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38)화 (138/150)

“왕자니임!”

“우어어엉!”

칼 린드버그가 마르코와 엘리자벳에게 깔려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마르코! 엘리자벳!”

엘리자벳이 으어어엉, 이상한 소리로 울며 칼 린드버그의 온몸을 핥았다.

옆에 서 있던 아드리안이 개를 떼어 내려고 애를 썼으나 엘리자벳이 이를 드러내는 통에 칼이 만류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엘리자벳의 옆구리가 홀쭉한 것 좀 보세요!”

“진짜네. 미안해. 얘들아.”

반쯤 드러누워 엘리자벳과 마르코를 더듬은 칼이 덩달아 눈물을 글썽였다.

거, 툭하면 식사 거르는 버릇 좀 어떻게 하면 안 되나, 하고 중얼거리던 아드리안은 옆에 서 있던 마녀의 존재를 인지했다.

그녀는 회포를 푸는 세 사람, 아니, 두 사람과 한 마리의 개 뒤에 서서 연신 혀를 차고 있었다.

한때는 머리를 양쪽으로 틀어 올려 묶고 나풀나풀한 드레스만 입었던 것 같은데, 지금 다시 보니 머리를 늘어뜨리고 바지 정장을 입은 모양새가 레아 린드버그 쪽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그녀가 전생의 칼의 여동생이었다고 하니 조금 마음이 어지러웠다.

마르코와 엘리자벳에게 짓눌리며 칼이 정신 못 차리는 틈을 타서 아드리안이 그녀를 불렀다.

“마녀, 나랑 이야기 좀 하지.”

“엥, 저요?”

“그래. 칼에게 대강 상황을 전해 들었다. 묻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아.”

루루가 ‘드디어 올 것이 왔군.’ 하는 심정으로 아드리안을 따라 접견실로 향했다.

“어디가?”

헐떡거리던 칼이 물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하려고.”

아드리안이 대답했고 칼은 잠시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졌지만 이내 거두어 마르코와 엘리자벳을 끌어안았다.

충성스러운 그의 시종과 비록 마수지만 영원히 칼 린드버그의 멍멍이일 엘리자벳이 좀처럼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탁.

접견실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칼은 내게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는 털어놓았어.”

“미리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루루는 점잖은 말투로 자신을 위장했다.

그녀는 한때 자신이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치우쳐서 기고만장했었다.

이 소설을 읽은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인 그녀가 빙의자가 된 데에는 대단한 사명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니 아드리안 헤네켄과 벨프리 헨드릭이 큰 고난 없이 사랑을 이룰 수 있도록 수호천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원작은 진작에 어그러지고 사명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도 나름대로 새 삶을 제대로 살아 보기로 했다.

“그는 참 기구한 삶을 살았더군.”

“맞아요. 안쓰럽죠. 하지만 연민을 갖지는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오빠는, 평생을 동정받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살았거든요.”

부모가 없어도, 가난해도, 학력이 부족해도 인간은 여타의 다른 이유들로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그것이 전우영의 인생 좌우명이었으며 재영에게도 알려 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을 그녀는 죽고 나서 깨달았다.

루루는 무릎에 손을 올렸다. 이윽고 그녀의 말에 아드리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가 감히 그를 동정할 수 있는 위치인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만고불변의 법칙에 따라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를 동정할 수 없었다.

“그는 내게 직접 말했어. 과거의 자신은 죽었으니 칼 린드버그로만 여겨 달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 나는 과거의 그를 보듬으며 보상해 줄 생각이야. 물론, 그는 이미 충분하다고 말하겠지만.”

그리고 그 보상 안에는 이전 생에 허무하게 헤어졌던 동생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노라 말했다.

“저를, 오빠의 여동생으로도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것이 그가 완벽히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니까.”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드리안은 여전히 멋있었다.

그녀가 아드리안과 벨프리의 사랑을 응원한 데에는 그녀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자격지심이 한몫했음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다 가졌지만 단 한 가지, 사랑이 부족하여 엇나가고 괴로웠던 그들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지켜보는 동안 그들의 마지막 퍼즐이 채워지며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길 바랐다.

“칼은 스스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지만, 나와, 너를 포함해 그의 주변인들이 함께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기 힘들겠지.”

칼 린드버그는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지 못할 이타적인 사람이니까.

입버릇처럼 이기적이라 말해도 실제 삶을 대하는 태도가 그렇지 않으니.

아드리안 헤네켄은 칼 린드버그를 위해 행복해질 것이고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기꺼이 애정을 나눌 것이다.

그 마음을 알게 된 루루가 작게 웃었다.

그녀의 마음 저편의 어떤 상처가 분홍색 새 살로 감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고맙습니다.”

“천만에.”

루루의 말에 아드리안이 잔잔히 웃어 보였다.

예전엔 그녀가 완전 미친 여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칼 린드버그 전생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고 하니 제법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질투심도 올라왔다.

“아, 그래도 칼 린드버그 마음속 첫 번째 자리는 양보 못 해.”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고 루루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눌렀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집착공이라면 그래야지. 암요. 속으로 중얼거리며 루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던 아드리안이 의아하다는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오빠가 지금은 저런 외모라서 조금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원래는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환자도 업고 뛰던 사나이 중의 사나이예요.”

“환자?”

“구급대원이었거든요. 누가 쓰러지거나 다치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사람이요. 그러니까.”

아, 그랬군.

의외의 직업에 아드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그다음에 이어진 루루의 말에 선 채로 얼었다.

“그러니까 조금 더 내키는 대로 다루셔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구속이라든가 감금이라든가, 

질투와 소유욕의 화신인 아드리안의 가슴을 뛰게 하는 몇 가지의 단어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나열한 루루가 훗, 하고 웃어 보였다.

“오히려 좋아할걸요. 오빠도 사낸지라 나름대로 상대에게 집착하고 싶은 마음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니까요.”

그녀가 돌아서 다시 칼 린드버그의 방으로 들어갈 때도 아드리안 헤네켄은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훗날, 그날을 회상하던 칼 린드버그는 루루의 쓸데없는 조언 때문에 아주아주 집요하고 고달픈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며 혀를 찼다.

* * *

저녁 만찬장엔 가장 웃어른인 발베니 대공과 레아 린드버그, 칼 린드버그, 그리고 아드리안 헤네켄과 벨프리 헨드릭. 손님인 아일라 레바까지 모였다.

“헤네켄 황실에선 린드버그에 대한 지원을 그대의 정식 대관식 이후 1년까지 연장하기로 했습니다.”

직위로 따지면 발베니 헤네켄은 상석에 앉아도 되는 인물이었지만 레아 린드버그의 입장을 생각하여 그 자리를 고사하고 아들 옆에 앉았다.

“그렇게나 오래요? 헤네켄의 사절들이 반발하지는 않겠습니까? 이미 몇 개월을 여기서 허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면 감사한 이때에 고양이도 아니고 호랑이 손을 수백 개나 빌리고 있으니 감개가 무량할 정도였다.

그러나 염치가 있는 레아는 괜스레 황실의 격이 떨어질까 우려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가 뭐 천 리, 만 리 되는 곳도 아니고 번갈아 가며 안식을 쓰거나 하면 되잖습니까.”

무엇보다 그들에게 지급되는 월봉이 제국 수준보다 높아서 추가 지원이 필요하진 않나 문의가 들어온다며 대공은 후후, 웃었다.

“제국의 역사는 깊지만 그것이 외려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도 아시지요? 현 황제 폐하께서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고 계시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 새 나라의 재건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젊은 현자들에게는 새로운 배움의 기회로 보인 모양입니다. 또 나름대로 이곳에 터 잡는 동안에 정이 들었던 것도 있고요.”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린드버그 왕국 변방에 있는 제임스는 안식일이 끝나기 무섭게 황성에 파발을 보내어 제 가족들을 함께 이주하는 방안을 논해 달라 건의했다.

집에 가서도 변방의 어린아이들과 아직 불안정한 마수의 움직임이 아른거린다는 이유였다.

호거든 백작의 차남인 그에겐 아직 영지가 없었던 터라 황실에서는 일찌감치 가허가를 내렸다. 그렇게 린드버그의 주인인 레아의 허가를 기다렸으나, 그녀는 시기상조라 생각하여 답변을 미루었다.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것 무어 있습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손 내밀고, 먼저 내민 손이 있다면 잡고. 당분간 그렇게 지내면 됩니다. 린드버그의 자주권이 무너질까 걱정이라면 황실에서는 옥새를 찍은 공문서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린드버그와 제국의 우호 관계를 문서화해 버려 그녀의 자치권에도 지장이 가지 않게 하겠다는 말에 레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글렌의 호의는 지나친 감이 있어서였다.

이제 와서 그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한 나라의 왕으로서는 징검다리도 두들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발베니는 그녀의 고민을 예민하게 눈치채었다.

“글렌 폐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금도, 시간도 아닌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로 이어지는 직, 간접 경험이 주는 힘을 믿으시지요. 그런 이유로 이번 린드버그와의 협력은 새 시대를 여는 창이 될 거라 하셨고요. 헤네켄의 젊은이들 중에서도 전도유망한 자들은 많지만 폐하께서는 워낙 욕심이 많으셔서.”

이젠 린드버그의 젊은이들까지 합세시켜 두 나라의 부흥을 함께 꾀해 보자는 것이라는 발베니의 말에 레아가 픽, 숨을 토해 냈다.

“나중에 나라를 통으로 요구하시면 저는 어찌합니까.”

사실은 이런저런 지원이 아니고도 제국이 달라고 하면 넘겨야 하겠지만.

저런, 발베니가 키득키득 웃었다.

헤네켄은 번성하고, 번성했다. 남은 숙제는 쇠퇴하지 않게끔 욕심을 버리는 것뿐.

그의 형님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발베니 상단의 통행세, 그리고 린드버그 내의 거래 수수료 인하권으로 모든 것을 퉁! 쳐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린드버그의 백성들이 제국으로 세금을 낼 필요는 없으니 안심하시지요.”

그것까지 공문서화 하겠다며 웃어넘기는 발베니에게 레아는 면목 없다며 고개를 숙이는 대신 잔을 들었고 대공은 기꺼이 잔을 마주쳐 주었다.

린드버그와 헤네켄의 일에는 발언권이 없어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아일라, 그리고 아드리안과 칼 린드버그는 엄밀히 말하면 이제 제국 사람이라 입을 다물었다.

몇 잔 술에 기분이 좋아진 대공이 제 셋째 아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뜬금없이 폭탄을 투하했다.

“대관 후에는 공주님도 새 가족을 만들 생각을 하셔야죠. 원한다면 제 아들들 중에 하나 골라 가시렵니까?”

공작을 닮아 셋 다 미남에 우성이라며 가슴을 펴 보이는 대공은 사색이 되어 가는 아일라 레바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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