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너 무슨 일 있었니. 아드리안?”
황후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연신 아드리안의 얼굴을 살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뒷짐을 진 아드리안이 태연하게 대답했으나 황제는 대놓고 혀를 찼다.
“아무 일도 없기는. 네 어머니가 모처럼 잘난 얼굴로 낳아 줬건만 지금은 영 보기 좋지 않구나.”
아드리안은 입술을 비죽 올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날고 기는 알파에 황태자라지만 별수 없는 인간이었던지라 밤새 울고 나니 눈이 불어 터졌다.
“저기 연못에 사는 붕어가 오늘은 더 잘생겼어.”
“무슨 말씀을 그리하시는 거예요. 얘, 괜찮다. 아직은 네가 더 잘생겼어.”
황제 부처는 퉁퉁 부은 아들의 얼굴을 감상하며 신나게 입방아를 찧었다.
칼 린드버그가 돌아온 지 사흘. 큰일을 겪고 난 뒤라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해서 두 사람은 가만히 있었지만 느지막이 등청한 아드리안이 더없이 홀가분해 보여 기뻤다.
최근 이틀은 얼굴만 내밀었다 하면 죽상이었기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까.
아드리안이 왜 죽상이었는지 모르지 않았다.
칼 린드버그가 혼자 무지차를 상대했다는 소식은 결국 황후의 귀에도 들어갔고 그날 밤 황후의 배가 뭉쳤다.
황제는 칼 린드버그의 볼기짝을 때려 주어야 한다며 길길이 날뛰었고 황후는 그런 남편을 달랬다.
“그래서, 칼 그 아이는 언제 회복되느냐.”
한참 웃고 떠든 글렌이 표정을 달리하여 아드리안에게 물었다.
“글쎄요. 꼬박 한 주는 안정을 더 취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딘가 의뭉스러운 태도에 테레자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영원히 그 상태로 두려는 것은 아니지?”
정곡을 찔린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치료를 서둘러 봐야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최대한 천천히 회복하도록 조치했을 뿐입니다.”
황제는 팔짱을 끼고 발을 묶어 버려야 한다고 일갈했고 그의 등짝을 때린 황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천히 회복하는 것도 좋다만, 그동안 아예 운신을 못 하게 할 것은 아니지?”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절대안정이라고 의원이…….”
또 고개를 저리 돌리며 황후의 눈을 피한다. 아주 익숙한 상황에 황후가 웃지도 못하고 “아드리안, 얘야.” 하고 불렀다.
글렌 황제가 박수를 치며 황태자의 등을 떠밀었다.
“그냥 문 잠가 버려. 눈 맞은 똥강아지처럼 돌아다니다 또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아시다시피 그는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마음에 병이 생깁니다.”
정말 칼의 발을 묶어 놓을 수 없는 제 처지가 안타깝다는 듯 아드리안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아, 뭐 영원히 못 만난다더냐? 한 1, 2년만 문 잠가 보아라. 세상이 무서워서 선뜻 나서지도 않을 테니. 인간은 그런 존재……!”
팔은 안쪽으로 굽는다고, 같은 알파로서 아드리안의 고통에 공감하는 황제가 신나게 추임새를 넣었다. 이내 황후의 활활 타오르는 눈빛에 한쪽 뺨이 뜨끈하여 입을 다물긴 했지만.
황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드리안, 어미가 간곡히 부탁할 테니. 황성 안에서라도 그 아이를 자유롭게 해 주어요. 정 안 되면 내 얼굴이라도 보게 해 주거나.”
“…….”
아드리안은 차마 안 된다는 말은 못 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칼 린드버그도 슬슬 좀이 쑤실 텐데, 아드리안은 아직 자신이 없었다. 그를 이해하는 것과 그가 돌아서는 장면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별개였다.
만에 하나, 백만의 하나라도.
“아드리안, 그 애에게 의향을 물어 줘요. 어미가 만나러 가도 되겠느냐고.”
글렌 황제 못지않게 황후에게 약한 아드리안이 떨떠름하다는 얼굴을 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이 자리를 떠난 후 글렌은 기다렸다는 듯 황후를 안아 올렸다.
“어째서 그 아이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이오?”
“위로하고 싶어서요.”
그녀는 칼 린드버그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부모가 없는 그 아이가 단 하나뿐인 짝과 반목하는 동안 얼마나 외로웠을지 걱정이 되었다.
“위로는 무슨, 단단히 혼을 내 주어야지.”
세상천지 분간 못 하고 부모를 걱정시키다니, 쯧.
글렌이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테레자는 알았다. 그가 은근히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며 마음 졸였다는 것을.
지금의 툴툴거림도 그 반동이리라.
“여보.”
“왜요.”
황후를 데리고 침실로 향하면서 글렌이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칼을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그 아이는 분명 무엇이든 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데 익숙한 탓에 그랬을 거예요.”
황후가 남편의 가슴에 기댔다.
칼 린드버그. 그는 부모가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였다.
린드버그 국왕 부처가 어떠했는지 테레자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현 황제인 글렌은 린드버그와 척을 지다시피 했지만 그에 대한 소식은 계속 들었다.
그들이 린드버그 남매를 양육하는 방식은 실로 학대에 가까웠다.
애정은 없고, 쓸모로 자식을 구분하여 하나는 홀대하고 하나는 버르장머리 없이 키웠다.
다행히 중간에 칼이 기억을 잃어서 망정이지 그대로 갔다간 그의 인생이 말미에 반드시 추락할 수밖에 없는 길뿐일 거라는 것은 너무나도 뻔했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라 그랬을까. 황후의 눈에는 칼의 부족함과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아등바등하는 그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잡초라고 할지라도 씨앗에서 나와 뿌리 내리는 것, 정원에 핀 꽃은 그늘막을 치고 때에 따라 물도 주어 가며 키우지만, 그 애는 뿌리내릴 땅부터 직접 정해야 했어요. 필사적으로 살지 않으면 말라 버리는 가녀린 뿌리를 가지고요. 나는 그게 못내 안타깝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지 않으냐고.
어차피 가족이 될 건데 우리가 그의 방패가 되어 주어야지, 다 자란 아이에게 회초리를 먼저 들 것이냐 묻는 황후에게 글렌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글렌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모진 풍파를 견뎌 내려 자세를 낮추는 칼의 모습은 위태로웠지만, 그가 꼿꼿이 설 때는 반드시 지키고 싶은 것이 그 뒤에 있었다는 것을.
“좋은 아이예요. 나는 그 아이가 바라는 게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내민 손을 잡는 것보다 먼저 손 내미는 법을 배우길 바라요.”
황후는 양팔을 벌려 남편을 크게 끌어안았다.
배가 눌리며 얌전히 있던 아이가 폴짝 뛰었다. 그 때문에 기쁘게 포옹을 하던 황후가 배를 잡느라고 포옹을 멈추었다.
글렌이 이마를 찌푸리고 황후의 배를 향해 눈을 흘겼다.
“이 녀석은 꼭 방해를 한단 말이야.”
말투는 그래도 황후의 배를 쓰다듬는 손길이 상냥하다.
글렌의 소중한 두 번째 아기는 곧 세상 빛을 본다. 사랑스러운 아이의 탄생은 모든 이의 찬탄 아래 이루어질 텐데. 칼 린드버그. 그 아이의 삶은 어땠을까.
한때는 그 애가 얄밉고 막말로 재수 없었지. 하나 돌이켜 보니 그 애도 나름대로 울타리가 없는 삶을 사느라 불안했을 게다.
그래서 그 아이의 변화에 내심 기대했고 시시각각 성장하는 그 애를 보며 기뻤던 것도 사실이었다.
글렌은 배 속 아기와 인사를 나누듯 손장난을 치고 황후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이기겠소. 우리가 그의 바람막이가 되어 줍시다.”
“역시, 당신뿐이에요.”
글렌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사는 동안 한 백 번은 들었던 “당신뿐이에요.”라는 말 덕분이었다.
* * *
칼 린드버그는 죄인이 된 심정으로 황후와 마주 앉았다.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대던 칼의 등을 아드리안이 쓰다듬었다.
황후의 칭찬을 배부르게 들어 기분이 좋아진 황제는 아들을 닦달했다. 아내의 속앓이가 길어지는 것이 우려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드리안이 칼에게 황후를 만나고 싶냐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저녁에 친히 방문한 테레자는 칼의 부어오른 손목을 보며 연신 혀를 찼다.
“이래도 뼈가 부러진 것이 아닌가?”
“탈골된 것을 억지로 접합한 뒤 적당한 부목을 대질 못해서 그렇습니다.”
아드리안의 설명에 황후가 울상이 되자 칼은 모양에 비해 통증은 적은 편이라 덧붙이며 황후를 달랬다.
황후가 칼의 전신을 구석구석 살폈다.
눈과 코가 빨간 것은 아마 제 아들과 같은 이유일 테고 입술이 부어오른 것은…….
황후의 날카로운 눈이 아드리안을 향했고 그는 괜히 칼 린드버그의 옷깃을 여미며 딴청을 피웠다.
아픈 아이에게 무엇을 한 거냐.
날이 갈수록 제 아비를 닮아 가는구나.
황후의 서슬 퍼런 눈빛에 안절부절못하던 칼이 먼저 운을 뗐다.
“저어, 황후 폐하. 몸은 좀 어떠신지요?”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첫 출산처럼 설렌답니다.”
황후가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들겼다.
망설이던 칼이 테레자의 옆으로 옮겨 앉았다.
“만져 볼래요?”
바지에 손을 쓱쓱 닦고 테레자의 배에 올린 칼이 경이에 찬 표정을 지었다.
“앗, 움직인다.”
출산이 임박한 터라 전처럼 격하지는 않지만 배 속에서 아기가 배를 콩콩 두들기는 듯했다. 칼의 손길을 반기는 듯 손을 따라 섬세히 움직이기도 했다.
“제 형과 형수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드리안과 칼의 목소리를 들으면 잠에서 깨어 놀자고 말하는 것 같거든요.”
테레자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함께 태동을 느끼자는 것처럼 칼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아드리안의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따듯하고 매끄러운 손이 칼의 손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무언의 위로에 칼은 참을 수 없어 테레자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폐하. 하마터면 제가 아드리안을.”
다치게 할 뻔했어요. 칼이 자신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칼, 사과하지 말아요.”
아드리안이 칼을 만류하고자 입을 벌렸으나 테레자가 한발 앞섰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대는 아드리안과 주변 사람들 대신 자신을 희생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아드리안은 칼이 잘못될까 화부터 냈겠지만, 어차피 잘 해결됐잖아요. 나한테까지 사과할 필요 없어요.”
테레자는 칼이 궁금해서 여기 왔다. 그가 괜찮은가 다독이러 온 것이지 사과받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드님을.”
완벽한 핏줄과 흠 없는 명예. 끈끈한 가족애.
이들과 칼은 섞일 수 있나. 뒤늦게 두려움이 번졌다.
무늬만 왕자. 심지어 세계관에 대한 이해도 떨어지는 이방인. 약해진 칼 린드버그의 가슴에 거센 파도가 쳤다.
바닥이 드러나면 부서지는 모래성이 아닐까.
조마조마한 모습을 보이는 칼에게 테레자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나는 칼 린드버그, 당신을 걱정하고 있는데 왜 그대는 다른 생각을 해요? 칼도 내 아들이나 다름없는데, 그댄 내가 아드리안의 모후로만 보입니까?”
서운한 듯 말꼬리를 늘려도 황후는 황후. 위엄이 서린 말투에 칼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그런데 왜 사과해요. 내가 그대를 질책이라도 해야 하나. 칼이 다쳐 왔다고 그대 눈앞에서 아드리안을 다그치는 것과 무어가 다른가요?”
일정한 박자로 손등을 두드리며 하는 말에 칼의 마음속 풍랑이 가라앉았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테레자가 소녀처럼 빙그레 미소 지었다.
“무섭고 아팠을 텐데 잘 버텨 줘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칼 린드버그.”
결국 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울보가 따로 없네. 테레자가 장난스럽게 칼 린드버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틋해 보이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아드리안은 황태자로서의 체면을 뒤로하고 합세하길 택했다.
한 소파에 나란히 줄지어 앉아 황후의 배에 손을 겹쳐 올리고 부둥켜안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때맞춰 들어온 시종이 함박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