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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35)화 (135/150)

린드버그 왕성에 모처럼 훈풍이 불며 활기가 넘쳤다. 서슬 퍼런 기세로 헤네켄에 갔던 왕자와 황태자가 다시 돌아온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봤냐? 어떻게 일주일을 못 가냐.”

한바탕 일 치르고 애라도 만들 줄 알았더니 고작 며칠 만에 다시 온다고 루루가 구시렁거렸다.

왕성 시녀들을 따라 커튼을 바꾸는 일에 손을 보태고 있던 마르코가 휙휙 손을 저었다.

“빈정거릴 거면 저기로 가 줄래?”

루루는 체, 하고 혀를 찼다.

아까부터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빙빙 제 주위를 맴도는 루루가 솔직히 성가셨다. 마르코는 루루의 코앞에서 일부러 먼지를 탈탈 털었다.

“엣취! 아, 뭐야?”

“심심하면 일이라도 거들어. 황후 폐하 출산 때문에 얼마 안 계시다가 도로 가신다는데. 그때는 우리도 따라가야 하잖아.”

그때는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바뀔 것인가.

헤네켄에서 임시 파견으로 왔던 사람들도 다시 돌아갈 예정이라 새로운 사람들이 교육받고 채워지는 시간 동안은 이 성의 구석구석 손을 볼 수 있는 인력도 없을 것이다.

“아, 알았다고.”

마르코의 잔소리에 주변 사용인들의 따가운 눈초리까지 더해지자 루루가 어깨를 움츠렸다.

평소에는 당하기만 했던 터라 오랜만에 기세가 꺾인 모습에 마르코가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루루는 그나마 얼굴이 익숙한 시녀들 옆에서 오래된 커튼을 내리며 주변을 살폈다.

마르코뿐만 아니라 기사와 병사들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새 단장에 힘을 모았다.

이번에 헤네켄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칼 린드버그는 이제 린드버그 왕성에 올 일이 드물어진다. 드물 뿐이랴, 마지막이라 봐도 무방했다.

아무리 그가 누이와 각별하다고 하여도 제국의 황태자비가 사사로이 왕국을 방문할 필요가 없고 일이 있다면 레아 공주가 제국으로 가는 것이 이치에도 맞았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린드버그 왕성에서 즐거웠던 기억이라곤 없었던 왕자에게 마지막으로 좋은 인상을 하나라도 심어 주고 싶었던 사용인들의 마음이 한데 모였다.

청소와 빨래는 평소에도 하는 것이었지만 그 외의 일들은 오랜만이어서 다들 신이 났다.

‘역시 애사심은 복지에서 나온다니까.’

늘어난 일이 번거로울 만도 한데 되레 생기가 넘치는 사용인들을 보며 루루가 한 생각이다.

물론 그 외에도 개인적인 충성심이나 왕자에 대한 애정도 있겠지만.

펄럭.

루루와 마르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칙칙한 자줏빛의 두꺼운 암막 커튼이 사라지고 새 커튼이 쏟아져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예쁘다!”

루루가 작게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끝단에 섬세한 레이스 무늬가 있는 속 커튼이 차라라 흘러내렸다. 그 겉은 프림로즈와 그리너리의 광택이 없는 천으로 제작하여 대신 주름을 크게 잡았다.

“훨씬 가벼운 재질이네요? 화사하긴 하지만 금방 헤지고 더러워질 텐데.”

루루의 중얼거림에 다른 시종이 대답했다.

“두꺼우면 빠는 데 쓸데없이 힘들기만 하다고 재질은 공주님께서 직접 고르셨어요. 커튼이 무거우면 교체할 때도 사람이 두셋은 더 달라붙어야 하니 효율적이지 않긴 하죠.”

레아 린드버그는 의외로 많은 것을 세세히 고려하고 있었다.

“가능한 한 오래 청결히 유지해 두고 헤지면 새로 제작하는 편이 좋을 것 같으시대요.”

참으로 속이 깊다고 말하며 시녀가 손을 모았다.

“게다가 이 색상은 벨프리 공자께서 고르셨답니다. 새 공왕의 페로몬이 레몬 나무를 연상시킨다 하시면서.”

우리 같은 베타들은 모르지만 어쩐지 공주님의 외관과도 잘 어울린다며 사용인들이 입을 모았다.

루루도 함께 손을 맞잡았다가, 벨프리를 생각하며 얼떨떨하게 풀어 내려놓았다.

레아 린드버그와 벨프리의 외모 궁합은 상당히 잘 맞았지만 그 둘이 진짜 짝이 되기에는 우여곡절이 많을 것이다.

“그놈의 짝사랑들 때문인데.”

루루가 손톱을 깨물었다.

“뭐?”

마르코가 의아하다는 듯 시선을 보냈다.

새 공국의 문양을 지닌 커튼을 감상하느라 잠시 멈추었던 사용인들은 다시 분주하게 몸을 놀렸다.

섬세한 작업에 서툰 손길은 도움이 안 된다고 누군가 잔소리를 했다.

그 때문에 마르코와 루루는 낡은 커튼을 어깨에 얹은 기사단과 함께 건물을 나섰다.

맑게 갠 하늘 아래에 본관의 재건이 한창이었다.

외관의 보수를 마치고 내부 공사에 돌입한 그곳에 벨프리 헨드릭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또 나와 계시는군요.”

젊은 기사가 그를 보며 중얼거리자 나이 많은 기사는 혀를 차며 한숨을 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쉬우신 게야.”

린드와이어 제국부터 린드버그 왕국까지 이어진 유구한 역사의 본성은 이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위는 플랫하게 옥상으로 만들고 층고도 낮추었다. 쓸데없이 많은 연회장의 개수를 줄이고 그 자리는 고위 기사들이나 각계각층, 각 분야의 선생들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배움을 나누는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고개를 한껏 젖히고 벨프리가 바라보는 것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첨탑이었다.

그 시선이 어찌나 아련한지 전생에 린드버그 왕국의 버려진 왕자라도 되는 줄 알았다.

“다른 나랏일인데도 그렇습니까?”

“공자님은 원래부터 유서 깊은 건물이 소실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신다. 그게 우리나라든 남의 나라든 말이야.”

선배 기사의 말에 젊은 기사는 주변 눈치를 보고는 짓궂게 웃었다.

“앞으로 자신이 머물지 모를 곳이라 그런 것은 아닙니까?”

“뭣이라?”

언성을 높이는 선배 때문에 누가 들을까 두렵다며 기사가 입술에 손을 올렸다.

루루와 마르코는 저도 모르게 발을 재게 놀려 두 사람 뒤에 바짝 붙었다.

“레아 공주님이 벨프리 공자님을 짝으로 점찍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이렇게 바쁘고 정신없는데 매일 붙어 계시는 것만 봐도 그렇지요. 다른 이들이 말하기를 두 분 시선에서 꿀물이 줄줄 흐른답니다.”

나이 많은 기사가 어린 기사의 머리를 살짝 때렸다.

“예끼! 공자님이 어떻게 공왕비가 되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게야.”

“아니, 둘이 사랑하는데 폐하 허락이 어디 필요합니까? 공자님은 심지어 삼남이신데.”

철없는 소리를 하는 젊은 기사의 말에 선배 기사가 연신 혀를 찼다.

“삼남일지라 하더라도 황태자 전하의 최측근이시다. 그런 분을 소국의 공왕비로 보내면 순식간에 큰 자리 하나가 비어 버리잖냐.”

“아, 저런.”

루루는 귀를 쫑긋 세웠다. 최애의 연애만큼 중요한 차애의 연애사다.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우성의 오메가가 되었으니 당장 귀족 사회에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일 거고, 더 중요한 것은 공국을 재건하느라 가뜩이나 바쁜 레아 린드버그가 그것을 전부 감수하며 벨프리 공자님을 원할지도 의문이라는 거야.”

“저는 평민 출신이라 자세한 것은 몰랐지만, 귀족 나리들은 참으로 복잡하게 사는군요.”

“그것이 당연하지. 무게가 다른 혼인이야. 형질자의 결합은 더욱 그렇고.”

안타까운 일이라며 기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벨프리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그가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곳에는 레아 린드버그 공주와 아일라 레바 공주가 있었다.

레아의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는 아일라의 얼굴이 한눈에 봐도 불긋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차라리 저 두 분이 혼인하는 것이 이상적일 테지. 레바의 국왕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이야.”

기사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앞서 사라지고 마르코와 루루는 그 자리에 섰다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아일라 공주님은 언제까지 여기 계신다니?”

“글쎄? 급한 불은 껐으니 레바 왕국에서 연락을 취할 법도 한데……. 뭉그적거리는 폼이 수상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

“흐음.”

루루가 팔짱을 꼈다.

“여기서 더 복잡한 일이 생기는 건 질색인데.”

메인 커플 고구마 가고 서브 커플 고구마 온다? 당장 드롭 각이다.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루루의 어깨를 마르코가 톡톡 쳤다.

“뭐 어떻게 되지 않을까? 레아 공주님의 표정을 좀 봐.”

“에엥?”

마르코가 은밀한 손짓으로 정원을 가리켰다.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아일라와 달리 심드렁하다는 얼굴을 한 레아가 벨프리를 보며 잔잔히 웃고 있었던 것이다.

풍파를 많이 겪어 약간 수척한 얼굴이 벨프리를 볼 때면 생화처럼 피어났다.

잠시 멀뚱히 눈을 마주치던 벨프리가 뒤늦게 몸을 돌렸다. 그의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알아서 잘하시겠지. 우리는 왕자님 상태나 신경 쓰자고.”

어깨를 으쓱 올린 마르코가 루루의 손목을 덥석 잡아끌었다.

그래, 뭐. 알아서 하겠지. 루루가 끼어들어도 될 놈 될, 안될 놈 안됨이다.

루루가 자리를 떠남과 동시에 레아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벨프리에게 향했다.

* * *

“마차를 타고 들어가자고?”

완벽한 옷매무새에 실망한 칼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아드리안이 냉큼 넥타이를 흐트러뜨렸다.

그제야 화색이 돈 칼이 다시 아드리안의 넥타이를 손수 매어 주는 동안, 그가 한 말이었다.

“그래. 너도 궁금할 것 같아서. 린드버그 왕국의 변화나 너에 대한 시선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이야.”

“물론 궁금하기야 하지만, 시간적으로 여유가 되나?”

칼 린드버그는 이번엔 자신의 목을 쭉 당겼다.

아드리안은 그의 턱에 입을 맞추며 자신의 것보다 조금 더 넓고 풍성한 주름을 지닌 크라바트를 둘러 주었다.

“왕성 안쪽에서만 마차로 이동할 거니까 시간은 충분해.”

“그럼, 나야 감사하지.”

두 사람의 신성한 아침 의식이 끝났다.

통통한 입술에 쪽 소리 나도록 키스를 한 아드리안이 빙긋 웃었고 칼 린드버그는 새삼스럽게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서로의 목에 타이를 해 주는 시간은 장난처럼 시작되었다.

칼 린드버그는 의외로 다양한 방법의 타이 매는 법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제법 뿌듯하게 생각했다.

아주 가까이서 그의 숨결을 느끼며 깨끗한 이마를 감상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 시간을 고착시킨 것은 아드리안이었다.

“궁금했지?”

아드리안은 기껏 차려입은 옷이 구겨지도록 칼을 힘껏 끌어안았다.

“응. 엄청. 린드버그에 사는 동안엔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내 눈으로 보기도 힘들었으니까.”

사실은 두려웠다. 가난과 온갖 부조리를 직접 마주하는 것이.

아드리안의 넓은 가슴에 안겨서 쓰게 웃은 칼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명색이 왕자인데, 뭐 한 개라도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있어야지.”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겠다는 말에 아드리안은 “진짜 왕자도 아니면서.”라고 짐짓 장난스레 말했다.

칼이 흐흐, 하고 이상하게 웃었고 아드리안은 그의 코를 잡아당겼다.

잠깐 서먹했지만 지금은 더할 나위 없었다.

아드리안이 섣불리 동정하거나, 칼 린드버그가 아닌 자신을 은연중에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고마운 마음이 풍선처럼 쌓인 칼은 요즘 훨훨 나는 것만 같았다.

“네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너는 내게 왔을까?”

시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장난을 멈추고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한 아드리안이 물었다.

칼은 잠깐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그래도 가지 않았을까? 내 동생 유언이 ‘아드리안 헤네켄이 연인과 행복한 모습을 보게 해 주세요.’였으니까.”

한 번쯤은 만나러 갔을 거라고 칼은 장담하며 아드리안의 손을 잡았다.

아드리안은 칼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이번에 만나면 아주 큰 상을 내려야지.’

아드리안은 처음으로 마녀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그녀 덕에 아드리안은 칼의 마음속 주인공으로 처음부터 자리매김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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