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마석의 종류는 수백 가지, 그중에서도 시중에 유통될 수 있는 마석과 전투용, 생활용 등으로 구태여 나누는 이유는 마석별로 마력에 반응하는 속도나 민감성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세분화되어 있고 그에 따라 효용을 달리하는 마법의 세계, 정확히 말하자면 마정석의 세계에 칼은 연신 감탄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봤을 때는 마법이 마법이지, 했던 것이 가까이 들여다보니 공부해야 할 것도 맹점도 많았다는 거다.
가방끈은 짧았으나 본래 집요하고 성실한 구석이 있는 칼 린드버그는 아드리안 헤네켄과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마법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칼 린드버그가 관찰한 한도 내에서 가장 큰 문제는 마법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설정하는 것이 꽤나 골치 아프다는 부분이었다.
아무나 마법을 쓸 수 없는 것도, 전투 마법을 금하는 이유도 본질은 비슷했다.
‘타오르는 장작’이 방의 네 귀퉁이를 장식한 마정석일 때야 보온을 위한 마도구였다 치지만 칼 린드버그가 그것으로 남을 해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훌륭한 무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그게 그저 수식의 차이라 생각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마정석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지의 차이더라’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수식의 표면적 의미만 배워 온 이 세상의 마법사들은 쉽게 하지 못하는 것을 칼 린드버그는 할 수 있었다. 도감이 없어도 자연스러운 ‘마법적 문장’을 구현하는 것, 더불어 강렬한 의지를 심어 가상의 마법 수식을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은 소설 밖 사람이라는 것이다.
칼 린드버그는 그 강점을 여과 없이 발휘해 보기로 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지만 맥켈런 후작의 도움으로 조금 실험을 해 보기도 했고.
그래도 계속 긴가민가하던 칼 린드버그는 여기로 오는 여정 안에서 확신을 얻었다.
“말해. 네 마법진 그거, 어디서 나온 거고 어떻게 발동하는지.”
칼 린드버그가 손에 힘을 주었다.
파득 소리를 내며 무지차의 돌덩이 같은 허벅지의 근육이 파열되었다.
“나도 말 못 해 주겠는데. 네가 목매달아 사랑하는 그이를 여기에 데리고 온 것이 네 실수라고 말해 줄 순 있지.”
무지차가 마력을 끌어 올려 근육이 굳는 속도를 늦추었다. 칼 린드버그가 어떤 마법사이든, 무지차도 그 못지않게 대단한 형질자였다.
무지차를 묶었던 칼 린드버그의 결계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조금씩 파괴되자 칼 린드버그는 마도구로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이 걸레 같은 게!”
고개가 홱 돌아간 무지차는 피 섞인 침을 뱉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노성을 지르며 칼 린드버그에게 달려들었다.
“할 줄 아는 욕이 그것밖에 없냐? 내가 아는 선에서 걸레는 너처럼 아무 데나 아랫도리를 흔드는 사람을 일컫는 표현인데.”
달려드는 무지차를 피해 저만치 달아난 칼 린드버그가 빈정거렸다.
칼은 ‘백지수표’가 부디 오래오래 버틸 수 있기를 바라며 그것을 치켜들었다.
“두 번은 안 당하지.”
무지차가 손가락을 튕기자 구덩이에서 마수들이 기어 올라왔다.
칼 린드버그는 마도구를 가로로 눕히고 마수의 손길이 그에게 닿기 전에 쏜살같이 올라탔다. 이번 콘셉트는 빗자루를 타고 배달을 하는 마법 청년이었다.
백지수표는 이름값을 했다.
칼 린드버그가 상상하는 모든 것을 마법으로 훌륭히 구현해 주었다.
“아, 진작에 좀 멋있는 판타지 애니 좀 볼걸.”
울렁. 부유감에 속이 뒤틀렸다가 가라앉았다.
칼 린드버그는 그다지 넓지 않은 지팡이를 허벅지로 꽉 죄고 마수들을 피해 한 층 위의 난간으로 피하면서, 왜 마법 소녀는 있어도 마법 소년은 없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미치도록 아팠기 때문이었다.
‘오래는 못 타겠네. 하.’
판타지 소설을 왕왕 보긴 했지만, 글로 쓰여 있는 것을 시각적인 장면으로 변환하여 다시 사용 가능한 문장으로 나열하는 것이 의외로 어려운 일이라 칼 린드버그는 일차원적인 움직임을 반복했다.
무지차는 허공을 나는 칼 린드버그를 보며 잠시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이런 건방진 새끼.”
“너는 그냥 나쁜 새끼고.”
하나는 허공에서 하나는 아래에서 별 소득 없는 말싸움을 했다.
칼 린드버그는 요리조리 잘도 피했다. 그냥 피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요행을 부리는 건지 피하면서 동시에 마수들을 서슴없이 결박했다.
뭘 믿고 저렇게 날아다니는지 모르겠다.
“너도 슬슬 마력에 한계가 올 텐데. 그만하는 게 좋아.”
약이 바짝 오른 무지차는 주먹을 쥔채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빙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 무지차를 피한 칼 린드버그는 마수들에게 저리 가라며 휙휙 손을 저었다.
마수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칼 린드버그의 손짓을 따라 얌전히 갱도로 돌아갔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번에야말로 당황한 무지차가 고함을 쳤다.
“알면 어쩌게? 너는 알아도 못 써. 마수만도 못한 자식아.”
우수수 떨어진 마정석은 여기저기 잘도 달라붙었다.
무지차의 옷도 그렇고 마수의 털에도 새끼손톱보다 작은 마정석이 엉겨 붙었다.
마정석은 최초로 인장을 부여한 사람에게 귀속된다. 칼 린드버그가 깨알같이 새겨 넣은 것은 수식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인장이었다. 수식을 새기지 않은 것은 무지차에게 무기를 빼앗길 것을 대비한 술책이었고.
“아악!”
무지차가 위로 솟구칠 때 칼 린드버그는 마도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직각으로 떨어져 내렸다.
몸무게는 가벼울지라도 칼 린드버그는 남자였다. 중력을 실은 그의 발이 무지차의 어깨를 부술 것처럼 타격했다.
무지차가 잠깐 비틀거리며 가슴 속 마정석을 더듬을 때, 칼 린드버그는 다시 한번 ‘백지수표’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마음 같아서는 무지차를 갱도로 떨어뜨리고 싶었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만약 무지차의 생명과 아드리안 헤네켄의 생명을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자칫하다간 무지차가 죽음으로써 진이 제 몫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지금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무지차의 가슴에 있는 마정석을 내가 쥐는 건데.’
여기까지 생각한 칼 린드버그가 무지차의 가슴을 들이받고 바닥으로 밀었다.
“아악!”
무지차는 이제 완전히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악다구니 치며 칼 린드버그의 발목을 잡았다.
우당탕!
칼 린드버그가 무지차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크윽.”
무지차가 얼얼한 관자놀이를 짚으며 칼 린드버그의 발목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칼은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았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 보여 줄 순 없다는 의지가 고통을 줄였다.
“결, 박.”
칼 린드버그가 다시 주문을 외웠을 때 무지차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굳어 가는 근육을 스스로 파열시켰다. 수차례 가해진 타격에 무지차의 한쪽 눈두덩이와 볼이 보기 싫게 부어올랐다.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고 했지?”
콰악.
“흐윽!”
한쪽 팔뚝으로 칼의 가슴을 내리누르는 데 성공한 무지차가 다른 손으로 마도구를 쥔 칼 린드버그의 손목을 꺾은 뒤 가슴을 누르던 손으로 목을 졸랐다.
칼은 호흡의 속도를 늦추고 성한 팔로 목을 조르는 무지차의 손등에 손톱을 박았다.
칵, 퉤!
입안에 고인 침을 뱉어낸 무지차가 칼의 마도구를 들어올리며 빈정거렸다.
“어쩌냐. 유일한 무기를 빼앗겨 버렸네.”
쿠구구궁.
밖에서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창이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와아아아!” 하고 함성이 들렸다.
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가 색색 숨을 몰아쉬며 밖을 보려고 고개를 꺾었다.
찰나였지만, 컥컥거리는 칼 린드버그와 벽을 타고 기어 내려가는 마물의 등허리에 검을 꽂아 넣은 아드리안 헤네켄의 형형한 눈이 마주쳤다.
아드리안의 눈에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스르륵.
그가 지나간 자리, 깨어진 창문으로 밖의 소란스러움이 여과 없이 들어왔다.
무지차의 얼굴에 희열이 퍼져 나갔다. 아드리안 헤네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구속 주문의 효력이 가시지 않은 터라 무지차도 버티기 힘들었다.
그는 몸이 더 굳기 전에 칼 린드버그의 마도구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칼은 마치 모든 걸 체념한 사람처럼 몸을 늘어뜨렸고 무지차는 그 옆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온몸을 굳히고 누워 킬킬 웃었다.
“너는 곱게 못 죽을 줄 알아.”
“…….”
무지차의 도발에 칼 린드버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아드리안 헤네켄의 마지막 눈빛은 무지차도 보았다. 그는 눈빛만으로도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아아, 실망스럽겠지. 자신을 두고 위험을 무릅쓴 짝이 적장에게 목이 졸리고 있는데,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능력해 보일까.
칼 린드버그도 그것을 느낀 듯했다.
양팔과 다리를 모두 늘어뜨리고 숨을 쉬던 칼 린드버그가 눈을 감았다.
쿠르릉, 쿠르릉.
아드리안 전하!
마물의 움직임을 막아라!
성체를 타고 마물이 빠르게 갱도로 사라지는 소리였다. 거기에 검을 박고 몸을 실은 아드리안 헤네켄도 덩달아 지옥의 한 가운데로 이동할 것이다. 거기서 올라오는 것은 갈고리 발을 가진 마수에게도 버거운 일이었다.
무지차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붉은빛이 소용돌이치며 노을처럼 황홀한 빛으로 영롱히 빛났다.
아버지가 자식의 죽음을 각오하고 박아 넣은 마수의 정수. 그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편안히 살아온 너희들이 알까.
어둠 속에서 마수와 공존하며 지독히 외로운 시절을 보내고, 그것이 숙명이자 더 나은 곳을 향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의 고통을.
아드리안 헤네켄의 죽음과 동시에 진과 함께 공명하여 그는 살아 있는 신으로 거듭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짜릿했다.
칼 린드버그의 몸이 꿈틀꿈틀 경련하듯 떨렸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팔과 다리를 오므리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의 마력이 바닥나려 하고 있었다. 속박 마법의 효력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겁도 없이 마력을 남발하니 이렇게 되지. 조금 똑똑해 보였던 것은 착각이었구나.
더없이 기분이 좋아진 무지차가 칼 린드버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네 알파는 너에게 실망한 것 같더군. 너를 선택한 자신의 안목을 저주하면서도 너에 대한 사랑을 접을 수 없어서 결국 이곳으로 걸어 들어왔으니. 기분이 어때? 순간의 감정으로 그를 지킬 수 있다는 자만에 젖어서 그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심정이 말이야.”
속이 뒤틀린다는 표정으로 무지차가 말했다.
“아까는 잘만 나불거리더니, 이제 와서 네 실수를 통감하는 거냐? 그래서 이렇게 조용해?”
칼 린드버그의 뒤통수를 보며 떠드는 것도 싫증 난 무지차가 몸을 일으켰다.
“어때, 기회를 줄까? 내게 빌면 못 들어줄 것도 없어.”
펑, 소리를 내며 성문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구멍을 찾아라!
무지차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드리안 헤네켄은 아마도 마물에게 잡힌채 갱도로 휩쓸렸을 것이다.
때가 됨을 느낀 무지차가 칼 린드버그의 목덜미를 잡아 올렸다. 그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네 알파가 죽는 길은 배웅해야지.”
칼은 힘없이 끌려와 갱도 입구 모서리에 몸을 걸쳤다.
안에서 정체불명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좋은 것 알려 줄까? 이 갱도 아래 온도는 상당히 높아. 우린 거기서 마수를 교배하고 길들이지. 인간도 마찬가지야. 넘치는 생명력과 미량의 마력을 태우고 압축하면 훌륭한 마법 재료가 돼.”
무지차가 엄지와 중지를 맞부딪혔다.
딱,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아드리안 헤네켄은 가장 좋은 재료가 될 거고.”
불꽃이 갱도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한없이, 한없이.
곧 저 안은 용암이 되어 마법 진 전체를 채울 것이다.
무지차는 키득키득 웃었다. 칼 린드버그의 작은 중얼거림은 듣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