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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30)화 (130/150)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무지차는 이를 악물었다. 사위가 지나치게 조용했다. 짠 것처럼 아래층도 조용해졌다.

구덩이 안이 점화되고 불기둥이 눈에 보일 정도로 넘실거렸다. 그것은 마법 진 안에 있는 텐지라를 태우고 시신을 삼킨 뒤 그대로 마력을 증폭시켜 마법 진을 완성한다.

그것이 무지차 파르만이 세상의 신이 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안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어 이상함을 느낀 무지차가 몇 번이나 불꽃을 내려보냈지만 여전히 안쪽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 되잖냐. 이 중2병 환자야.”

엎드러져 있던 칼 린드버그가 무릎을 툴툴 털고 일어났다. 한쪽 손목이 퉁퉁 부어 있었지만 손끝이 움직였다.

구급대원인 그가 환자에게 직접 폐쇄 정복술을 쓰는 일은 드물었지만 배워 놓긴 했다는 점은 나쁘지 않았다.

손목을 반듯이 아래로 하고 칼 린드버그가 하, 밭은 숨을 내쉬었다.

무지차는 멍하니 갱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너!”

“왜, 이 새끼야.”

흰자를 번뜩이며 무지차가 성큼 거리를 좁혀 칼 린드버그의 목을 잡아채려고 하자 잽싸게 두 걸음 물린 칼 린드버그가 건들거리며 말했다.

“두 번은 안 당한다며?”

그때 안쪽에서 붕, 소리와 함께 아까 내다 버린 마도구가 날아와 칼 린드버그의 손에 안착했다.

눈을 부릅뜬 무지차가 말을 잇지 못했다. 마력이 동난 게 아니었나. 그래도 한참 전에 내려간 것이 어떻게 지금? 당황해하는 무지차를 거세게 걷어찬 칼 린드버그는 이를 드러냈다.

“나 성격 나오게 하지 마. 살아온 환경이 뭐 같아서 착하게 살려면 남들보다 배는 노력해야 한다고.”

털썩 뒤로 주저앉은 무지차에게 칼 린드버그는 망설임 없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끄트머리를 뾰족한 갈고리 모양으로 처리한 마도구가 무지차의 옷을 뚫고 가슴팍에 붙어 있는 마정석에 박혔다.

무지차는 다시 자신의 몸이 굳어 가는 것을 느꼈다.

구덩이 안쪽에서 어렴풋이 무슨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도 곧 멎었다.

“긴말하지 않을게. 꿈 깨. 새끼야.”

칼 린드버그는 정색을 하고 단번에 무지차의 마정석을 뜯어내었다.

우드득.

“아악!”

가슴에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쏟아지는 피를 주워 담으려고 해 보았지만 몸부림치려는 동작도 할 수 없었다.

무지차는 눈을 홉뜨고 입을 한계치로 벌린 뒤 “아악!” 하고 연신 비명만 질렀다.

벌어진 가슴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으나 칼 린드버그는 눈썹도 끄떡하지 않았다.

그는 무지차에게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숙여 그의 가슴에 난 구멍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엄살 피우지 마, 장기가 손상될 정도로 깊이 박혀 있지도 않았네. 뭐.”

그때 병사들이 안쪽으로 박차고 들어왔다.

“왕자님!”

“무사하십니까?”

주니퍼가 안으로 들어왔다가 피 칠갑을 한 무지차를 보며 황망해하고 그 앞에서 무표정하게 선 칼 린드버그의 모습에 말을 잇지 못했다.

칼 린드버그는 병사들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듯 계속 중얼거렸다. 그도 사실 평정심을 잃은 상태였다.

“이 마도구의 이름은 ‘백지수표’야. 아, 다른 말로는 미완성 어음이라고 해야 알아들으려나.”

약간 붉게 물든 마도구의 끝을 무지차의 눈에 가까이 가져다 댄 칼이 무지차를 따라 하듯 킬킬 웃었다.

“별명도 있어, 묠니르 2세라고. 어느 곳에 있어도 내게 돌아오지. 정확하게 말하면 내 또 다른 마정석에게 돌아오는 건데. 그 기전은 네 알 바가 아니고, 아드리안에게 고마운 마음뿐이야. 얘는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어 줘. 네가 한참 떠들어 준 덕에 나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상상할 수 있었지.”

어쩌라는 거야. 무지차가 피눈물을 쏟았다.

진은 이미 파훼 상태였다. 아드리안 헤네켄이 죽지 않으면. 무지차는 엉금엉금 기어 칼 린드버그의 발목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비등한 마력의 칼 린드버그라도 죽여서 마법진을 완성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무지차의 마정석은 칼의 손에 있었지만 여전히 멀쩡했다.

그러나 그대로 등이 밟혀 납작 엎드려야 했다.

“네 연애관 관심 없고, 네 구질구질한 인생사도 관심 없어. 이 쓰레기야.”

병사들 중 하나가 히끕, 딸꾹질을 했다.

주니퍼도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람이 아까 아드리안 헤네켄의 품 안에서 벌벌 떨던 사람과 정녕 같은 사람인가.

뒤늦게 주니퍼와 다른 병사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칼이 고개를 꺾어 그쪽으로 향했다.

“아.”

그는 그제야 민망한 듯 볼을 긁적였다.

“아드리안은요?”

칼 린드버그는 병사들이 거의 빈사 상태의 무지차 파르만을 묶는 것을 멀거니 보며 아드리안의 상태를 물었다.

“안쪽으로 반쯤 끌려들어 갔다가 간발의 차로 벗어나셨습니다. 아직도 마수들이 판을 치고 있어 이 안으로 들어오시진 못했지만.”

곧 오실 거라고 말하는 주니퍼에게 칼이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이 마정석을 확실하게 깨부수기 전까지 접근하지 말라고 해 주세요. 혹시 모르니까.”

“왕자님.”

원래대로라면 전하께서 먼저 여길 쳐들어오시는 걸 거대한 마물을 절단하느라 못 오는 건데. 두 번씩이나 그를 구해 내지 못하면 전하의 마음이 어떨지.

제발 헤아려 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주니퍼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자 칼 린드버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무지차에게서 거둬 간 마정석을 흔들었다.

“이왕 사고 친 것, 확실하게 수습하고 나갈게요.”

아무래도 아드리안의 화를 풀어 주려면 당분간은 다른 생각 말고 그만 바라봐야 할 테니까. 그러지 말래도 그럴 생각이긴 했다.

“어, 저, 그리고 별로 지금 제 상태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요.”

무슨 말인지 이해한 주니퍼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 같잖은 소리 하지 마, 칼 린드버그.”

서늘한 음성에 칼 린드버그가 정말로 당황하며 마정석을 떨어트렸다.

주니퍼의 뒤에서 아드리안 헤네켄이 살점이 붙은 검을 털며 들어오고 있었다.

* * *

아드리안 헤네켄은 거대한 마물을 상대하는 동안에도 목이 졸리는 칼 린드버그의 모습을 머리에 새겼다.

그가 결계를 직접 뚫고 마물의 등에 검을 박았을 때 마물이 이때다 싶어 급하강하기 시작했다.

나왔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려고 꿈틀거리며 후진할 때 이미 죽은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손이 아드리안 헤네켄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그를 끌고 나락으로 향하려는 것이다.

주니퍼와 버번 백작이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으나 남아 있는 결계에 튕겨져 나갔다.

아드리안은 이대로 마물을 따라 갱도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칼 린드버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될 일이었다.

분노로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하는 와중에 무지차의 몸 아래 무력하게 깔린 칼 린드버그를 보고 나니 더욱더 이성이 마비되었다.

사랑한다며, 함께하자고 맹세해 놓고.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하든 둘이 같이 하기 때문에 든든하다고 말했던 주제에.

질척이고 어두운 감정은 아드리안을 수렁으로 몰았다.

다 죽여. 다 죽이고 칼 린드버그를 되찾아.

제국으로 돌아가면 아드리안 헤네켄 외의 다른 사람, 그의 충실한 심복도, 친우인 벨프리도, 어머니 아버지도, 그가 아끼는 누이와 마녀도 들어오지 못하는 장소를 만들어 그를 가둬 놓을 것이다.

칼 린드버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자줏빛 마정석의 깜빡임을 놓쳤다면 필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아드리안 헤네켄의 목에 걸린 마정석에서 나비가 날아올랐다.

사실 나비가 날아오르는 효과는 그저 변덕과 여흥으로 탄생한 것이었다.

그와 이런 갈등을 겪을 일이 없다 생각했던 시절에, 단순히 그와 어울릴 것 같아서.

아드리안은 그 나비가 칼 린드버그라도 되는 양 거칠게 잡아챘다.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을 거야. 이제 너를 배려하는 일 따위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움켜쥐려는데, 손안에서 나비가 파르르 날개를 떨며 슬퍼했다.

가련하고 애타는 날갯짓이었다.

고통스러운지 몸을 뒤트는 마물 위에서 아드리안 헤네켄은 멈칫했다. 뻗어 나온 손들이 아드리안의 다리를 타고 오르며 그를 옥죄려고 발악을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나비에게서 풍겨 나오는 칼 린드버그의 페로몬이 실어다 주는 다양한 감정과 마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미안함과 고마움, 애정과 무한한 신뢰를 담아.

치열한 전투 중에 갑자기 멈추어 버리는 아드리안의 모습에 버번 백작이 듀벨의 도움을 받아 전광석화처럼 날아올랐다.

“전하!”

아드리안 헤네켄은 나비를 놓아주고 다시 검을 뽑아 세로로 길게 그었다.

아아아아.

비명과 함께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살점이 역겹지가 않았다.

버번 백작의 검기가 결계를 가르고 힘을 보탰다.

그 틈바구니로 성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날아들었다.

성검은 마물의 살을 그슬리고 아드리안 헤네켄을 향해 뻗어지는 또 다른 손을 잘라 냈다.

살생을 하면서도 중얼중얼 기도문을 외는 성기사들의 모습에 병사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비는 혼돈의 한가운데에서 아드리안의 귓가를 맴돌며 속삭였다.

용서해 줘. 그래도 사랑해 줘.

그것은 언어가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칼 린드버그의 감정이었다.

어떻게 할까. 너를 어떻게.

“아드리안 전하! 절대로 갱도로 끌려들어 가서는 안 됩니다. 무지차의 진은 전하의 마력으로 완성되는 겁니다!”

미움과 사랑의 반복으로 혼란스러운 아드리안의 정신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마침 당도한 맥켈런 후작의 외침이었다.

구덩이로 들어가기 직전 몸을 날려 마물의 등에서 내려온 아드리안 헤네켄은 칼 린드버그의 페로몬이 정상 궤도를 찾고 있음을 느꼈다.

믿음의 부재는 두 사람을 바닥으로 추락시키기만 할 뿐이었다. 아드리안은 칼을 믿기로 했다.

아드리안이 검날을 비스듬히 세우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칼 린드버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기 전에 이 녀석을 먼저 끝장내자고.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두 사람은 연결되어 있었다.

“왕자님은 저희가 구하겠습니다.”

맥켈런이 마법으로 방어진을 치고 엄호하는 사이 주니퍼가 성문을 부수고 진입했다.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마수들이 신기하리만치 주춤거리는 것을 확인한 병사들은 왕자의 ‘어떤’ 계획이 다행히 성공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하아.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마라.”

머리를 벅벅 긁고 한숨을 쉰 주니퍼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지금.

아직은 괜찮다고 수십 번 되뇌며 마물을 조각낸 뒤 성안으로 들어선 아드리안의 눈앞에는 새하얀 동공을 한 그의 연인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것은 전투에 대한 것도, 아직 끝맺음 하지 못한 마법에 대한 공포도 아니었다.

아드리안 헤네켄에게 자신의 밑바닥을 보였다는 생각과 그리고 아드리안을 두고 등을 돌려 사라진 자신을 이해해 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두려움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부는 냉풍에 주니퍼가 눈치껏 병사들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선택해. 칼 린드버그.”

아드리안 헤네켄은 성큼성큼 칼 린드버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무엇을 선택하라는 말인가, 칼 린드버그는 공황 상태가 되어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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