다고 하니 판을 벌이긴 했다만 그 외에도 서너 가지의 방법을 찾아 놓기는 했다.
왕자도 그것을 모를 턱이 없는데.
피와 죽음을 보는 것이 결코 익숙할 수 없는 왕자는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기를 쓰고 그 길로 향했다.
자신의 일이 아닐 때 그 기질은 심해진다는 것도 독특했다.
단순히 정의로운 인간이라 그렇다기엔 언뜻 달관한 것처럼 보여 버번 백작은 칼 린드버그가 안쓰러웠다.
물론 이제는 황태자가 든든히 곁을 지켜 주니 생판 남인 데다 신하일 뿐인 버번 백작이 그를 위해 더 해 줄 것은 없겠지만.
* * *
흙먼지 너머의 광경은 칼 린드버그의 상상보다 더 생생하게 참혹했다.
칼부림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뒤틀리고 못생긴. 덮어놓고 인간을 죽이는 데만 꽂혀 있는 마수와 흰옷을 입고 칼부림을 하는 성기사들의 무표정함이 비현실적이었다.
‘이게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세상.’
칼 일행을 따라온 소대가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 섞였다.
지대가 평평했지만 전투하는 이들은 대부분 원활한 움직임을 위해 말에서 내려와 있었고 땅을 기는 마수들은 대부분 다리가 짧고 바닥에 붙어 있는 형국이라 칼은 어렵지 않게 전투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일부는 칼 린드버그와 아드리안을 빙 둘러싸 사방을 경계했고 그 안에서 칼은 자신이 마치 상석에서 검투사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로마 황제나 되는 것만 같아서 뜻 모를 불쾌감이 엄습하는 듯해 표정을 찡그렸다.
뒤로는 수십 개의 성벽이, 앞으로는 축축하고 검은 벽돌로 쌓은 원기둥 형태의 성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의 정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소규모 국지전으로 황폐했다.
문득 칼 린드버그의 눈에 한 병사의 어깨가 마수의 이빨에 뜯겨 나가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아!”
어쩔 수 없이 몸이 앞으로 쏠렸고 아드리안이 그를 붙들지 않았으면 또 달려 나갈 뻔했다.
공중으로 피가 솟구치는데도 남은 한쪽 팔로 기어이 마수의 목에 검을 박아 넣은 뒤에야 그 병사는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그때 뒤에서 치고 나온 어떤 기사가 검을 휘두르자 쓰러진 병사 주변에 임시 결계가 생성되고 그사이에 또 다른 이들이 병사를 수습했다.
“제국의 군사는 제국의 안위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영광이고 일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뒤통수에 전해지는 버번 백작의 위로 같은 말에 칼 린드버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이 아니라 부상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저 어깨가 제대로 붙을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래도 그가 살아 있기를 간절히 바란 칼이 손을 모으고 크게 숨을 골랐다.
‘일단은 지켜보는 게 맞는 거야. 나는 더 이상 구급 대원도 평민도 아니다. 내가 다치거나 죽으면 더 큰 일이.’
그렇다고 해도. 그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의 무게가 얼마나 다를까. 감히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칼 린드버그는 생각조차 끝맺음하지 못했다.
버번 백작과 주니퍼 경은 다른 기사들과 함께 돌파를 위해 움직일 계획을 짜고 있었다.
칼 린드버그는 자꾸만 굽어지려는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이를 악물었다.
계속 누군가 다쳤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과 눈을 부릅뜨고 참는 사람도, 몸통이 갈라져도 바닥을 설설 기는 마수들이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을 찾아 그 다리를 움켜쥘 때마다 칼 린드버그도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퀴퀴한 흙냄새, 피 냄새, 끈적거리는 공기와 날카로운 소음.
오감으로 느끼는 전투는 칼 린드버그가 얼마나 편하게 살다가 이곳으로 넘어왔는지를 자꾸만 상기시켰다.
잘못하면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버릴 것 같았다.
싸우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한 걸음 떼지도 않은 제가 하기에는 너무 염치없는 짓이어서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때 아드리안이 훌쩍 칼 린드버그의 말로 갈아탔다.
뜨거운 손바닥이 칼 린드버그의 눈을 가렸다.
“쉬이, 괜찮아.”
등 뒤를 가슴으로 단단히 받치고 한 손으로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외유내강인 척해도 그 여린 속의 애끊는 심정을 아드리안도 모를 수 없었다.
팔뚝에 한쪽 손을 올린 칼 린드버그가 결국 작게 흐느꼈다. 귓가에 연신 괜찮다고 중얼거리는 나지막한 음성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잠시 등을 잘게 떨며 울음을 삼킨 칼이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뭐가?”
“그냥. 전부.”
아드리안은 대답 대신 칼 린드버그의 귀 뒤에 입술을 묻고 문질렀다.
칼은 솔직히 걱정스러웠다. 이래서야 제국을 호령할 아드리안의 곁을 지킬 수 있을지. 그 전에 무지차 파르만을 처치할 수 있기나 할지. 자신감이 떨어졌다.
귀 뒤에 내려앉는 깃털 같은 입맞춤에 칼이 짧은 한숨을 토해 내고 깜빡깜빡 속눈썹에 붙은 눈물을 털어 냈다.
직업이 직업이라. 수백 건의 사건을 지나치는 동안 그 반 정도의 시신을 목격했다.
또 그중 반은 그의 눈앞에서 생을 다 했다.
센터에 돌아와 몸을 뒤트는 우영을 보던 선배들은 네 성격이 구급 대원을 하기에는 좋지 못하다고 말했다.
그쯤은 스스로도 잘 알았다. 자신은 쉽게 사람을 동정하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걸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신이 아니기에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자기최면을 걸듯 마음에 새겼기 때문이었다.
칼 린드버그가 천천히 아드리안의 팔뚝을 쓰다듬었다. 아드리안이 팔에 힘을 주자 핏줄이 뚝뚝 섰다. 이만큼, 아니 조금 더 강해지고 싶다. 칼 린드버그가 속으로 되뇔 때 아드리안은 말했다.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차라리 나에게 모든 책임과 의무를 떠넘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칼이 돌려 아드리안과 눈을 마주쳤다. 염려와 아쉬움이 공존하는 녹색 빛의 눈을 보자 저 멀리 도망갔던 자신감이 다시 차올랐다.
혼자가 아니야. 너도, 나도. 연인이며 가족이 되어 줄 이가 등을 받치고 있었다.
“아드리안, 네가 홀로 여기에 서 있었다면 나는 배로 괴로웠을 거야.”
매일 밤 끔찍한 상상으로 잠들지 못했겠지.
칼은 아드리안의 손을 꼭 잡았다. 무지차를 저지하지 못하면 어차피 우리에게 꿈 같은 미래는 없었다.
“이기고 돌아가자. 너는 싫겠지만 나는 이렇게 돌아갈 순 없거든.”
아드리안은 다시 칼의 등을 꼭 끌어안았고 칼은 핏발 선 눈으로 성을 훑다가, 정말 교묘하게도.
성안에 있는 유일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