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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27)화 (127/150)

비릿한 냄새가 나는 마수의 털에 얼굴을 수차례 박으면서도 칼 린드버그는 아드리안에게 사과했다.

칼 린드버그가 한 짓은 아드리안에게 아주 나쁜 짓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는 연인을 두고 필요 없다며 대놓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나쁜 짓.

‘그런데, 나는 이런 것밖에 몰라. 네가 다치고 아프고 네가 지켜야 할 네 백성이 다치고 힘든 것이 지금 당장 너에게 고통을 주는 일보다 싫어서.’

어차피 무지차 파르만은 만났어야 하고 그 새끼가 꼭 너만은 살려서 마주하겠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으니, 그 길에 혹시 위험할지 모를 아드리안까지 동행하기 싫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잃는 일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살아온 지난 생이, 네가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우니 여기서라도 듬뿍 사랑받고 살라며 만들어 준 환상 같은 새 삶.

이곳에서 또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래도.

아드리안의 마지막 표정과 절규는 아직도 주변을 맴돌며 가슴을 따끔따끔 찌르고 있었다.

“아, 씨. 큰일 앞두고 우는 거 아닌데.”

눈물이 찔끔 났다.

각인이 아니더라도 아드리안은 처음부터 칼에게 애틋한 상대였는데 각인 후에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러니까 내가 좀 지켜 줘도 되잖아.’

그럼에도 자꾸 복받쳐 오르는 감정에 축축하게 차오른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질까 말까 할 때쯤 퍽 소리를 내며 코를 마수 등판에 박았다.

죽은 것처럼 늘어져 있던 칼 린드버그가 상체를 살짝 세우고 코를 틀어쥐자 뒤따라오던 마수가 쉭쉭거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시팔, 코 아프다고.”

덕분에 정신은 번쩍 들었다.

니들이 뭘 알아듣겠냐마는. 칼 린드버그는 눈알을 부라리며 편하게 욕을 했다.

여기선 잘 보일 사람이 없으니 미친개처럼 나설 예정이었다.

마수들은 두 발로 뛰고, 때로 네 발로 뛰며 저들이 매달고 달리는 칼 린드버그의 생사만 확인할 뿐 코가 깨지든지 말든지 신경은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층수가 많아지고 제멋대로 흔들리는 머리통에서 뇌가 덜커덕거리며 멀미를 유발했지만 칼 린드버그는 개의치 않았다.

나가서 욕먹고 아드리안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 뭐든 하려면 일단 여기서 멀쩡한 정신과 신체를 가지고 나가야 했다.

크륵, 크륵.

“뭘 째려봐. 짜증 나게.”

눈알이 이만큼 튀어나오고 깡마른 주제에 팔뚝만큼은 근육이 붙어 있는 괴상한 생명체가 칼을 잡아먹을 것처럼 가까이 왔다가 멈췄다.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안쪽을 힐긋거리는 폼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주인 말은 기가 막히게 잘 듣네.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 써 봤던 파르만산 마정석도 명령은 정확히 지켰지. 싸구려라 오래 못 버텨서 그렇지만.’

이 정도로 마수를 길들일 수 있었던 게 업적이라면 대단하긴 했다. 다만, 그 목적이 뚜렷하게 악의에 치우쳐 있어 문제였지.

무슨 문양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으로 뒤덮인 문을 지나 마수는 칼 린드버그를 내동댕이치다시피 안으로 던져 넣고 문을 쾅 닫았다.

거대한 구멍을 가운데에 둔, 아마도 연회장이었던 그 곳에서 칼 린드버그는 아슬아슬하게 구멍 근처에 걸쳐졌다.

조금만 밀려 나갔다면 떨어졌겠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공간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와아아아, 잡아!

아드리안 전하!

거기! 경계를 늦추지 마라!

회랑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소리가 창을 타고 선명히 귓가에 울렸다. 간간이 노성을 지르는 것이 아드리안이 아니기를.

칼 린드버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으나 부러 뒤돌아보지 않았다.

“칼 린드버그.”

바닥을 긁는 듯 불쾌한 음성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조금 약을 올릴 심상으로 천천히 문 앞으로 걸음을 옮겨 보았다.

“칼 린드버그.”

옷자락이 바닥을 설설 쓰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다가왔다.

칼이 대답하지 않고 문고리에 손을 올릴 때쯤 거미처럼 가느다랗고 흰 손이 그의 어깨를 쥐었다.

“어딜 가?”

‘오래 기다린 것 치고는 인내심이 없는 편이네. 그다지 신중한 것 같지도 않고.’

거센 아귀힘에 억지로 몸이 돌려진 칼 린드버그가 눈앞의 무지차 파르만을 올려다보았다.

의외로 앳된 외모에 작게 놀랐지만 칼 린드버그는 그가 동정의 여지 없는 무지차 파르만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해를 못 보고 자란 놈치고 눈 색이 선명하고 키가 컸다.

“당신이 무지차 파르만인가.”

알고 있지만 확인차 물었다. 혹시 아닐 수도 있으니까. 칼 린드버그는 오늘 이놈을 죽이거나 죽음 직전의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지 않고서는 돌아갈 수 없었다.

“하하하, 모르는 척하기는. 헤네켄의 정보력이 월등한 거 지나가는 쥐새끼도 아는데.”

무지차는 정말 즐겁다는 듯 웃었다. 사람을 수천, 아니 수만을 죽이고 밖은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은 놈이, 웃어? 칼 린드버그의 미간이 점점 좁혀졌다.

“안타깝게도 네 용모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낸 바가 없어서 말이야.”

성벽이 오죽 두꺼워야지.

칼의 말에 무지차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키득거리며 웃으면서 연신 위아래로 칼을 보던 무지차가 대뜸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칼 린드버그가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주고 버텼지만 무지차가 팔을 아주 뽑아내려고 하는 통에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울리지 않게 흰 천으로 덮여 있던 테이블에 억지로 칼 린드버그를 앉힌 무지차가 그 앞에 바짝 붙어 앉았다.

“어느 쪽이 진짜야?”

“무슨 말이야?”

“키치너는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반푼이 왕자랬어. 얼굴만 예쁜 멍청이라고. 그런데 지금 보니까 또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네.”

키치너가 여기 있으면서 나불나불 왕자의 신상을 밝혔나 보다.

아니지, 애초에 왕자가 먹었던 약도, 왕을 중독시켰단 것도 전부 파르만에서 나왔으니 모르는 게 없다 봐야지.

그에 대해 밝혀진 것이라고는 이름과 성별뿐이어서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십년지기 절친을 만난 것처럼 구는 무지차의 표정이나 말투도 신경을 긁었다.

무지차가 칼 린드버그의 앞머리에 손가락을 올리다가 그의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만지면 닳아?”

“닳는 정도가 아니라 썩을지도 모르지. 내 몸에 손대지 마.”

날카로운 칼의 반응에 무지차는 굴하지 않았고 대신 손으로 자신의 턱을 받치며 비스듬히 걸터앉아 칼 린드버그와 눈을 마주쳤다.

눈 색과 대조되는 까맣고 긴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고전 공포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몽달귀신을 닮았다.

칼 린드버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왜? 내가 네게 무얼 했다고 이렇게 날을 세워? 아, 혹시 그건가.”

무지차가 심드렁한 말투로 자문자답했다.

밖에서 쾅, 하고 거센 파동음이 들렸다.

전하! 아드리안 전하!

칼 린드버그의 귀가 움찔 떨리며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을 무감각하게 보던 무지차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각인한 상대에게만 정조를 지키는 건가?”

“역시 눈치챘군.”

그가 끝까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터라 칼 린드버그도 자꾸만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심장을 붙들었다.

“냄새가 나지 않으니 알아차릴 수밖에.”

아까부터 일부러 흘리는 무지차의 페로몬도 눈치채지 못했고.

이래서 각인한 것들은 재미없다니까.

무지차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왜 그를 선택했지? 그가 황태자라서? 우성 알파라서?”

“그걸 꼭 대답해야 하나?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의미는 없어, 순수하게 궁금해서.”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아.”

눈을 치켜뜨는 칼 린드버그의 얼굴에서 바다처럼 일렁이는 홍채와 더불어 태양 빛을 흡수한 듯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탐나는 시선으로 훔친 무지차는 바닥에 아까부터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장미 꽃다발을 주워 들었다.

얼룩덜룩 기분 나쁜 색의 장미 다발을 불쑥 내민 무지차는 정말 어울리지 않게도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네게 청혼하고 싶어.”

칼 린드버그의 척추가 오싹하니 떨렸다.

“거절한다.”

“왜?”

왜? 다채로이 미친놈에게 칼 린드버그는 저도 모르게 몰라서 묻냐 소리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나는 그 사람과 약혼하고 각인했으니까.”

“아드리안 헤네켄이 네게 주는 것을 내가 줄 수 있다고 해도?”

“아니, 너는 못 줘.”

단호한 어조에 무지차가 비릿하게 웃었다.

“아드리안 헤네켄은 여기서 오늘 죽어. 그가 죽음으로 나는 그간 원하고 바랐던 것을 이룰 거고, 그렇게 되면 어차피 헤네켄 제국도 내 발아래 엎드릴 텐데.”

아드리안이 죽는다. 그걸로 이룬다.

아드리안의 마력은 제국 내에서도 손꼽힐 만큼 강하다고 했다. 칼 린드버그는 무지차가 여기서 기다리는 것이 아드리안이라는 것이라 짐작했다.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치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무지차가 칼 린드버그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 그 손바닥 위에 장미를 억지로 쥐었다.

“윽.”

가시가 제거되지 않은 줄기가 손바닥을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도 칼 린드버그는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떠 무지차를 노려보았다.

이게 진짜.

칼 린드버그를 힘으로 짓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드리안 헤네켄 하나면 족했다.

무지차는 칼 린드버그에게 입을 맞출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내렸다.

“선택해. 내 신부가 되어 새로 각인하고 새 시대를 함께 맞이할 것인지.”

각인을 새로 할 수도 있는 건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짓이겨진 입술에서 피가 한 줄기 내렸다.

아드리안이 아닌 다른 남자의 입맞춤은 달지도 흥분되지도 않았다.

역겹고 아프기만 했다.

“아니면, 목덜미의 각인을 둔 채. 돌아오지 않는 약혼자를 그리워하며 차가운 바닥에서 내게 겁탈당할래?”

끔찍하고 괴로울 것이라.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낫다고 울부짖어도 그는 죽여 주지 않을 거라고 협박했다.

“차가운 바닥에서 다리를 벌리고 애를 낳는 것보다는 푹신한 침대가 낫지 않아? 나도 제법 쓸 만하거든. 네 알파가 기술이 얼마나 좋은지는 몰라도.”

킬킬거리며 허리를 움직이는 모양새가 동네 깡패보다 더 질이 나빴다.

“안타깝네.”

이를 빠득 간 칼 린드버그는 온 힘을 다해 무지차를 밀었다.

무지차가 “오.” 하며 순순히 뒤로 밀려 나갔다.

동시에 망토에서 직접 제작한 마도구를 꺼내 든 칼은 가시로 엉망이 된 손바닥이 아픈 줄도 모르고 세게 움켜쥐었다.

“네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야.”

아무 수식도 적혀져 있지 않은 마도구에서 조금씩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똑바로 무지차를 향해 세운 칼 린드버그가 서늘한 말투로 말했다.

“네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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