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43)화 (143/150)

잠에서 깨어난 아드리안은 당연히 그 옆을 지키고 있어야 할 사람이 없는 빈 공간을 더듬었다. 

“아, 또.”

이를 드득, 갈며 기지개를 켠 아드리안이 이내 구겨져 있던 인상을 펴고 설렁줄을 당겼다.

기다렸다는 듯 방 안으로 들어온 시종이 세숫물과 미지근한 차를 챙겼다.

“칼은 언제 나갔느냐?”

벌써 며칠째인지 모를 질문에 시종을 한결같이 대답했다.

“나가신 지 반 시간 정도 되셨습니다.”

“나 원 참.”

대체 애를 누가 낳은 건지 모르겠네.

신경질적으로 잔을 비우고 옷을 갈아입은 아드리안이 집 나간 배우자를 쫓는 것처럼 흉흉한 기세로 문을 열어젖혔다.

황후의 출산, 그날 이후로 벌써 세 달이 지났다.

그사이에 마르코와 엘리자벳을 포함한 헤네켄의 인력이 일부 제국으로 돌아왔고 황후는 빠르게 기력을 회복하여 복귀함에 따라 그간 수고한 헨드릭 공작이 긴 안식을 가지기로 했다.

 칼에게 할 말이 많아 보이던 맥켈런도 후작 부인의 출산으로 당분간 얌전히 영지로 돌아갔고.

한편 국경일이 정해짐과 동시에 한동안 제국은 축제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그 여파가 아직도 가시지 않아 사람들은 연일 황성으로 향하는 대로에 꽃잎을 깔았다.

세상은 예측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고 린드버그 왕국과 파르만 왕국의 결말을 반면교사 삼은 주변 왕국들도 점차 변화를 꾀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칼과 아드리안도 느긋하게 진정한 신혼의 맛을 즐기며 슬금슬금 혼인 일정을 잡아야지 않겠나 하고 있는데 뜻밖의 복병이 훼방을 놓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한참 어린 남동생이었다.

“부우, 바아.”

“샬린 헤네켄.”

아드리안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칼 린드버그의 품 안에 안긴 아기를 노려보았다.

단풍잎보다 작은 손이 칼의 손가락을 가만히 쥔다.

하얀 피부는 테레자의 것이었고 아드리안과 똑 닮은 초록 눈은 글렌의 것이며 오동통한 볼이 사랑스러운 녀석이다.

샬린이 제 형의 서슬 퍼런 눈초리는 안중에도 없는 듯 칼을 향해 방긋 웃어 보이자 칼 린드버그가 덩달아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구! 웃었어? 뭐가 그렇게 재미나서 웃었어?”

칼이 입술을 쭉 내밀며 아기의 손바닥에 쪽쪽 입을 맞췄다.

시녀들이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불세출의 미남과 동글동글 사랑스러운 아기의 조합이라니. 이만큼 설레는 조합도 드물지.

“칼 린드버그.”

눈치도 배우지 못한 아기를 상대로 싸울 순 없으니 아드리안의 질투는 고스란히 칼 린드버그의 뒤통수에 닿았다.

“아부, 아부부.”

부부, 아기가 소리 낼 때마다 뾰족 튀어나온 아기의 윗입술에 침방울이 맺혔다가 톡 터졌다.

“어휴, 귀여워라. 배불러? 기분이 좋아요?”

그랬구나아.

의미도 모호하며 알아들을 수도 없는 아기의 재롱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아드리안의 기척도 못 느낀 모양이었다.

“요놈 배 좀 봐라. 응?”

아주 눈을 반으로 접으며 아기의 오동통한 배를 쓰다듬는다.

제 머리를 쓸어 올린 아드리안이 하, 하고 정색을 했다.

시녀들이 뒤늦게 황태자의 눈치를 보기 시작할 때 아드리안은 성큼성큼 앉아 있는 칼의 뒷모습을 향해 다가갔다.

오늘은 무조건 그의 옷깃을 낚아채어 침실에 가둬 놓을 테다.

뒤늦게 부모의 관심을 나눈다고 불만을 가질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가뜩이나 분산되어 있는 칼의 관심을 동생에게 빼앗기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아드리안에겐 뒷모습만 보이고 있는 칼의 어깨에 기댄 채로 샬린이 제 형을 보고 푸우, 소리를 내며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어쩐지 얄미워서 손가락 끝으로 볼을 찔러 주려는 순간 칼이 샬린을 살살 흔들며 중얼거렸다.

“많이 먹고 쑥쑥 커라, 아프지 말고. 형님만큼 멋있어지면 좋겠다. 그치?”

아이를 어르며 등을 도닥이는 손길이 익숙하기도 하다.

그렇게 커다란 아드리안에게도 이렇게 약하고 작고 귀여운 때가 있었겠지.

뒤통수도, 콧날도 아드리안을 닮았구나.

노래를 하는 것처럼 중얼거리는 칼 때문에 아드리안은 금방이라도 칼의 뒷덜미를 낚아챌 것 같았던 손을 내렸다.

“바아.”

“어이고, 그래. 알았다고?”

대신 샬린이 입에 넣었던 손을 빼 아드리안에게 뻗었다.

“칼.”

아드리안은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칼을 불렀다.

아기의 손은 약간 끈적하고 젖내가 났다.

갑자기 불러 세워진 칼이 뒤를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어? 언제 왔어?”

“좀 전에.”

시녀들이 볼을 붉히거나 말거나,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의 입술에다 입을 맞췄다.

쪽 소리를 내고 맞닿았던 입술이 연거푸 닿았다 떨어지며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아기를 안고 있느라 차마 말리지 못한 칼이 어버버, 말문이 막혀 가만히 있는데 샬린이 돌연 턱을 바르르 떨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흐, 흐에에.”

“어, 어어? 운다.”

결국 아드리안에게서 한 걸음 물러선 칼이 아기를 둥개둥개 달랬다.

“갑자기 왜 이러지? 어디 아픈가?”

“흐에, 흐에.”

아드리안 헤네켄은 ‘저것이 지금 칼의 관심을 빼앗으려 하는구나.’ 하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이런 아드리안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샬린은 으엥, 으엥 소리를 내다가 그와 눈을 마주치자 이내 팔다리를 바동거리며 자지러지게 울었다.

결국 눈치 빠른 시녀가 다가왔다.

놀랍게도 시녀의 품에 안기자마자 샬린은 울음을 그쳤다.

“아아, 어디가 불편하셨나 봐요.”

서운했던 칼 린드버그가 입술을 비죽이며 자신의 납작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없어서 불편했나.

“여태 잘 놀아 놓고.”

“하루에도 수십 번 기분이 바뀌는데 일일이 의미 부여할 필요 있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칼의 어깨를 다정히 감싼 아드리안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대로 아침 식사를 하고 후원 산책을 잠깐 한 뒤 다시 침실로 돌아가는 게 목표다.

“그럼 오늘 하루도 재미나게 보내.”

미련이 듬뿍 남은 표정으로 샬린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칼이 아드리안의 손을 잡았다.

샬린이 아드리안을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훼방꾼이 아니라 천사였군. 고맙다.’

때맞춰 샬린의 방으로 들어오던 황후가 칼과 아드리안을 향해 다가와 다정하게 포옹했다.

“어머, 좋은 아침.”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칼의 얼굴이 단박에 환하게 물들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곳에서 보게 되는구나. 둘 다.”

황후의 말에 칼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니까 그 모습을 놓치는 게 아쉬워서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하게 됩니다.”

“후후, 기특해라.”

황후는 칼의 머리카락을 거침없이 쓰다듬었다.

누가 보면 칼 린드버그가 아들이고 아드리안이 데릴사위쯤 되는 줄 알 정도로 돈독해 보였다.

아드리안의 눈이 점차 가늘어지는 것을 본 황후가 히죽,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이렇게 듬직한 형님들이 있으니 샬린은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않니? 아드리안.”

“뭐, 지금은 좋겠죠.”

칼 린드버그가 샬린을 귀여워하는 것도 잠깐일 거라고, 꼭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며 아드리안은 속으로 음흉한 계획을 세웠다.

머리가 굵어지고 키가 커지면 또 어떨지 모른다며 괜한 말을 하는 아드리안 때문에 칼이 황후 몰래 그의 손을 흔들었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하냐.’

흥. 아드리안은 대꾸 없이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아드리안도 속으로는 예뻐 죽겠으면서 이런다니까요.”

하하하, 칼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톡톡 쳤다. 맞장구를 치라는 말임을 아는데도 아드리안이 고집스레 입을 다물자 칼은 황후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했다.

황후는 칼에게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아드리안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사랑이 사람을 유치하게 만든다지만, 쟤는 진짜 중증이네.”

뭐, 그런 모습도 귀여워 보이는 것이 황후 자신도 상당한 팔불출이지만 말이다.

* * *

벨프리는 린드버그에 남았다.

표면적으로야 아직도 도우며 수학할 부분이 많다고 말하지만 속내는 다르다는 것쯤은 대공과 공작, 황제와 황후 전부 알고 있었다.

한편 그는 지금 열띤 토론의 장에 있었다.

“훌륭한 학생은 훌륭한 교육자가 되어 또 다른 수재를 낳으니 예산은 이 정도가 적당합니다.”

“가뜩이나 세를 거둘 명목도 경황도 없는데, 학문에 그만큼을 지출하면 군사력이 약해집니다. 그러니 이만큼은 넘겨주시지요.”

“기존에 귀족들 위주로 돌아갔던 아카데미와는 전혀 다른 기관임을 경께서는 아직 인지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린드버그에 있는 젊은이들 중 태반이 실생활을 영위할 때 필요한 기본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자랐음을 염두에 두시지요.”

“글쎄요. 지식수준이 높다 한들 외부 세력이 쳐들어오면 어떨까요. 국방이 약해지는 것은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게 됩니다. 사실 린드버그 왕국도 그래서 망한 것 아닙니까?”

“어허, 공주님도 계신데 말씀 가려 하세요.”

린드버그 공국의 한 해 예산을 책정하는 일에 의외로 상당한 품이 들어가고 있었다.

틈틈이 차출된 신흥 귀족들은 서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동안 구귀족 세력들이 어떤 식으로 린드버그의 국력을 쇠약하게 했는지 자세히 아는 터라 더욱 열기는 뜨거워지고 있었다.

전반적 부분에서 야금야금 속이 곪아 있어 손을 안 댈 곳이 없었다는 것도 한몫했다.

“체력도 국력입니다, 나라의 기둥이 될 어린 백성들이 그 체력을 어디서부터 키워서 이 땅을 지킬지도 생각해 주십시오.”

벨프리가 속으로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고 레아는 그런 그를 돌아보다가 원탁을 두드려 주위를 환기했다.

고집도 세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한결같은 줏대를 자랑하는 것도 벨프리의 매력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모국도 아닌 곳을 위해 이렇게까지 피를 토하는 열정을 보여 주는 게.’

공왕비에 이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나?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놓치고 싶지 않아 레아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그녀에게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향기에 대부분 베타인 신흥 귀족들은 별 반응이 없었지만 벨프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또 무슨 엄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지.’

레아가 큼, 헛기침을 한번 한 뒤 자리를 정리했다.

“자, 여러분. 하루에 결정지을 문제가 아니긴 했습니다. 일단은 구귀족들에게 몰수한 재산과 제국의 전폭적인 지지로 당분간은 임시 예산을 편성하여 조금씩 손을 대어 봅시다. 그러나 지속 가능한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획기적인 안건을 분야별로 마련해 보시지요.”

결론 없는 논쟁은 서로 피로감만 가중할 뿐.

가뜩이나 피로한 이때에 미리 힘을 뺄 필요가 없었다.

레아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벨프리가 그녀의 눈짓에 미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저녁, 벨프리는 아드리안에게 뜬금없는 연락을 받았다.

- 애를 한 셋쯤 낳으라고, 그리고 하나는 제국으로 보내. 내가 친자식처럼 잘 키울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 아, 16살? 그 정도의 나이면 딱 좋겠다. 귀엽지도 예쁘지도 않을 때 말이야.

아드리안은 제 용건만 말하고는 연락을 끊어 버렸고 그 자리엔 어리둥절한 벨프리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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