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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41)화 (141/150)

글렌 황제는 오랜만에 지하 감옥을 방문했다. 

그가 황제가 된 이후 좀처럼 쓸 일이 없었던 공간에 손님이 있어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고자 함이었다.

쉬익, 쉬익.

거친 숨을 내쉬는 젊은 남자가 특수한 구속구를 차고 돌바닥에 누워 있었다.

눈빛만큼은 형형했지만 그는 객기 부릴 여유가 없는 인간이라 글렌은 눈곱만큼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 나라의 국왕이 타국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데 돌아보는 사람도, 처벌하라는 사람도 없으니, 원. 네 인생도 시궁창 속이구나.”

끄으으으.

글렌이 손을 흔들어 마력을 불어넣자 그의 입을 묶고 있던 재갈이 툭 떨어져 내렸다.

“흐으, 흐으.”

무지차는 숨을 몰아쉬며 괴로움에 몸을 뒤척였다.

며칠을 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더니 바닥에 짓눌린 피부에서 진물이 나왔다.

잠시 숨을 고른 무지차는 철창 밖에 앉아 있는 글렌과 그 양옆의 기사들을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시궁창인 줄, 아셨으면. 조금 자비를 배푸셔도 될 텐데.”

훗, 말에 글렌이 웃어 보였다.

죄인은 있으나 그 처벌을 논의할 인간이 없다.  그는 제국의 황태자비와 황태자를 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고. 그가 바랐던 대륙의 주인이 될 야망도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그에게 철퇴를 내릴 명분이 있는 사람은, 모두 죽고 없어졌다.

“내 살다 살다 마물의 생태계까지 관여하게 될 줄은 몰랐느니, 무지차여.”

칼 린드버그와 아드리안 헤네켄이 제국으로 돌아온 직후, 파르만에 주둔하고 있던 제국군은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인간을 찾아 갱도를 뒤졌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는 없었고, 주인을 잃어 갈팡질팡하는 마수들 중 절반은 성기사들의 손에 생을 마감한 뒤 일부는 마정석을 제거당해 미바리 숲으로 옮겨졌다.

규모가 작지 않아 현재 진행 중으로, 인근의 다른 국가들도 합세하여 처리에 여념이 없었다.

“어쩌자고 그랬느냐.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었다면 다른 방법도 있었을 터.”

글렌의 말은 푸념에 가까웠다.

황후의 출산이 임박한 이때에 손에 피를 보는 것이 달갑지 않아 사형 집행을 미루고는 있었지만 대답 여하에 따라 당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무지차는 글렌에게 비뚜름하게 웃어 보였다.

“어떤 방법 말입니까. 대 제국에 머리를 조아리며 변방의 소국까지 굽어봐 달라 부탁하는 것이오?”

“그도 나쁘지 않았겠지. 백성들을 죽여 없애고 마수를 길들이는 것보다 간단했을 게다.”

파르만은 쇠퇴하고 있었고 왕조는 세를 거듭하며 더러운 일을 도맡아 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제국을 뛰어넘는 국가가 되는 일. 그 방법으로 악습을 대물림한 것이 파르만에 재앙을 가져왔다.

“우리는 그 외의 다른 길은 모르오.  파르만의 그 누구도 인간답게 살지 못하였소. 그들의 수를 줄이고 괴로움을 빨리 끊어 주는 것만이 파르만이 되살아날 길이었는데.”

그렇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글렌이 코웃음을 쳤다.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한 것이 뉘인데. 꼭 제가 구원자라도 되는 양 말하는구나.”

“황폐화가 진행되고 있는 버석한 땅에, 무슨 용을 써도 죽어 버리는 작물들과, 마법사가 사라지는 그곳을 여신님은 돌아보지 않으셨지. 제국민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처참한 환경이었소.”

“누가 그렇게 만들었나. 다름 아닌 너희 왕조가 그렇게 만들었어!”

거들먹거리는 무지차의 말에 글렌이 의자 손잡이를 쿵 내려쳤다.

“한 나라를 번성케 하는 것도 그 바탕이 있어야지. 모추 산맥은 파르만에 닿아 있지도 않아 마석을 캘 때마다 어마어마한 수수료를 부담해야 했고 땅은 가물었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왕국을 지킨단 말이오? 폐하. 세상을 전복시키는 데는 희생이 따릅니다. 제국의 부흥에 단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았다는 말은 못 하실 겁니다.”

한마디로 너나, 나나 매한가지라며 감히 제국을 한 선상에 놓는 행태에 기사들이 쯧, 혀를 찼다.

‘짜증 나서 못 들어 주겠네.’

글렌의 등 뒤로 이글이글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괜히 옆에 따라온 기록관이 납작하게 짓눌릴 지경이었다.

‘어마어마한 압박감이군.’

제3의 국가에서 파견된 늙수그레한 기록관은 연신 식은땀을 훔쳤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던 글렌은 황후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화를 내는 것도 들을 사람에게나 의미가 있는 것이지. 정론을 논할 필요도 없어졌다.

무지차 파르만의 표정은, 정말로 그가 타당한 행위를 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반쯤 의자에서 일으켰던 몸을 다시 앉히고 우드득 손마디를 꺾은 글렌은 피식 웃어 보였다.

“안타깝군. 네 백성들이 살아 있었다면 그 마음에 탄복하며 기립박수라도 쳐 주었을 터인데.”

전무후무할 흑마법의 재료 따위가 되기 위해 생을 마감한 백성들이 지옥에서 이를 갈며 기다리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만.

많은 것이 내포된 글렌의 빈정거림에도 무지차는 침통함 한 톨 내비치지 않았다.

더 이상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글렌은 형식적인 질문 몇 가지를 던졌다. 아드리안 헤네켄을 써먹겠다는 생각은 언제 한 것인지, 백성들을 정말 다 죽였는지 그리고 그것도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지 따위를 물었고 무지차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썩어도 한 나라의 국왕이었던 자라 기록관은 모든 질문과 답을 기록해야 했다. 그것은 공명하고 정대해야 했지만.

‘어차피 죽어야 할 인물.’

그는 찰나의 순간 글렌과 눈을 마주치며 무언의 합의를 보았다.

글렌의 질문에 대한 무지차의 대답은 전부 긍정으로 기록되었다.

무지차가 흐, 하며 감각이 없는 발목 아래를 돌바닥에 문질렀다.

한편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칼 린드버그였다.

100년 넘게 준비했던 일이 단 하루 만에 무산되었다. 키치너 재상이 제 먹잇감으로 애지중지 키웠다는 그 왕자 때문에.

기회가 한 번이라도 더 있다면 죽을 땐 죽더라도 그 왕자를 길동무로 데리고 가고 싶은데.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말해 볼까.

구속구 탓인지 마력은 봉인되었지만 죽을힘을 다해 끌어 올리면 어떻게 될지도 몰랐다.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신 무지차는 그를 죽이는 것이 그 어떤 살인보다 짜릿할 거라고 생각했다.

으드득.

무지차의 상상 속에서 흐트러진 금발을 한 칼 린드버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며 몸부림을 칠 때 기묘한 카타르시스가 올라왔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거라.”

서늘한 음성이 무지차의 정수리에 송곳처럼 닿았다.

어느새 철장 앞으로 바짝 다가온 글렌 헤네켄이 감정 없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지차의 손발을 묶은 구속구에서 파직 파직 전류가 올랐다.

“무슨 쓸데없는 생각 말입니까?”

시침을 뗀 무지차가 웃었다.

글렌은 무릎을 굽히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반성 외의 다른 생각은 엄격하게 금한다고.”

“대 제국의 황제께서는 사람의 생각도 제어하신 답니까?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아주 부러워 몸서리가 쳐지는군요.”

괜한 객기를 부리는 무지차의 말에 슬쩍 웃어 보인 글렌이 손뼉을 딱 쳤다.

“그러하냐? 다행이구나. 차라리 내게 제왕이 어찌 되냐 물었다면 성심성의껏 가르쳐 줬을 것을.”

“그게 무슨 개 같은! 큭!”

무지차 파르만의 목에 걸려 있던 구속구가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가 커억, 커억, 소리를 내며 몸부림을 쳤다.

피부를 조이며 파고든 구속구는 무지차가 꼬르륵 소리를 내며 피거품을 토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노련한 기사들도, 기록관도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글렌 헤네켄 한 사람뿐이었다.

“파르만 왕조는 오늘로 막을 내린다. 무지차 파르만. 흑마법을 부려 주변 국가에 상당한 피해를 주다 못해 제 백성들을 학살하여 그 재료로 사용하고 제국의 황태자와 황태자비까지 살해하려 한 것이 그 죄목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살아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지 않을 것 같거든.”

살짝 몸을 돌린 기록관이 헛구역질을 참으며 간신히 글렌의 말을 기록했다.

마침내 ‘집행’이 멈추었을 때 글렌은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무지차 파르만의 마지막은 허무했다.

‘오만한 자의 헛된 말로구나.’

글렌은 이윽고 감옥에서 나와 집무실로 향하는 길목에서 대사제 다니엘을 만났다.

그가 묘한 표정으로 글렌을 살피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씁쓸한가 보군요.”

“뭐,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딱히 속이 시원한 결말은 아니었다.

무지차 파르만이 죽는다고 하여 파르만의 백성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새삼스럽지만 인간의 욕심은 늘 상상을 초월합니다. 제가 너무 태평한 황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딱히 그를 동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운이 빠지는군요.”

사실 이 벌을 집행할 사람은 글렌이 아니라 파르만의 백성들이었다.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끌어들였으니 참견은 했겠지만 그가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고.

그것이 글렌의 양심을 긁었다.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의 어깨를 다시 한번 두드렸다.

“신을 섬기는 자로서, 내세를 믿지 않을 수도 없으니. 나머지는 저 하늘 어딘가에서 마무리 지을 겁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오늘 집무를 보는 것을 중단한 뒤 황후 폐하 곁으로 가서 위로를 받으십시오.”

글렌이 픽 웃어 보였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무지차 파르만의 시신을 확인하고 수습하기 위해 사제 몇 명과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는 다니엘의 뒷모습을 배웅한 글렌은 뛰다시피 하며 욕실로 향했다.

그의 마음에 공감하고 보듬어 줄 황후가 오늘따라 더욱 간절했다.

타국의 국왕이나 제후들에게는 보일 수 없는 연약한 마음을 그녀에게만큼은 부끄러움 없이 드러낼 수 있었으니까.

그 전에 피와 범죄의 냄새를 씻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 * *

아드리안이 칼에게 무지차의 사형 집행 소식을 알렸을 때 그는 의외로 덤덤하게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불쌍하네.”

“어떤 부분이?”

“그게 잘못되었다고 알려 주는 사람이 없었던 부분이.”

혹시 동정하는 거냐고, 어디까지 다정할 건지 물으려는 아드리안을 향해 칼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고 해도 나이를 그만큼 먹었으면 뭐가 옳고 그른지는 알아서 판단해야 하지만.”

그냥, 그런 이야기를 누가 해 줬다면. 그 사람이 들을 귀가 있었다면 파르만이 유령 왕국으로 남을 일은 없었을 텐데.

남 탓을 하면 돌아오는 건 자괴감과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뿐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에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기본적으로 무교였지만 여기 와서 여신의 존재를 믿게 된 칼 린드버그는 그날 밤 처음으로 사라진 자들을 위한 기도를 했다.

전우영이 죽어 칼 린드버그가 됐듯, 그들에게도 새 삶과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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