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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42)화 (142/150)

반년 좀 넘는 짧은 시간 동안 머물렀지만 칼 린드버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버린 린드버그의 왕성. 

칼은 그곳을 엘리자벳과 함께 천천히 걸었다.

레아 린드버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복귀하는 집단과 체류하는 집단으로 나뉘어 일을 수행하느라 여념이 없는 와중 한가한 것은 칼 린드버그뿐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체력과 마력의 회복을 위함이었지만 아드리안과 레아, 대공까지 합세하여 그의 움직임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끄응, 소리를 내며 허리를 두드리고 오금 뒤를 주무른 칼 린드버그는 어젯밤, 아드리안 헤네켄의 거친 행위가 자신의 발목을 잡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음을 눈치채고 말았다.

빨빨거리며 레아의 뒤꽁무니를 쫓거나 사용인들의 일거리를 훔치려고 혈안이 된 칼을 그렇게 못마땅해하더니.

“이렇게까지 할 일이냐고? 이러다 허리 아래를 아예 못 쓰게 되어 버리면 어떡하냐. 안 그래? 엘리자벳.”

살다 살다 복하사를 걱정하게 될 줄이야.

“끼이잉.”

칼 린드버그의 툴툴거림에 엘리자벳이 그의 손등을 핥았다.

쏴아아.

그때였다. 몰라볼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수들이 바람을 걸러 칼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바쁘고 정신없었던 시간을 지나 마침내 진정한 휴가를 받은 기분이었다.

“깔끔하네. 누님의 성정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아.”

“왕!”

전체적으로 밝고 가벼운, 딱 적당히 공국의 위엄을 갖출 정도의 장식만 남겨 둔 린드버그 성은 봄 햇살 아래 레아 린드버그를 반사하는 거울처럼 빛났다.

막상 그가 머물렀을 당시의 성 모습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인테리어를 보며 감탄하거나 정원을 걸어 볼 여유가 없었던 때라 더 그랬겠지.

“가끔씩은 말이야, 원래의 칼 린드버그의 기억이 전부 이 몸 안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돼.”

엘리자벳의 등에 한쪽 팔을 걸쳐 체중을 싣고 조심조심 걷던 칼은 결국 적당한 벤치를 찾아 주저앉았다.

횟수가 늘어나는 만큼 적응이 되는 건지 전처럼 까무룩 잠이 든다거나 다음 날 하루를 전부 허비하지는 않았지만, 아드리안의 정염을 전부 받아 내는 것은 여전히 버거웠다.

“끼잉, 끼잉.”

야생 늑대에 가까운 덩치를 해서 칼 린드버그의 품에 코를 비비는 엘리자벳이 막 태어난 강아지를 모방하며 울었다.

칼은 그런 녀석의 머리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잘 먹고 잘 씻은 털은 윤기가 흐르며 좋은 향기가 났다.

“너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칼 린드버그가 누님에게 준 상처는 구체적으로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그런 게 궁금하더라고.”

과거의 모든 일들이 주워 담을 수 없는 물이 되어 말라 버렸다면, 그 빈 컵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하늘을 올려다보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칼은 자신의 턱에 까슬거리는 혓바닥이 닿는 감촉을 느끼며 슬쩍 웃었다.

“인간은 진짜 번거로운 존재야. 잠시 멍 때리는 시간이면 쉽게 감상적으로 변한다니까.”

엘리자벳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래도 좋아서 환장하겠는 게 뭔지 알아?”

너 말고도 과거의 전우영이나, 현재의 칼 린드버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사람이 늘어난 거.

사람의 말이라 짐승인 엘리자벳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제 주인이 진심으로 기뻐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제 자리에서 빙글 돌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여기 사는 동안 내 대나무 숲이 되어 줘서 고마웠어.”

칼이 엘리자벳의 앞발을 쥐며 같이 흔들었다.

착한 내 강아지. 죽을 때까지 잘해 줄 게.

속으로 꽁꽁 숨기고 들킬까 조마조마하는 날들은 완벽히 사라졌다.

아드리안은 칼의 모든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를 꽤 괜찮은 인간으로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칼은 아드리안과 함께 살며 매일 조금씩 되돌려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칼 린드버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고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애정을 나누는 법도 배워야 했다.

천천히.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그들의 아이를 생각하면 기대로 마음이 간질거렸다.

결핍 없이, 사랑스럽고 마음이 강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

혹시나 남아 있을지 모를 전우영의 그늘이 그를 가리지 않도록.

칼 린드버그는 변화하고 성장할 예정이었다.

아이라. 그러고 보니 가끔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칼 린드버그가 엘리자벳의 귓가에 속삭였다.

“남자는 그, 거기로 애를 낳는데. 그러다 터지면 어떻게 되는 건지 아직도 불안해. 넌 뭐 아는 거 있냐?”

“왕!”

저 해맑은 얼굴을 보니 엘리자벳도 사내가 애를 어떻게 낳는지는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아기 머리가 적어도 이 주먹보다는 클 텐데. 와, 씨. 어떡하지?”

가만히 주먹을 쥐어보다 아직도 이물감에 욱신욱신 쑤시기 시작하는 엉덩이를 두드리며 칼 린드버그가 이를 꽉 깨물었다.

“……공작님한테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다.”

여자나 남자나 아이를 낳는 일에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혼자 두려움에 떠는 것보다는 그것을 세 번이나 경험한 분께 조언을 구하는 게 좋을 테지.

“왕자님!”

한편 그렇게 주먹을 불끈 쥐고 마음을 다스리는 칼 린드버그에게 마르코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기사단의 말단 수습이 되어 누구보다 바쁘던 애가 사색이 되어 칼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지금 당장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야?”

덜컥 겁을 집어먹은 칼의 얼굴이 덩달아 새하얗게 질렸다.

“화, 황후 폐하께서 진통을 시작하셨어요!”

“뭐?”

아직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하잖아?

아니지, 막달에는 하루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셨지.

어째서 하필 지금 자신과 아드리안 헤네켄은 린드버그에 있는가.

황후 폐하께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문득 스쳐 지나가는 어머니의 모습과 더불어 엄습하는 지독한 트라우마에 칼 린드버그가 제 자리에 얼어붙었다.

“다리가, 다리가!”

칼은 자신의 허벅지를 퍽퍽 때렸다.

그때 아우우, 하고 길게 운 엘리자벳이 칼을 자신의 등에 업고 아드리안 헤네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허리가 아프고 엉덩이가 쑤시는 감각도 잊어버렸다. 아드리안의 말이 정신없이 제국으로 달리는 동안 칼 린드버그는 간절히 신을 찾았다.

황후의 연세는 이제 반백. 두 번째 출산은 그녀에게도 상당한 부담일 텐데.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는 팔뚝보다 작았던 아기 재영이, 출혈이 멎지 않았던 어머니.

아장아장 걷는 재영이의 손을 잡고 문병하러 갈 때마다 나날이 홀쭉해지던 볼.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그녀의 버석한 피부와 퀭한 눈가가 자꾸 어른거려 칼 린드버그는 눈도 감지 못하고 손을 모았다.

“괜찮아. 황후 폐하는 담대한 분이라 어렵지 않게 낳으실 거야.”

아드리안이 칼의 정수리에 턱을 올리고 중얼거렸다.

턱을 덜덜 떠는 칼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아드리안도 솔직히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두 사람이 황후의 출산을 지킬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칼 린드버그가 워낙 강경하여 이렇게 달려가고 있지만, 이동하는 동안에 처음으로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없는 일을 목격하게 되리라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맞아, 괜찮을 거야. 첫 출산도 아닌데. 금방 낳고 나오시겠지.”

칼 린드버그가 마치 주문처럼 되뇌었다.

황후 폐하와 어머니는 다르다.

다른 사람이야.

가난이 짙어 가중된 어머니의 괴로움과는 결이 달라.

최고의 의료진과 사랑하는 남편 옆에서. 강하고 따듯한 아들이 지키는 곳에서 순산하실 거다.

계속 중얼거리며 기도를 하는지 손을 맞잡고 있던 칼 린드버그가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산실 근처였다.

“글렌 폐하께서는 산실 안에 들어가 계십니다.”

황후가 아드리안 헤네켄을 낳았던 바로 그곳에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공작이 두 사람을 마중했다.

“진통이 길어져 다들 긴장 상태입니다.”

“진통이 왜 길어져요?”

칼 린드버그가 초점을 잃은 눈으로 굳게 닫힌 산실의 문을 보며 물었다.

“이유는 워낙 다양하여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밀어내는 힘이 약해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악!

갑자기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칼 린드버그의 어깨가 바짝 긴장했다.

의학 기술의 정점을 찍고있는, 칼 린드버그가 살았던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산모들은 쉽게 약해졌다.

태어나자마자 중환자실로 가는 아기들도 많았다.

아기와 산모가 무사해도 아이는 수십, 수백 가지의 바이러스와 싸워 이겨야만 어른이 되었다.

만고불변의 법칙이 그러했다.

저절로 태어나 저절로 크는 인간은 없었다.

아아아!

안에서 다시 큰 소리가 들렸다.

의료진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는 그녀의 비명 소리에 묻혔다.

칼이 눈을 질끈 감았다.

황후 폐하.

자신을 다정하게 품어 안심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신 분. 그녀와 아기가 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그는 또 작아지고 말 것이다.

“어, 어머니.”

작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아드리안이 흠칫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칼이 흐느꼈다. 엄마, 엄마, 하고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칼, 쉬이. 괜찮아.”

그가 황후를 통해 누구를 그리고 있는지 너무 잘 알아서 아드리안은 그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순간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열 평 남짓한 공간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아드리안을 제외한 그 누구도 칼 린드버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형언할 수 없는 그의 감정이 페로몬처럼 흘러나와 모두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헨드릭 공작은 두 청년의 등에 손을 얹었다.

탄생은 기쁨과 슬픔 모두를 동반하는 기묘한 경험이다.

당사자가 여러 번 경험해도 매번 새로운데 지켜보는 아들들은 오죽할까.

“태아도 산모도 쭉 건강했습니다. 그러니 지나친 염려는 하지 마세요.”

벨프리도 저렇게 애를 먹이며 태어났다고 말하며 공작이 두 사람을 소파에 앉혔다.

얼굴이 흥건하게 젖은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의 손을 꼭 붙들었다.

“벨프리를 낳을 때 말입니다. 저는 그야말로 지옥을 봤지 뭡니까. 눈앞이 번쩍거리고 하늘은 노래지는데 애는 나올 생각을 안 하더군요.”

칼과 아드리안의 얼굴도 노랗게 떴다.

안에서 악, 악, 하는 소리가 일정한 텀으로 들려왔지만, 공작은 의연하게 웃어 보였다.

“불안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세상이 두 번은 뒤집히는 것 같고 허리 아래에 감각이 없어지며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겠더라고요.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여신을 원망하는 때에 아기가 딱 나오더군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말랑하고 부드러운 그 몸을 끌어안으면 다시 세상이 제빛을 찾아요.”

그것도 제법 황홀한 색깔로 물든다고 공작이 꿈을 꾸는 듯 그날을 떠올렸다.

“아, 이 아이를 위해 내가 그렇게 아팠구나. 하니 또 스스로를 대견히 여기게 되고, 아기가 소중한 만큼 대공을 더 사랑하게 되었죠.”

그날 대공의 머리카락이 이만큼 빠졌다고 덧붙이며 공작이 쿡쿡 웃었다.

칼 린드버그가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아드리안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저보다도 강하신 분입니다. 저런 고통에 질 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두 분도 씩씩하게 아우를 마중하십시오.”

공작은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으아아앙!

그때 안에서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칼과 아드리안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깊은숨을 토해 냈다.

잠시 후 만면에 웃음을 띤 의원이 나와 황후와 아기가 모두 건강함을 알렸다.

“아무래도 형님들을 기다린다고 저렇게 애를 먹였나 봅니다.”

그제야 그 자리의 모두가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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