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33)화 (133/150)

“무엇을 사과하는 거야. 네가 무슨 마음으로 행동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그래도 한 번은 뒤돌아볼 줄 알았어.”

아드리안의 속마음이란 그런 거였다. 칼 린드버그가 위험으로 자신을 던지는 그 순간에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게 사무쳤다.

마치 너에 대한 미련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다.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의 손을 잡고 다소 거친 몸짓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칼의 상체가 어정쩡하게 아드리안의 허벅지 위로 무너졌다.

볼이 아드리안의 가슴 언저리에 닿은 덕분에 칼은 그의 심장 소리를 여과 없이 들었다.

“소중한 것이 많은 널 이해해서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것도 참았어.”

그래도 아드리안에게 사랑한다 말했으니까. 아드리안에겐 그의 비밀을 털어놓았으니까.

그것만으로 족하다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런데 어떻게 그래? 나를 구하겠다고 등을 돌려? 남아 있는 내 생각을 하긴 했나.”

아드리안은 칼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라고 왜 닿고 싶지 않았겠는가. 열 번의 밤이 있다면 연속하여 안아도 모자란 상대였다.

“도대체 뭐가 너를 그렇게 만드는 거야. 내가 부족한 탓인가. 내 사랑과 믿음이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렸어?”

내키는 대로 하고 싶다며, 결국 또 아드리안에게 스스로를 탓하게 만들어 버린 죄책감에 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내가 자신 없어 그래. 너에 비하면 부족한 사람이라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너와 비등해질 수 없다 여겼나 봐. 그 순간에.”

당치 않는 소리에 아드리안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흐느적거리는 팔로 아드리안을 마주 안았다.

아드리안이 사랑을 속삭이며 질투할 때 그것을 달래기 위한 것이 아닌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을 잃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몸짓이었다.

엉금엉금 기어 아드리안의 허벅지에 온몸을 올리고 아기 원숭이처럼 매달려 그의 목덜미에 미지근한 이마를 붙였다.

“네 마음을 모르겠어. 칼 린드버그.”

물기 어린 아드리안의 말에 칼이 도리질을 했다.

지금 제대로 전하지 못하면 아드리안은 또 불안감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이미 여러 번 주었다.

처음엔 소설 속 스토리 전개 때문에 무작정 사라졌었고 두 번째엔 감히 그의 외도를 상상했고.

아드리안은 늘 그 자리에 같은 마음으로 서 있었는데 오히려 자꾸 갈팡질팡한 건 칼 린드버그였다.

칼이 잠시 숨을 골랐다.

“무모하게 군 것은 사과할게. 널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고 근거 없는 자신감에 충만했었어. 그래서 혹시나 내가 잘못되었을 때 네가 고통스러워할 거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어. 정말로 미안해.”

“…….”

아드리안이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칼은 자신의 약점을 털어놓았다.

빙의자이고, 오메가버스 그런 거 모르고, 여기가 소설이라는 표면적인 이야기는 진작 끝냈지만 ‘전우영’이라는 인간에 대해 속속들이 알려 준 적이 없었다.

“나는, 응. 이렇게 쭉 살았어. 스물일곱 해를 사는 동안 늘.”

그리하여 칼은 전우영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다지 좋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난해도 우리 네 가족, 엄마, 아빠, 여동생. 나. 이렇게 화목한 것이 유일한 자랑거리였는데.”

절친한 친구도, 심지어 여동생인 재영이도 모르는 일들을 그에게 담담히 전했다.

아드리안은 숨을 죽이고 들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 아니지. 8살 때 여동생이 태어났어. 그때 나이가 많았던 어머니가 모진 산고로 고생하셨던 기억이 나.”

원래도 약골이었던 어머니가 하루하루 말라 갔다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드리안은 그걸로 칼이 어째서 황후에게 그토록 극진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무척 사랑하셨는데, 어머니에겐 약간 부족했었나 봐. 어머니는 출산 후에 약을 복용해야 할 만큼 우울해하셨어. 그건 건강이 나빠지자 육아에 힘쓰지 못하는 자신을 혐오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다른 가족들에 대한 증오로 번졌지.”

아드리안으로서는 쉬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는 사랑이 넘치는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자랐고 오히려 그 안에서 짝 없는 자신이 상당히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어머니의 상태는 이틀 좋고, 하루 나쁘고 그랬는데, 기분이 좋을 때는 더없이 따뜻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행복했었어.”

칼 린드버그의 행복은 무조건 과거형이었다.

“동생이 7살, 내가 열넷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동생의 눈앞에서 자신을 죽이길 택했고 아버지는 따라가셨지.”

아드리안이 칼 린드버그를 제 몸에서 떼어 냈다. 얼굴을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칼 린드버그는 잔잔히 웃었다.

“동생은 충격으로 모든 기억을 잃었고 나는 혼자 수습했지. 부고를 전할 때도 경찰과 함께 사망신고를 할 때도 전부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고 말했어. 부모가 자식을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이런저런 추문에 휩싸일 게 분명했거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밖에 없더라고.”

비참하고 초라한 과거사였다.

칼 린드버그는 눈물이 차서 방울방울 흐르는데 닦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

예상보다 더 무거운 이야기에 아드리안이 한숨을 토했다.

“내가 내 멋대로 살잖아? 그럼 나는 매일 울면서 부모를 원망하는 것밖에 할 수 없더라. 그럼 아무것도 모르는 내 동생까지 상처받겠지. 그래서 웃었어. 구김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씩씩해 보이려고.”

어린애에게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었는데, 우중충하고 쳐져 있는 아이를 도우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한겨울 찬물에 손이 얼어도 교복 깃은 깨끗하게 빨아 유지했다. 매일 머리를 감고 양치도 열심히 했다.

과거가 처참할지언정 방긋방긋 웃으며 살갑게 굴어야 사람들은 비로소 마음을 열고 다가왔다.

전우영은 그렇게 그린 것처럼 착하고 바른 아이에서 솔직하지 못한 어른이 되었다.

“우울한 이야기지? 그런데 마음에 담아 두진 마. 그냥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봐, 이런 나라도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희미한 목소리로 간신히 끝맺음 한 칼 린드버그가 소매로 눈물을 닦아 냈다.

아드리안은 이제 칼 린드버그를 동정하게 될 것이다.

칼 린드버그의 과거를 건들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살아가겠지.

아, 최악의 시나리오다. 칼이 고개를 수그렸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비참한 서사는 상당히 좋은 소재였지만 그게 현실인 경우에는 좀 달랐다.

편견과 조롱, 동정의 발판이 되어 쉽게 오해를 샀다. 칼 린드버그는 그래서 가능하면 숨기고 싶었다.

“고개 들어.”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의 턱을 잡았으나 그는 진저리 치며 땅을 봤다. 초라하고 쪽팔려서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가끔씩은, 혹시 내가 네게 안 좋은 물을 들일까 걱정해. 너는 무려 황태자니까.”

그리고 주인공이잖아. 내가 활약하지 않으면 나는 무엇으로 네 곁에 설 수 있어?

“네 우위에 서고 싶었던 게 아니라, 가끔은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충동에 나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곤 해. 그렇지만, 이젠 그러지 않을 거야.”

“정말이야.” 하고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칼에게 아드리안이 절박하게 말했다.

“칼 린드버그, 제발, 고개를 들어.”

아드리안이 이를 갈았다. 기를 쓰고 시선을 피하는 칼 린드버그의 양 볼을 붙들었지만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사과할게. 그런데, 진짜로 나는…… 네가 좋아. 내가 바라는 거 다 가진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니까 감지덕지하지. 듣고 잊어버려 줘. 동정하지도 말아 줘. 그는 죽었어. 전우영은, 죽었어.”

네 앞에 있는 건 칼 린드버그야. 그러니까 제발.

계속 그렇게 사랑해 달라며 칼 린드버그가 눈물을 쏟았고 아드리안은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칼 린드버그, 눈 떠. 괜찮아. 응?”

아드리안이 칼 린드버그를 달래며 함께 울었다.

칼은 아직도 채 돌아오지 않은 마력과 약 기운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프잖아, 칼. 제발.”

아드리안은 자꾸 자신의 입술을 깨무는 칼의 잇새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칼이 도리질을 치며 매달렸다. 아까보다 더 부드러운 동작으로 그를 안아 올린 아드리안은 제 어깨가 축축이 젖는 감각에 흐느꼈다.

이렇게까지 그의 속을 헤집을까 봐 피했던 것도 있었는데.

“아드리안, 미안해.”

사과하면서 칼은 아드리안에게 자신을 아직도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사과하지 마. 응? 괜찮으니 더는 사과하지 말아. 충분해.”

아직도가 뭐야. 단 한 번도 너를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노라고 아드리안은 대답했다.

칼 린드버그의 진심은 놀라울 만치 처량했다.

아드리안은 그의 이마를 덮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이마에 연거푸 작은 키스를 했다.

아드리안이 원하는 것은 칼 린드버그가 자신 없이는 살 수 없게 되는 것. 그래서 자신을 두고 한눈팔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무조건적인 아드리안의 애정에 눈이 멀어 고립시킬 필요 없이 스스로 그의 곁에 붙어 있길 바란 것이지, 구걸하듯 애정을 달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참담한 심경을 감추지 못한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의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입술로 훔쳤다.

짭짤하고 단 눈물에 혀가 베이는 것처럼 아팠다.

우습게도 아드리안 헤네켄은 칼 린드버그에 비하면 곱게 자란 편에 속했다. 그의 아픔과 결핍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칼 린드버그의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아드리안의 것이었기 때문에 단 한 가지는 자신할 수 있었다.

“이제는 아플 일 없을 거야. 내가 더 잘할게.”

“아냐, 내가 더 잘할게. 아드리안.”

이불에 감싸인 칼이 킁, 하고 콧물을 삼켰다.

부둥켜안은 두 사람이 마주 보며 “네가”, “아니, 내가.” 하며 서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칼의 이마에 뜨끈하게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의 손이 그의 이마를 짚었다.

“이전의 인생을 잊으라 강요하지 않겠지만, 칼. 함께 극복하자. 그건 괜찮지?”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은 참으로 모질지 못했다. 모질게 대하기에는 그는 칼 린드버그를 너무 사랑했다.

칼 린드버그는 반성했다. 자신을 내던져 가며 그를 아끼는 방법을 찾는 것보다는 그가 바라는 대로 그 하나만 바라보며 동시에 그를 위해 자기 자신을 아낄 것을 다짐했다.

두 사람은 저녁을 거르고 지친 칼이 먼저 잠에 빠져들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우영의 아픈 이야기 대신, 그의 부모와 여동생과의 좋았던 추억을 뒤적여 찾아내었다. 그 와중에 아드리안은 마녀가 칼의 여동생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숨겼다는 걸 미안해하는 칼에게 아드리안은 말했다.

“죽은 사람은 평생 이길 수 없지만, 산 사람은 다르지. 네가 나를 그녀보다 소중하게 여기도록 노력할 거야.”

손등에 입을 맞추며 가슴을 도닥이는 아드리안의 손길에 눈을 깜빡이며 칼이 생각했다.

‘나한테는 이미 네가 최우선인데.’

여명이 트고 새 아침이 밝도록 두 사람이 틈 없이 밀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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