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44)화 (144/150)

전생에 나라도, 자기 자신도 구하지 못했지만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온 덕일까. 칼 린드버그에겐 호강에 가까운 수업 시간이 주어졌다.

스무 명 이상의 선생이 배정됐고 하루에 6시간 이상 공부해야 했다.

보통의 귀족 자제들이라면 선생이 스무 명을 넘어가는 시점에서 반발하고 나섰을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그러나 황제와 황후, 그리고 아드리안의 엄격한 심사 기준을 거친 최고의 선생님들과 함께 공부할 기회라는 것이 칼에게는 마치 행운 같았다.

“정치, 외교, 법과 예절 등 황태자비가 갖춰야 할 소양.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제국의 평민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농업, 축산업, 어업, 기타 산업 및 상업이 주된 수업 내용이 되겠습니다.”

톡 튀어나온 배와 빨간 코끝이 자꾸만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드는 팁시 백작이 늘어놓는 설명에 마르코와 루루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이 정말 황태자 전하의 선생님이셨다고?”

“그렇다고 하던데.”

루루의 소곤거림에 마르코가 석연치 않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총괄은 제가 담당하여 왕자님께서 일간, 주간 목표를 이루었는지 확인하고 확인이 되지 않았다면 그 수업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으.

생각보다 빡빡한 수업 방식 때문에 루루와 마르코가 미간을 찌푸렸다.

특히 루루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밀어 내려고 애를 썼다.

‘빨리 결혼해서 애나 낳지, 누가 한국형 소설 아니랄까 봐.’

죽어서도 고통받는다며 조용히 혀를 차다 팁시 백작과 눈이 마주친 루루가 찔끔하며 시선을 돌렸다.

생긴 건 꼭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산타클로스처럼 생겨서는.

터무니없이 키 크고 몸 좋고 잘생긴 사람들만 사는 세상에서 오랜만에 만나 보는 인간다운 캐릭터라 호감이 살짝 생기려다가 쏙 들어갔다.

“흠, 왕자님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평소의 황태자비들이 받지 않는 순수 과학이나 기초 마법 등의 수업도 포함합니다. 아, 물론 검술과 승마를 포함한 체력 단련도 잊지 않으셔야겠지요.”

루루와 마르코는 으헥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혼인을 당기면서 동시에 칼 린드버그의 발목을 붙들 획기적인 방법을 찾아낸 아드리안 헤네켄의 검은 속내가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당사자인 칼 린드버그는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지만 말이다.

주먹구구식으로 찍어 먹듯 혼자 책을 읽는 것 이상의 체계적 교육을 받는 것.

그의 결핍을 채워 주고 아드리안의 옆에 당당히 설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줄 기회라 심지어 가슴이 뛰기까지 했다.

그런 반응이 흡족했던 팁시 백작은 들고 있던 종이를 팔락팔락 넘기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 다음 달에 있을 레아 린드버그 공왕의 대관식날을 포함하여 한 달 정도의 안식일을 허해 주시기로 하셨다지요? 그 전에 과목별 개요는 머릿속에 확실히 집어 놓으시길 바라겠습니다.”

탁.

백작이 문을 닫고 나가고 나서야 마르코가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왕자님, 어떡해요? 기사 수업만 해도 배울 게 산더미인데 저렇게 많은 과목을…….”

듣는 것만으로도 지겹다며 툴툴거리는 마르코의 머리를 칼이 토닥토닥 두들겼다.

“황태자비가 공짜로 얻어지는 자리는 아니니까. 배울 수 있을 때 열심히 해야지.”

“괜찮겠어? 완전 빡세 보이던데.”

루루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질렀다.

고등학교를 새로 다니는 기분일 텐데. 공부할 필요도 없고 사건에 휘말리지도 않는 편안한 K-빙의 인생은 정말 없는가.

하긴, 그랬으면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 황태자를 만나지도 않았겠지만.

루루는 의외로 그녀가 꿀 빠는 빙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은 간과해 버렸다.

루루와 칼 린드버그가 진짜 남매라는 것을 숨기면서도 자연스레 헤네켄 황성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 아드리안은 그녀의 원래 위치였던 ‘예언자’의 지위를 유지시켰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빠 덕에 작위도 없이 황성에 삽니다〉의 주인공이 되어 빈둥거리는 그녀와 달리 할 일이 많았던 마르코는 먼저 자리를 비웠다.

“야, 뭐 하나 물어보자. 오메가가 되면 눈물이 많아지고 그래?”

칼의 뜬금없는 질문에 루루가 “엥?” 하고 되물었다.

“아니, 그런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래?”

칼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왜? 요즘 눈물이 많아졌어? 낙엽 떨어지는 것만 봐도 울적하고 그래?”

오빠가 갑자기 우울증에라도 걸린 거 아닌가 덜컥 겁이 난 루루가 물었고 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냐. 근데 자꾸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와. 우울한 건 아니고 감동받았을 때도 울고, 슬플 때도 울고 그래.”

대부분의 감정 표현을 눈물로 하는 것 같다고 칼이 쓰게 웃었다.

“저번에는 잠에서 깬 샬린이 날 보며 방긋 웃는데 그걸 보고도 눈물이 찔끔 나오더라니까.”

내가 자기 친엄마도 아닌데, 부스스한 머리로 잼잼 손을 움직이며 웃는 것을 보며 괜히 가슴이 뜨거웠다.

“별일이네, 아드리안 전하도 옆에 계셨어?”

“어. 요즘은 나보다 먼저 일어나거든.”

아드리안은 차마 칼이 샬린에게 가는 발걸음을 막을 수 없어 차라리 그와 함께 샬린을 보러 가길 택했다.

칼이 샬린을 어르면 빼앗아 들어 대신 어르고 불편해 버둥거리기 시작할 때 잽싸게 담당 사용인에게 넘기고 방을 나온다.

사용인들이 두 분이 벌써 부모 예행연습이라도 하는 거냐고 소곤거려도 별수 없었다.

칼 덕분에 형제간 우애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하여간 눈물이 많아지는 것도 오메가 부작용인가 싶었다며 칼은 고개를 갸우뚱했고. 루루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오메가 부작용은 무슨, 그런 거 없어.”

“……그래?”

“짐작 가는 이유는 있어.”

“뭔데?”

루루는 칼의 양손을 가만히 쥐었다.

곱다. 고와. 고생이라곤 모르는 손이야.

“오빠, 원래 사람은 슬프면 눈물 나고, 감동받으면 눈물 나고, 화나도 눈물 나고 그래.”

“그렇긴 하지. 그렇지만.”

정도가 좀 지나친 것 같다고. 나중에는 주체를 못 하게 되는 거 아니냐며 농담 반 진담 반 하는 칼에게 루루가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동안 오빠는 지나치게 참았잖아. 달래 주는 사람이 있어야 울 맛이 나지. 달래 주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울어 봐야 뭐 해?”

“아.”

칼은 루루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알았다.

“아드리안 때문이구나.”

혼잣말처럼 그가 중얼거리자 루루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 팔불출이 옆에 있으니까 오빠도 안심하고 눈물 쏟는 거지 뭐.”

그러네. 루루의 말이 맞다.

달래 줄 사람이 옆에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이곳이기에 칼 린드버그는 울보가 되었다.

“나로서는 기쁜 일이야. 내가 너무 어려서, 오빠가 많은 걸 홀로 감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버티는 게 힘들어 모르는 척했어. 미안해.”

루루의 말꼬리가 촉촉하게 젖었다. 그녀도 처음으로 오빠와 제대로 마주 보게 된 기분이다.

저쪽에 살아 있을 때도 좀 더 표현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야, 새삼스럽게. 뭘.”

칼이 쑥스러움에 몸을 배배 꼬았다.

덩달아 멋쩍어진 루루가 팩, 칼의 손을 놓았다.

“아휴, 나도 간지러워서 못 하겠다 진짜. 나는 나대로 잘 살 테니까 오빠는 아드리안 품에서 빠져나올 생각 말고 잘 살라고.”

남매가 서로를 보며 볼을 붉힌다.

괜히 허공을 보고 딴청을 피웠다.

본분에 충실한 루루는 이 와중에도 생각했다.

‘아드리안이 있었으면 또 한바탕 질투심을 불태웠을 텐데. 그 꼴을 못 봐서 아쉽네.’

* * *

본디 살갑지 않았던 남매가 손을 맞잡은 것만으로 부끄러워하던 때, 질투 레이더가 발동한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음? 무슨 일 있으십니까?”

뒤늦게 자신이 버번 백작과 글렌 황제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주섬주섬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눈뜨고 졸다가 칼이 다른 놈 만나는 꿈이라도 꾼 거 아니냐?”

글렌이 키득거렸다.

“이런, 졸다니요. 안식일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지 결정하는 중요한 시간에.”

아드리안이 졸지 않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거드는 백작은 일부러 얄밉게 굴었다.

“그냥 좀 오싹해서 그렇습니다.”

“슬슬 더워지려 하는데 오싹하다니. 변명도 좀 그럴듯한 걸로 해 보려무나.”

말려들면 한도 끝도 없는 글렌의 농에 아드리안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던 거나 마저 하십시오.”

불퉁하게 한마디 던져 놓고 말이다.

버번 백작이 웃음을 삼켰다.

“그럼 다시 한번 짚어 드리겠습니다. 부루스트 키치너의 신병 인도를 시작으로 대관식은 총 사흘 진행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황태자 전하께서 참석하실 것은 둘째 날에 있을 대관식뿐이지만.”

“그래도 이틀은 더 머물러야겠지. 칼 그 애가 그러고 싶어 할 테니까.”

글렌은 내키는 대로 있다 오라고 말했으나 아드리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딱 대관식이 이루어지는 사흘만 머무를 겁니다.”

겨우 둘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생겼는데 하루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해외 순방에는 쓸데없는 인력과 시간 소모가 크니 제국 내의 지방을 돌아보는 걸로 타협한다는 생각도 여전하냐?”

“예. 가급적 한 도시에 일주일씩은 진득하게 붙어 있으려고 합니다.”

과연 내 아들이군. 글렌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버번 백작은 허공에다 주판을 튀기듯 손을 움직여 호위에 필요한 인원을 대폭 줄였다.

“한 장소에서 일주일을 머문다 치면 황실 소유의 별장이 있는 곳은 두 곳뿐이니. 다른 한 곳에서는 영주에게 신세를 져야 합니다.”

황도에서 동남으로 한 곳, 북서로 한 곳.

그렇게 두 군데에 황족의 휴양을 책임지는 장소가 있다. 둘 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며 안전을 최우선 하는 곳이라 완벽한 휴식이 보장되어 있어 무난히 선택할 만한 곳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곳은 어디가 좋을까.

칼 린드버그는 그가 제국 지리를 잘 모른다는 점을 들어 아드리안에게 일정 전부를 일임했다.

그래서 그의 어깨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이번 안식이 지나면 두 사람은 함부로 운신하기도 힘든 처지가 되니까, 최고의 추억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드물게 심사숙고하는 아드리안의 모습에 황제와 백작이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이곳으로 하겠습니다.”

“왠지 그럴 것 같았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왕자님께서도 분명히 흡족해하실 테지요.”

아드리안이 가리킨 곳은 적당히 활발하고, 적당히 외졌으며 빵도 맛있지만 ‘밥’은 더 맛있는 남부의 소도시였다.

볼이 통통하게 부풀어 기뻐할 칼을 생각하면 아드리안의 어깨도 절로 올라갔다.

기분이 좋아진 칼에게 받을 특별한 보상도 기대되고 말이다.

“그럼 영주에게 따로 기별을 넣어 두겠습니다. 맛있고 즐거운 추억을 선사해 주라 부탁하면 되겠습니까?”

“좋습니다.”

들뜬 아드리안의 표정에 백작의 마음에도 해가 뜨는 것 같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