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가 없어서 벨프리는 아일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리며 힘을 주었다.
“그 부탁은 못 들어드리겠습니다.”
“어째서요?”
아일라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공주님을 사랑하세요?”
“아뇨.”
벨프리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런데 어째서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희망으로 사람을 고문하기라도 하려는 거냐고 아일라가 비릿하게 웃으며 물었다.
“지금은 사랑하지 않습니다만, 앞으로 사랑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요.”
덤덤한 말투였다. 벨프리는 아일라의 손을 놓으며 제 바지에다 손바닥을 문질렀다.
“그런 이기적인 말이 어디 있나요?”
“여기 있습니다.”
주머니에서 겉면이 매끈한 천을 꺼내어 안경을 닦아 내던 벨프리는 그것을 꼈다.
“공자님, 제가 불쌍하지 않으세요? 아니, 레아 공주님이 불쌍하지 않으세요? 그분은 평생 외로이 살아오셨어요. 확실하지도 않은 애정으로 그분을 더 외롭게 하실 참이에요?”
아일라가 절박하게 외쳤다.
이야기만 들으면 벨프리가 희대의 요부(妖夫)라도 되는 모양이다.
벨프리는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마치 레아 공주님이 제 사랑 없이는 못 사는 사람처럼 말하는데, 그만해요. 하나도 불쌍하지 않으니까.”
그는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것 대부분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고, 입고 쓰는 것들이 나라의 세금으로 충당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것이고.
그렇기에 남들보다 배는 노력하고 공부했다.
“레아 공주님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스무 해를 웅크려 계셨습니다.”
아일라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공주님의 애정에 보답할 길을 찾으셔야죠. 공자님의 애매한 마음가짐으로는…….”
“애매하지 않습니다.”
아일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벨프리가 덤덤하게 말했다.
“저는 레아 공주님을 존경합니다. 그분의 기다림과 기꺼이 피를 보기로 한 결단력을 존중하며 앞으로 행복하길 염원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여기서 멈출 것인지 사랑으로 변할 것인지는 레아 공주님과 저, 두 사람이 앞으로 쌓아 갈 것들에 달렸고요.”
벨프리가 공주를 사랑하든 말든 공주는 공왕이 될 것이다.
린드버그의 백성을 아끼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겠지.
“저는 그 길을 지켜보며 여기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보필할 예정이에요. 아일라 공주. 그대는 무엇을 하겠습니까? 아비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통로로 공주님을 이용하려는 것은 오히려 그대가 아닙니까?”
차분한 벨프리의 말에 아일라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반박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레아 공주님을 이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사랑해서. 레아 공주님을…….”
아일라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보고 싶고, 붙들고 싶고, 매달리고 싶은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면 뭔가?
“무엇으로 그대의 사랑을 재단할 수 있습니까? 그대 스스로 이루려고 노력한 것은 무엇인가요?”
벨프리의 고저 없는 말투에 아일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것은 부당했다. 처음부터 다 가지고 태어나서 그저 걷기만 해도 부와 명예를, 사랑을 쥐는 사람이 감히 그녀를 질책할 순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말이야! 그러는 벨프리 당신은 뭘로 레아 공주님의 사랑을 얻으셨는데요? 무슨 노력을 하셨는데요!”
아일라가 언성을 높였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도 모르는 부분이었으니까.
“그건 제가 대답해 드릴까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아일라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 잘 정돈된 분수대 근처에 지금 이 대화를 들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서 있었다.
만찬 후 본관을 빙 둘러 내부 수리 진척도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 벨프리가 아일라의 손을 다정히 잡는 장면을 보고 눈앞이 새빨개진 레아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그녀의 페로몬을 갈무리하는 것이었다.
주변을 경계하는 병사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낸 뒤 발소리를 죽이고 그들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자줏빛 망토 위로 금발이 달빛에 닿아 부서지며 내렸다.
여신의 재림처럼 몽환적이기도 한 자태에 아일라와 벨프리 두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 대화를 듣지 않았으면 하는 두 사람의 바람과 달리 레아는 모든 대화를 들은 뒤였다.
“아일라 레바, 그대에겐 먼저 사과를 하고 싶군요.”
“…….”
“나의 행동이 그대에게 여지를 주었다면 미안합니다.”
레아는 웃으며 아일라를 향해 다정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왜, 그러셨어요? 왜, 숨통을 틔워 준다는 둥, 기대하게 하셨어요?”
레아의 사과가 그녀에겐 일말의 여지도 없다고 들려 절망한 아일라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문자 그대로 그대가 숨을 쉬길 바랐을 뿐입니다. 좁은 곳에 갇혀 있다 보면 어느새 나의 존재마저 부정하게 되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죠. 단 하루라도 그대를 괴롭히는 것에서 떠나 다른 시선으로 인생을 돌아보라고요.”
내심 레아가 자신을 일으켜 주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그마저도 무참히 박살 났다.
“그러나,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결정지은 다음엔 그 어떤 변화도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야지요.”
아일라의 마음이 침전했다.
레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바꾸려고 노력하질 않았다.
“그녀를 옭아매는 부친의 그림자는 곧 쇠약해질 겁니다. 그때도 이렇게 마냥 주저앉아있을 겁니까?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입만 나불거릴 뿐인 유모의 치마폭에 싸여서?”
벨프리는 그녀의 신랄한 혀를 멈추게 하고 싶었다. 아일라는 실연당했다. 심지어 그 상대에게 적나라한 훈계를 듣고 있다.
내일 아침 린드버그 왕성 정원에 그녀가 목이라도 매달까 두려웠다.
그만큼 아일라가 무너져 있었다.
레아는 벨프리에게 조금 더 가까이 붙었다.
알파 여성, 오메가 남성.
두 사람의 키는 엇비슷했고 얼굴도 비슷하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런 형태학적인 것으로 잴 수 없을 만큼 기묘한 분위기가 두 사람을 묶었다.
“아, 그대의 궁금증에 대답해 주기로 했죠?”
아일라의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었다.
벨프리는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도 벨프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벨프리의 심장이 다시 툭 떨어져 내렸다.
아까보다 더 시리고 차갑게.
서운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아일라 레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레아는 벨프리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직’은요, 나는 벨프리가 가끔씩 보여 주는 인간적인 모습에 애정을 느끼며 참을 수 없이 괴롭히고 싶어요.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나만의 감정일 뿐. 다른 사람이 그를 울리면 화가 나고 그가 나로 인해 웃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죠.”
그게 뭐지, 그냥 가지고 놀겠다는 말인가, 아닌가. 참으로 애매모호한 말에 벨프리의 입술이 한 뼘 나왔다.
레아는 그것이 못내 즐거웠다.
“누군가는 이런 감정을 애정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고, 누군가는 장난으로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그리고 벨프리 그대가 이 감정을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지 아직은 모를 정도의 거리감이라는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거리. 서로의 감정에 동화되고 우정이 애정이 되고, 성애가 순애가 되는 그 거리가. 딱 한 뼘 떨어져 있는 벨프리와 레아 사이에 있었다.
“다만, 나는 이 거리를 더욱 좁히고 싶어요. 아무도 끼워 넣지 못하는 두 사람의 성역을 만들어 보고 싶어. 그런 시작은 싫어요? 벨프리 헨드릭.”
그녀의 마지막 말은 오롯이 벨프리를 향한 것이었다.
아일라 레바는 멍하니 선 벨프리와 그를 바라보는 레아를 두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래, 그 한 뼘. 아일라가 비집고 들어가기엔 너무 좁은 틈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그들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아니면, 이미 없었는지도 모르지.
* * *
칼 린드버그의 밤은 길고 길었다.
아드리안 헤네켄은 그날따라 집요하고 거칠어 칼은 처음에 그가 성이 단단히 났다고 생각했다.
방으로 돌아와 달라붙는 엘리자벳을 괴물 같은 힘으로 밀어내고 문을 쾅 닫는 것을 시작으로 괴로운,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한 밤이 반쯤 흘러가고 있었다.
평소에는 온몸을 문지르며 노곤노곤 근육을 풀어 주고 손가락이며 발가락이며 불어 터질 때까지 입술을 댄 채 움직이고 나서야 본 방송에 들어가는 터라 대뜸 허리가 반으로 접혔을 때는 아드리안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면서 러트가 왔느냐고 물었다.
물론 대답은 하지도 못하고 우느라 목이 쉬었어야 했지만.
칼 린드버그는 그 자신의 따끔할 정도로 예민한 피부에 아드리안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시트를 적셨다.
세상에 온갖 섹시한 언어를 칼 린드버그의 귀에 때려 박은 아드리안은 고삐 풀린 망아지, 아니 입마개가 제거된 개처럼 굴었다.
빠는 수준을 넘어서 가슴팍에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물어뜯기던 칼 린드버그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말았다.
미친놈처럼 몰아붙이는 아드리안 헤네켄의 물결치는 등 근육에다 손톱을 박으며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가 눈을 뜨면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있곤 했다.
두 번째 정신을 놓았다가 깨어났을 때, 어젯밤의 미친개는 어디 가고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은 아드리안이 칼의 허리에 따듯한 탕파를 올렸다.
“누, 눈부셔.”
“눈부셔?”
아드리안이 부리나케 달려가 커튼을 쳤다.
그도 칼도 아직 알몸이었지만 이불은 어느새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등을 뜨끈하게 지지고 노곤해진 칼은 눈을 부릅뜨며 아드리안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왜 그랬어?”
“뭐가?”
아드리안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한쪽 팔은 칼의 목 아래 넣고 반대쪽 팔로 허리를 감으며 밀착한 그가 아직도 부족한 듯 계속 손으로 칼을 더듬었다.
“……나한테 화났어?”
칼 린드버그가 쉬어 빠진 목소리로 물었고 아드리안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아니.”
잠깐 고개를 돌려 아드리안과 눈을 마주친 칼이 그의 팔뚝에 입술을 묻었다.
“그럼 됐어.”
“화 안 내?”
솔직히 말해서 칼 린드버그에 대한 배려가 없는 밤이었다.
아드리안은 그가 어디까지 받아 주는지 궁금해서 터뜨려 봤을 뿐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화내야 하나?”
“아니.”
실없는 대화에 둘 다 픽, 웃음이 터졌다.
등 전체를 아우르는 아드리안의 체온에 칼이 기분 좋게 신음했다. 온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아드리안, 기분 좋았어?”
“으응, 아프게 해 놓고 면목 없지만. 사실 그래.”
솔직한 아드리안의 말에 칼이 “푸하하!” 하고 웃다가 아랫배가 당겨서 그만두었다.
“나도 좋았어.”
네가 나를 망가뜨리는 감각이, 그 안에서 네게 귀속된다는 느낌이 들어 나쁘지 않았다고 칼이 말했다.
뜻밖의 대답에 아드리안이 그를 힘주어 안았다.
“일주일에 한 번?”
“아니, 2주에 한 번.”
“체.”
야박한 협상에 아드리안은 잠시 볼을 부풀렸으나 이내 그의 팔 안에서 도롱도롱 숨을 내쉬는 칼 린드버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