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45)화 (145/150)

“다니엘 님?”

레아와 함께 아드리안 일행을 마중하러 나간 벨프리가 뜻밖의 인물을 만나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얼떨떨한 그의 반응과 달리 레아 린드버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서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오늘 대사제께서 직접 대관식을 주관하여 주시니 제게도 큰 광영입니다.”

금욕적인 사제복과 화려한 외모가 언뜻 부조화를 유발하지만 동시에 범접할 수 없는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져 린드버그 성의 사용인들의 관심이 전부 쏠려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주관하셔도 괜찮을 행사였지만 보는 눈과 제멋대로 떠드는 입을 의식하시어 제가 대신 걸음 하였습니다.”

다니엘의 정중한 말투에 사람들이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린드버그 왕국, 이제는 공국이 된 린드버그가 헤네켄 제국의 속국임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타국에서 대놓고 격하하는 것을 방지하고 싶었던 글렌의 배려였다.

“그렇게나 신경 써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모쪼록 평안한 사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레아는 서슴없이 고개를 숙였다.

다니엘은 황제와 거의 비슷한 지위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과한 행위는 아니었다. 그래도 벨프리 헨드릭은 감사를 표하고자 하는 그녀의 과감한 행동에 감동을 받았다.

다니엘이 황제의 대리라면 실무를 관장하는 것은 아드리안이라, 레아가 그와 자세한 일정을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뒤 벨프리는 오랜만에 칼과 독대하며 오찬을 가졌다.

“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으십니까?”

칼이 벨프리를 향해 물었다.

“아직은 이곳 생활이 만족스러워서요. 레아 공주님, 아니 공왕 전하와 함께하는 시간이 저를 성장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배시시 웃어 보이는 벨프리를 보던 칼은 조금 안도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아드리안을 좋아하고 있을지 모를 그가 보답받지 못하는 짝사랑에 속을 끓이며 어쩔 수 없이 린드버그에 머무르는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공작님께서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셨지만. 저로서는 벨프리가 어떤 압박에 억지로 남지 않았나 하고…….”

“당치도 않습니다. 새로운 것을 제 손으로 쌓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더라고요. 남들이 다 이뤄 놓은 것을 습득하기만 했던 터라 매일 새로 눈을 뜨는 기분이에요.”

한바탕 무언가 쏟아 놓은 것처럼 개운한 표정의 벨프리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칼이 그를 따라 푸스스 웃었다.

유치한 질투심도, 같잖은 동정심도 들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로 칼과 아드리안의 사이는 단단해진 모양이었다.

한편 벨프리도 칼 린드버그를 보며 더 이상 울렁거리지 않는 심장에 놀라는 중이었다.

단정하게 머리를 자르고 이마를 드러낸 그가 제 피부보다 밝게 빛나는 상아색의 정복을 입은 모습이, 전보다 기품 있어 보인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설레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고작 이런 걸로 내가 레아를 사랑한다고 생각해도 되는 건지는 미지수지만.’

식사를 마무리하며 입을 헹군 벨프리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왕자님은 전에 없이 의젓해 보이시는군요.”

정말 우러나서 한 말에 칼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정말입니까? 좀 황태자의 약혼자 같나요?”

이젠 밑장 뺄 것도 없이 황태자비가 될 칼 린드버그는 요즘 소시민적인 언동을 버리려 노력 중이었다.

태생부터 귀족으로 자란 벨프리에 비하면야 모자라겠지만 그도 어엿한 황실의 일원으로 거듭나고 싶었다.

글렌과 테레자처럼 백성을 위하는 마음은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기죽을 필요 없을 정도의 위엄을 갖춘, 어디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아드리안의 배우자로 서기 위한 노력이었다.

사소하게는 걸음을 옮기는 것, 아무에게나 허리를 굽히지 않는 것. 아랫사람에게 자연스레 하대하더라도 존중을 담아내는 것 등. 모든 것이 피나는 연습을 동반한 것들이다.

실로 대견한 발전이었지만 들떠 있는 칼의 반응에 괜스레 놀리고 싶어진 벨프리가 뚱하게 대답했다.

“그런 걸 대놓고 물어보는 걸 보니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엇.”

칼이 난처해하자 벨프리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농담입니다. 흡족할 만큼 귀족 같아 보여요.”

그제야 놀림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칼 린드버그가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여느 때처럼 어색하게 웃어넘길 거라 생각했던 벨프리가 오, 하며 입술을 모았다.

“그래도 요즘엔 주방에서 밥을 먹거나 하지는 않는다고요.”

불퉁하게 말하면서도 미미한 웃음기가 있었다.

“아, 그땐 진짜 영락없이 여물을 드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저도 맛있게 먹었지만요.”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그때의 일을 이야기할 수 있다니. 감개무량이다.

두 사람 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비슷한 마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매운 소스를 곁들여야 더 맛있을 거라 하셨는데, 그 맛은 언제 보여 주시는 겁니까?”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기억이 바랠 만도 하건만 그날의 식사가 인상이 깊었던 덕인지 드문드문 생각나는 것에, 벨프리가 반가워하며 얼른 물었다.

“맞아. 그거 맛보여 주기로 했지. 안타깝게도 제가 요즘은 무척 바빠서 재료도 못 찾고 있거든요. 나중에 한가해지면 누님과 함께 제국에 오세요. 그때는 꼭 대접하겠습니다.”

“엄청 까다로운 재료가 들어가나 봅니다.”

“단순한 재료이지만 맛을 내려면 재료별로 공을 들여 다듬고 묵혀야 하거든요. 제가 그것을 따라 한들 장인과 같은 맛이 나올지도 의문입니다. 그게 또 재미지만.”

먹는 얘기만 나오면 신이 나는지 칼 린드버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이런 부분은 못 고치는 건가 보다.’

벨프리는 안도했다.

제국의 동서남북을 다 뒤지고 타국의 산해진미도 발품 팔 필요 없이 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

어엿한 황태자의 비로, 또 황후로 제국인의 존경을 받았으면 좋겠지만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에 절지 않은 지금의 칼 린드버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자꾸 들었다.

그때 벨프리는 문득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생겨 입을 열었다.

“왕자님, 지금 행복하세요?”

칼 린드버그는 대답했다.

“무척 행복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밝고 건강한 미소에 벨프리도 마주 웃어 보였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진심으로 당신의 행복을 축하할 수 있어서.

벨프리는 마침내 첫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었다.

* * *

레아 린드버그의 대관식은 생각보다 큰 규모로 치러졌다.

당초에는 헤네켄 제국을 포함하여 국경을 맞대고 있는 단 세 곳의 국가에만 초대장을 보냈다. 그러나 린드버그의 변화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많은 나라에서 문의가 쇄도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추가로 초대장을 발송했다.

국경을 개방한 첫날. 끝없이 들어오는 사절과 선물의 행렬에 조금 질려 버린 칼이 혀를 내둘렀다.

“공왕 대관식에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이 와?”

“이때다 싶어 연줄을 대려는 거겠지. 저 중에서 레아 린드버그의 대관을 축하할 사람은 극히 일부고, 나머지는 그녀 뒤에 있는 제국과 손을 잡을 기회쯤으로 여길걸?”

그 속이 다 들여다보인다며 아드리안이 대꾸했다.

“허어, 이거 큰일이네.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겠어.”

재건축을 하며 규모가 현저히 작아진 성을 둘러보며 칼이 걱정스러움을 내비치자 아드리안은 그의 등을 껴안았다.

“참석하고 선물을 전달하는 행위로 성의는 다 보였으니 대관식이 끝나면 반은 자기 나라로 다시 갈 거야.”

“엥? 하루도 안 머무르고? 그랬다간 공국의 평판이 떨어질 텐데.”

제국 사람이 되긴 했으나 여전히 레아 린드버그의 남동생인 칼은 그것이 걱정되었다.

외교는 의외로 사소한 구멍으로도 쉽게 모양을 달리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무슨 의도로 찾아왔든지 간에 최소 하루 이상을 달려오는 사람들을 대관식이 끝나고 바로 돌려보내는 것은 나중에 말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아쉬운 쪽이 지는 법이지,”

“누님.”

두 사람이 서 있던 발코니로 다가온 레아 린드버그가 줄줄이 성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걱정 말아라, 초대 전에 미리 양해를 구해 뒀어. 전부가 다 그냥 돌아가는 건 아니고 거리와 규모를 고려하여 일부는 성안에, 또 일부는 성 밖에 머물 게다.”

“성 밖이라 하심은요?”

귀빈을 성 밖에 모시는 것은 괜찮은가?

칼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레아와 함께 들어온 벨프리가 덧붙여 설명했다.

“성 밖에 머무는 것은 그들이 데려온 잡역꾼들입니다.”

“수도의 정비도 끝났고 그들이 지낼 여관도 지정해 뒀지. 대관식 기간의 수도는 전에 없을 활기찬 축제의 장이 될 거야.”

“남은 건, 신나게 먹고 마시고 제 나라로 돌아간 사람들이 그들의 경험에 허풍을 더해 떠드는 것뿐이지요.”

“실제로 보지 못한 사람들 머릿속에는 현실보다 더 화려하고 멋진 그림으로 이 린드버그가 그려질 테지.”

그 생각만 하면 벌써부터 등골이 오싹하다며 마치 짠 것처럼 두 사람이 동시에 교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 뭐.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칼과 아드리안은 동시에 떨떠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죽이 척척 맞는 것도 그렇지만 다시 보니 두 사람의 의관이 비슷한 것도 신경 쓰였다.

포근한 질감의 같은 옷감. 미묘하게 색의 채도만 다른 것이 꼭 약혼이라도 치르는 사람을 위한 옷 같았다.

“벨프리 헨드릭, 공왕께 청혼이라도 받은 거냐?”

“아드리안!”

거침없이 나오는 질문에 칼이 아드리안의 팔을 잡아당겼고 벨프리의 얼굴은 홍당무가 됐다.

“아니, 뭐. 벨프리도 히트 사이클이 최소 한 번은 왔을 터인데, 공왕께서 함께 밤을 보내셨다면 응당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나 싶어 그렇습니다.”

터질 것 같은 벨프리의 얼굴에 칼이 당혹스러워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레아는 활짝 웃었다.

“아쉽게도 그런 일은 아직 없었습니다. 교제하지 않는 사람과 난잡하게 노는 취미는 없어서요. 황태자 전하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죽도 맞추고 옷도 맞춰 입고 한 지붕 밑에서 수개월을 살면서 입술도 아직 안 맞춰 봤다고?

칼은 도대체 저 둘이 무슨 관계를 유지하는 건가 하며 레아와 벨프리를 연신 번갈아 돌아보았다.

“제 지금 목표는 벨프리에게 최고의 알파로 인정을 받는 것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관문인 대관식 앞에 서 있는 거죠.”

“아직 구애 중이신 거로군요,”

짝에게 구애하기 위해 자신을 갈고닦는 것.

그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아는 아드리안이 안타까움을 담아 혀를 쯧쯧 찼다.

“그래도 자는 시간과 피치 못할 때를 제외하면 늘 함께 있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지금은.”

레아가 벨프리의 팔에 팔짱을 끼며 그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댔고 벨프리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섰다.

칼이 그제야 속으로 손뼉을 짝 치며 확신했다.

‘둘은 여전히 썸 타는 사이구나!’

아드리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필승하십시오.”

이미 다 넘어온 것 같지만.

칼과 아드리안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떠올랐다.

본인은 크게 자각하지 못한 듯하지만, 자신의 한쪽 팔에 팔짱을 낀 레아의 손등을 벨프리가 토닥토닥, 자연스레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