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37)화 (137/150)

어수선한 본관 대신 별관에다 짐을 푼 칼과 아드리안은 볕이 잘 드는 정원에서 레아와 벨프리를 기다리기로 했다.  

현재 이 성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라 서운함을 느낄 수도 없었다. 

아드리안은 규모는 작을지언정 헤네켄 황성의 정원과 놀라우리만치 닮아 있는 장소에서, 칼 린드버그에게 대뜸 아이를 낳자 말했던 그날을 추억했다. 

“기억나? 내가 너한테 아이를 낳아 달라고했을 때 네가 바지에다 차를 쏟았던 거.”

칼은 푸핫,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잊을 수가 있겠냐.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아찔해. 나는 여지없이 네가 누님과 결혼하자고 하는 줄 알았거든.”

지금이야 웃어넘기지만, 당시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세계관의 소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아드리안의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너 그때 뭐라 그랬지? ‘연애도 아직인데, 좀 그렇잖아요?’ 이제 와서 말하지만 아주 파렴치한을 보는 시선이었다니까.”

눈을 이렇게 동그랗게 뜨고, ‘네가 어떻게 우리 순진한 누이를 그렇게 채 가려 하는지?’라고 책망하는 듯한 눈초리였다며 억울한 척 가슴을 쳤다. 

“그때도 난 너랑 잘해 볼 생각뿐이었는데.”

칼이 아드리안의 볼을 쭉 당겼다. 

아드리안은 그 손바닥에 볼을 가져다 대고 입을 맞췄다가, 아예 손을 가져가 테이블 위에 단단히 붙들어 놓았다. 

“어쩔 수 없었어. 누님이 21살밖에 안 됐었잖아. 황태자라 평민처럼 연애하고 결혼하는 게 당연하지 않다는 건 알아도 말이야. 팔려 가듯 국혼 하라고는 강요하기 싫어서.”

게다가 누님은 제 아비를 포함하여 린드버그의 썩은 귀족들 틈바구니에서 인간 혐오증에 걸려 있었다. 

“그래도 일단 붙여 놓으면 어찌어찌 사랑하지 않을까 기대했었어.”

네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으니까.

검을 쥐어 굳은살이 군데군데 박여 있는 아드리안의 손바닥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문지르며 칼이 멋쩍게 웃었다. 

“빵집을 차리겠다는 꿈은 여전하고?”

짓궂게 묻는 아드리안을 보며 칼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제 황실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사라졌지만, 취미 정도로 황성 내부에 빵집을 차리는 것도 좋겠다.”

기사들과 사용인들이 오며 가며 앉아 커피도 마시고 빵도 먹고, 재료비라도 받아 기부하고, 그러고 싶다는 칼의 눈이 더없이 희망에 차 있었다. 

“흠,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빵을 빚는 황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멀지 않은 거리에서 달콤한 향을 풍기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기사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꼭 하고 싶다는 건 아니고 ‘해 볼 만하다’라는 거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칼의 말에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말 괜찮은 생각이야. 애초에 황성 내부에 사용인들을 위한 휴게 시설이 별도로 없었어. 근무하는 공간에서 알아서 쉬거나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가서 쉬었지.”

세대가 흐를수록 황성의 문턱이 낮아지는 데 반해 사용인들의 대우는 고릿적에 머물러 있다며 아드리안이 말했다. 

“글렌 폐하께서 아무리 마음이 열려 계신다 해도 이렇게 소시민, 아니 범민 같은 의견은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은데.”

“황실 사람들이 범민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안 좋아하시지만, 범민을 위하는 태도는 기꺼이 들어주실 거야.”

네가 황성 내부에서 할 수 있는 취미를 만들어 행복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말하는 아드리안의 볼에 칼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 

“기분 좋아졌어?”

“아까부터 좋았어.”

아드리안이 반대쪽 볼도 내밀며 물었으나 칼은 거기까지는 해 주지 않았다. 

기특한 마음에 충동적으로 입을 맞춰 놓고 뒤늦게 주변을 의식한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 상성이 맞는 두 사람.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아도 한 방향을 보며 발을 맞출 수 있는 상대. 

그를 인생의 동반자로 맞이하게 된 칼 린드버그의 마음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맑음이었다. 

“나 뭐 하나 더 물어봐도 되나?”

잠깐 헤헤 웃던 아드리안이 칼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뭔데?”

칼 린드버그의 고해 성사와도 같은 이야기를 들은 후 아드리안은 말문 터진 아이처럼 질문이 많아졌다. 

“남자의 몸으로 남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의외의 질문에 칼이 웃다 말고 일시 정지 상태가 되었다. 

“애초에 네가 같은 성별의 인간을 연애 상대로 두지 않았었다니까, 문득 궁금해서.”

누가 들을까 속삭이는 소리는 궁금보다 불안에 가까웠다. 칼 린드버그는 어쩌다 아드리안을 받아들이려고 했을까. 

그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좀 더 근본적으로, 그의 본능이 여자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각인을 마친 뒤라 하여도 불안증이 도졌다. 

칼 린드버그가 저도 모르게 아드리안의 고간을 흘겨보았다. 

좌우상하 전부 완벽한 내 알파지만, 그의 진짜 늠름함은 옷 아래 감춰져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지라 자신도 어쩌다 저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는지 의아하던 참이다. 

“처음에는 음, 어쨌건 몸은 오메가가 되었으니 그 본능이 너를 원한다고 생각했는데.”

칼은 주섬주섬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 단어를 정리했다. 

“그랬는데?”

조급해진 아드리안이 되물었다. 

칼 린드버그가 미소를 짓더니 찬찬히 아드리안을 뜯어보며 그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에 살짝 반했었나 봐.”

무얼 보고? 

아드리안의 눈에 선명한 물음표가 떴다. 

“너무 다정해서. 원하는 것이 있어 주고받는 관계였다고 하더라도, 나와 말을 섞고 눈을 마주치고 내 의견을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어서.” 

나는 세상에 그런 애정 처음 받아 봤어. 

덩치가 크고, 사납지만 나에게만 다정한 맹수.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칼은 되물었다. 

칼 린드버그의 생생한 감정을 담고 흘러나오는 페로몬에 동화된 아드리안은 괜스레 눈가를 문질렀다.

“그리고.”

칼 린드버그가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 아드리안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너랑 하는 것, 기분 진짜 좋아. 가끔은 아파도 대체로 ‘개’좋아.

소곤거리는 소리에 아드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밤 칼 린드버그는 좋아서 몸부림치며 울게 될 것이다. 

* * *

으아아아아. 

벨프리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운도 나쁘지, 여신님도 참 성격 별로야. 

어째서 매번 벨프리는 정통으로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을 마주치게 되는가. 

‘황태자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 죄.’

그날의 대사를 상기하니 버터를 100스푼 정도 먹은 사람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안 가고 뭐 해?”

뒤따라오던 레아 린드버그가 벨프리의 어깨를 잡았다.

흠칫 놀란 벨프리가 저만치서 손을 붙잡고 대화를 하다 말고 동시에 빨갛게 얼굴을 물들이는 두 사람을 보며 입술을 비죽였다. 

“지금 두 사람을 방해하기 싫습니다.”

이 소름 좀 보십시오. 하고 벨프리가 팔뚝을 걷어붙였다. 

“아하.”

레아는 벨프리의 하얀 팔뚝을 물어뜯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죄 없는 잉꼬 커플에게 서슬 퍼런 눈을 돌렸다.

“으앗, 공주님!” 

벨프리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레아 린드버그는 두 사람에게 척척척 나아갔다. 

“칼 린드버그.”

“아, 누님.”

레아 린드버그가 팔짱을 끼고 털썩 두 사람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누님. 고생 많으셨죠?”

칼이 반가움에 음성을 높였지만 레아가 인사 대신 눈을 희번덕하게 뜨자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머, 머리 자르셨네요. 잘 어울리고.”

“고맙다. 그런데 그전에 할 말이 있지 않니?”

지은 죄가 있던 칼은 우물쭈물 “죄송합니다.” 하고 말했다. 

“내가 다 큰 남동생의 거취에 대해서까지 일일이 불안해 해야 하나? 그것도 이제 곧 남들은 감히 범접도 못 할 자리에 앉을 아이를?”

레아의 말에 칼이 고개를 푹 숙였다. 

“걱정 끼쳐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알면 되었고. 그래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이다만 다음에 또 그러면.”

“아, 왜 그러십니까. 공주님. 오랜만의 재회인데 조금 더 기뻐하시지요.”

벨프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허겁지겁 뒤따라 와서는 아드리안에겐 눈인사만 건네고 레아의 옆에 자연스레 앉았다. 

원형 테이블엔 좌석이 여섯 개. 

황태자와 칼 린드버그가 나란히 앉아 있고 칼과 마주 보는 자리에 레아가 앉았다. 평소의 벨프리 헨드릭이었다면 황태자의 뒤에 서 있다가 그가 앉으라고 할 때 근처에 앉았을 터였다.

‘으흠?’

게다가 벨프리가 레아를 말릴 때 레아가 대놓고 미간의 주름을 펴지 않았는가. 

아드리안이 둘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눈썹을 꿈틀꿈틀 움직였다. 

“좋은 자리에서 언성 높이지 말자고요. 와, 왕자님. 고생하셨어요.”

“아닙니다, 혼 좀 더 나도 돼요. 소공자께도 죄송합니다.”

걱정을 끼쳐서 송구한 마음 반, 저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 반으로, 칼이 고개를 수그리자 벨프리가 휘적휘적 손을 저으며 아니라 말했다.

“린드버그 왕성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며칠 차이로도 큰 변화를 느끼실 만큼 일이 빠르게 진척되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거 두 분께 점점 면목이 없습니다.”

멀찍이서 대충 봐도 알았지만 일부러 과장하며 치하하는 꼴에 레아가 잠시 눈을 흘겼다가 빠르게 벨프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드리안은 ‘아하.’ 하며 레아 린드버그를 향해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사람은 잠시 앉아 도란도란 근황을 나누었다. 

칼 린드버그의 모험담은 그다지 환영받는 주제가 아니라서 그것만 빼고. 

린드버그의 현재 동향이라든지, 무지차 파르만의 처분 같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늦은 점심도 들고 후식에 디저트 와인까지 곁들이고 나니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대공께서 여행을 하라 하셨다고요?”

벨프리가 물었다.

뜬금없이 린드버그까지 쫓아온 대공이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에게 하는 말로는 영 실없었기 때문이었다.

“쌀로 막 빚은 걸리의 술이 명물이랍니다!”

신이 난 칼이 말하자 레아는 술도 못 하는게, 하며 핀잔을 주었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오려 합니다.”

붕붕 날 것처럼 구는 칼의 어깨를 감싸며 아드리안이 말했다. 

“그러세요. 나는 지금 당장도 힘들 것 같고, 공왕이 되고 나면 더욱 바빠지겠지만, 내게는 이 삶 자체가 여행 같아 나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 계속 곁에서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의미심장하다 못해 대놓고 못을 박는 소리에 벨프리의 턱이 잘게 떨렸다. 

“누구요? 혹시 인력이 부족합니까? 역시 당분간은 헤네켄의 인력들이 있어야겠지요?”

갑자기 눈치를 수프에 말아먹은 칼이 레아의 걱정을 하며 아드리안에게 “조금 더 도와줄 수 있나?” 하고 물었다. 

“공왕께서 원하신다면 그중에 지원하는 인력을 아예 상주시키는 방법도 있습니다.”

레아가 벨프리에게 하는 말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아드리안은 똑같이 눈치 없는 척을 했다. 

“그래 주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제국에서 공국에 빚을 왕창 지운 터라 대공께 수수료를 한 푼도 못 받아먹게 생겼지만요.”

레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역시, 발베니 상단의 문제로 따라오셨구나.”

칼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하는 말에 아드리안은 “글세…….” 하고 벨프리를 보았다. 

레아가 벨프리의 몸 근처에서 나는 페로몬 냄새를 맡는 것처럼 턱을 기울이고 있었다. 

‘대공도 결국 아버지군’. 

사랑하는 공작과 찍어 놓은 것처럼 닮은 막내아들, 오메가로 발현 후 웬 알파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르니 제 눈으로 확인하려고 한 것일 테지. 

“이거, 잘하면 겹경사로 린드버그와 헤네켄이 더 끈끈해지겠는데.”

아드리안이 중얼거렸고 미처 듣지 못한 칼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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