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린드버그 왕국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시켜 주고 싶었던 아드리안의 다정한 마음이 7할, 그리고 남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양껏 애정 표현을 하려는 흑심이 3할 정도 있었다.
말랑한 손을 잡고, 겸사겸사 부드러운 입술도 훔치는 일. 혹은 전생의 칼 린드버그에 대한 궁금증이나 앞으로의 미래 같은 것들을 나누는 것 말이다.
그러나 뜻밖의 방해꾼으로 인해 아드리안의 꿈은 와장창 깨어지고 말았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험프리 제도인데, 건조한 날씨와 높은 하늘, 바다와 맞닿아 있는 사막이 유명한 곳이야.”
“와아.”
널찍한 마차 내부에 다리를 척 꼬고 앉은 발베니 대공이 지도를 펼쳤다.
“음식이 비교적 맵고 자극적인 게 흠이지만, 풍경이 모든 걸 상쇄해 준다고 해야 할까.”
칼 린드버그의 눈이 더없이 반짝반짝 빛났다.
마법진을 통과한 발베니가 뜬금없이 마차를 얻어 타겠다 했을 때 어색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저는 매운 것 잘 먹어요!”
“호오, 그러하냐? 그렇다면 염소 고기에 향신료를 듬뿍 넣고 끓인 스튜를 추천하지.”
“스튜!”
벌써 침이 고인다며 오두방정 떠는 칼 린드버그의 머리꼭지를 발베니가 흐뭇하게 내려다보았다.
전 대륙을 아우르고 가끔 배를 타고 바다를 가로지르기도 하는 발베니 대공의 모험기에 푹 빠진 칼은 잠시 아드리안의 존재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아드리안은 팔짱을 끼고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랬다.
“또, 또 어디 가 보셨어요?”
“가만 보자……. 아, 그래. 그대가 쌀로 만든 음식을 좋아한다고 들었으니 여기, 중부에 걸리라는 곳이 쌀로는 아주 유명해.”
탐탁지 않은 티가 팍팍 나는 아드리안의 심기를 눈치챈 발베니는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발베니가 마차에 올라탈 때부터 이마가 이만큼 찌그러져 있는 주제에 제 짝이 이렇게 신나 하니 뭐라 하지도 못하고 앓는다.
비죽 웃음이 나오려는 걸 헛기침으로 감추었다.
헨드릭 공작 외의 다른 이에겐 별 관심이 없는 대공이었지만 조카를 살살 약 올리는 재미는 별개였다.
커다란 강이 가로지르는 중부 곡창지대를 가리키는 손길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떡하니 쓰여 있는 익숙한 이름에 칼 린드버그가 숨을 삼켰다.
“거, 걸리요?”
“응, 이름은 독특하지만 쌀로 빚어낸 술이 아주 유명하다던데. 점도가 있는 쌀에 누룩을 첨가해서…….”
그것이 ‘막걸리’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진짜 있으니까 어이가 없어진 칼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대박.”
이러다 김치랑 소주도 나오는 거 아냐?
그러면 진짜 좋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대박 소리에 아드리안과 발베니가 동시에 “응?” 하고 되물었다.
“아닙니다. 아, 혹시 수출입은 안 한답니까? 꼭 마셔 보고 싶어요.”
“몇 병 구해다 줄까?”
“완전 감사하죠!”
“안 돼, 허락해 주지 마세요. 숙부.”
술도 잘 못하면서 술 얘기만 나오면 들뜨는 칼에게 아드리안이 엄포를 놓았다.
왜냐는 질문을 하려던 칼은 금세 풀이 죽었다. 생각해 보니 그에겐 전과가 있었다. 하마터면 술독에 빠져 죽을 뻔한 전과가.
시무룩한 표정에 발베니가 혀를 끌끌 차고 아드리안에게 말했다.
“네 옆에서 맛만 보게 하면 되잖느냐.”
아드리안이 한숨을 쉬었다. 그도 아예 금주를 시키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아직도 술 생각만 하면 와인 범벅의 그 욕조와 심장이 떨어지던 감각이 생생했다.
“으응, 진짜 맛만 볼게. 궁금해서 그래. 쌀로 막 만든 ‘막걸리’라니, 신기하잖아.”
“술도 배워야 는다니까, 자꾸 못 먹게 해 봐야 나중에 샴페인 마시고도 취해 버려.”
그렁그렁한 눈으로 손을 모으는 칼 린드버그에 덤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여흥을 위해 곁들이는 술에도 취하면 큰일이라며 잔소리를 하는 발베니를 번갈아 보며 아드리안은 이마를 짚었다.
순간 아드리안의 머릿속에 전생의 칼 린드버그가 그려졌다.
그땐 검은 머리, 검은 눈. 밋밋한 외모였다고 했다. 밋밋한 외모라는 게 도통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귀여울 터였다.
“너랑 같이 나눠 마시고 싶어. 응? 같이 마시자.”
칼이 저를 올려다보는 표정에 아드리안의 팔뚝에 핏줄이 불툭 섰다.
동그랗고 하얀 오목눈이 한 마리가 술을 담은 오크 통을 찾아다닌다. 그러다가 술에 취해 제멋대로 해롱거리며 자신의 외로움을 토로하고, 그 모습에 사랑스러움을 느낀 누군가 그의 아이를 낳아 주었을지도. 다정하고 외로운 칼 린드버그는 제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는 좋은 아버지가 되었겠지.
아 열받아.
실상은 그저 그런 남자가 삶에 찌들어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아드리안의 속이 완전히 뒤집혔다.
“너 하는 것 봐서.”
제멋대로 한 망상에 대차게 삐친 아드리안이 불퉁하게 말했다.
갑자기 기분이 상해 버린 아드리안을 보며 칼이 어리둥절해하자 발베니가 허허허, 하고 웃었다.
‘핏줄은 속여도 형질은 못 속인다더니.’
짝이 생기면 하루에도 수십 번 질투에 휩싸이고 마는 망할 본능은 자기 자신을 좀먹는다.
발베니는 가족이 될 두 사람이 사건·사고를 만나는 것 대신 좀 더 평범한 추억을 쌓기를 바랐다. 소소할지라도 경험을 나누면서 가슴에 있는 벽을 모조리 허무는 방법 같은 것들을.
황태자와 왕자. 신분이 신분인지라 평범하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는 해도 말이다.
“칼 린드버그, 아드리안 헤네켄. 황후께서 아이를 낳고 나면 황제 폐하께서 두 사람에게 공식적인 안식일을 내리기로 하셨다.”
아드리안의 손등을 두드리던 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식일이요?”
“그래.”
고개를 갸웃하는 그들을 보며 발베니는 턱을 쓰다듬었다.
“황제 폐하께선 아직 정정하시고 황후 폐하께서도 이제 곧 복귀하실 테니, 본격적인 황태자비 수업을 듣기 전까지의 시간을 이용해서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냈으면 하셨어.”
“오붓한 시간.”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하긴, 지금껏 여러 인물들 때문에 둘이 제대로 어울려 본 시간이 없긴 했다.
삽시간에 달라진 아드리안의 안색에 발베니는 지도를 차곡차곡 접어 칼에게 건넸다.
“여행은 시야를 넓혀 주고 마음을 풍요롭게 해 주지. 멀리 가지는 못해도 주변국을 돌아보려무나.”
여행. 가슴을 간질이는 단어에 칼의 얼굴이 기쁨으로 반들반들해졌다.
과거의 전우영은 가난하고, 여유가 없었다. 그가 하는 외출은 전부 재영이를 위한 것이었고 칼 린드버그가 된 뒤로도 갖가지 이유로 황성과 왕성을 벗어나기 힘들었으니까, 실상 처음 하는 여행이었다.
아, 아드리안과 헤어지기 위해 떠났던 짧은 여정은 여행으로 칠 수 없다.
‘딱히 즐겁지도 않았고, 외려 싫은 기억만 있으니까.’
아드리안은 칼의 손을 움켜쥐었다.
업무 외의 이유로 황성을 떠나는 것은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그 해사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입을 맞춘 아드리안도 입술 끝을 매만지며 미소 지었다.
그때 대공이 마차 천장을 가볍게 두드렸고 마부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다 완전히 멈추었다.
마차는 어느새 왕도에서 성으로 진입하는 대로에 당도해 있었다.
발베니가 마차에서 내려 말로 갈아타며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명분 없이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아. 그러니까 소중히 사용해 보도록.”
짓궂게 웃어 보인 발베니는 먼저 말을 달려 저만치 앞서 나갔다.
아드리안은 제 아비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숙부가 어딘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 * *
와아!
왕자님! 왕자님!
노출되어 있는 마차의 난간 너머로 린드버그의 백성들이 칼 린드버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손을 흔들어야지.”
자꾸만 얼굴을 감추는 칼의 양손을 들어 대신 흔들며 아드리안이 완벽한 황태자의 얼굴을 한 채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줄 달린 인형처럼 흔들거리는 칼 린드버그의 어깨를 보란 듯이 감싸자 혹자는 얼굴을 붉히고 혹자는 소리를 질렀다.
한창 좋을 때네.
제국의 황태자 전하도 훤칠하시지만 왕자님의 미모도 뒤처지지 않구먼.
오히려 두 분이 함께 더 빛을 발하는 느낌이야!
고스란히 들려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칼 린드버그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눈을 깜빡였다.
창공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눈을 마주치며 행진하는 것은 천지 차이라 칼의 얼굴은 연신 얼룩덜룩 색을 바꾸며 그가 얼마나 당황스러운지를 보여 주었다.
발베니가 내리고 나서 다시 출발할 줄 알았던 마차의 뚜껑이 갑자기 스르륵 접히고 칼과 아드리안이 밖으로 노출되었을 때 지었던 그의 얼빵한 표정이 생각나 아드리안은 어깨를 들썩이며 폭소했다.
“아, 민망해.”
“허리 펴고 웃어 줘. 사람들이 다 너만 쳐다보고 있잖아.”
아드리안의 리드로 칼은 허리에 힘을 바짝 주고 헤벌쭉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입꼬리가 달달 떨렸다.
사실은 이렇게 환호받으며 지나다닐 상황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폭정의 중심에서 고혈을 빨아먹었던 왕자. 그마저도 홀로 감당하지 못해 외세를 끌어들여 결국 왕국에서 공국으로 격하되는 수모를 주었건만.
사람들은 칼 린드버그가 마치 영웅인 것처럼 떠받들었다.
손을 흔들다 말고 칼 린드버그는 결국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드리안, 그으, 어깨 좀 빌려 줘.”
“얼마든지.”
아드리안의 어깨에 기대 상기된 얼굴을 감추는 칼은 남이 보면 그저 수줍어하는 것으로만 보였다.
어머, 귀엽기도 하시지.
황태자 전하께서 아주 듬직하게 받쳐 주시는군.
백성들은 더 환호하며 마차를 쫓았다.
인간의 사정과 상관없이 자연은 봄을 맞이했고 덕분에 곳곳에 봄꽃이 만개했다.
중앙로를 제외한 도로는 아직 정비 중이었고 흙과 지푸라기로 얼기설기 지어진 집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긴 했지만 린드버그의 왕도는 어엿한 한 나라의 수도의 모습을 갖춰 나가고 있었다.
“칼, 저길 봐.”
킬의 허리를 두드리며 아드리안이 그를 불렀다.
고개를 들어 본 곳에는 어른의 손을 잡고 나온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있었다.
린드버그에는 고아가 많다.
소작료를 내지 못해 노역으로 대체하려 끌려간 사람들, 아이들을 친척에게 맡기고 망명길에 올랐다가 생사가 불명확해진 사람들, 그리고 터무니없이 부족한 물자와 약품 때문에 병으로 죽은 자들이 많아서다.
아이들은 어른을 모방하며 손을 흔들었다.
칼 린드버그와 똑같이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었다.
“다들 살이 통통하게 올랐네. 귀엽게.”
아드리안이 그쪽을 향해 한 손을 올려 보이자 아이들이 까르륵 웃으며 어른의 다리 사이에 몸을 숨긴다고 난리다.
칼 린드버그의 눈가가 촉촉했다. 그러면서도 입술이 비식거리며 올라갔다.
나잇살 먹은 남자가 우는 것은 다소 볼썽사나운 일이지만, 기뻐서 우는 것은 괜찮았다.
어깨를 두드려 주는 사람도 있고.
그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다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은 일이고. 정작 피를 뒤집어쓴 것은 레아 린드버그인데.
어째서 백성들은 저렇게 칼 린드버그의 존재를 반겨 주는 것일까.
뭉클한 가슴을 안고 멋쩍게 눈물을 닦는 칼에게 아드리안이 속삭였다.
“시작은 사소했지만 끝은 창대할지 모르는, 린드버그의 새 역사의 물꼬가 되어 줘서 고맙다. 칼 린드버그.”
아, 그런 거구나.
어느새 저 멀리 있던 린드버그의 성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