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46)화 (146/150)

톤 다운된 커튼이 부드러운 바람에 나부꼈다. 

날이 좋아 테라스의 창을 여니 잘 가꾸어진 정원의 꽃들이 너도나도 향기를 실어 보내며 내부를 물들였다.

그 덕에 부러 꽃 장식을 놓을 필요가 없어 대신 뿌리가 튼튼하고 잎사귀가 풍성한 식물을 곳곳에 놓아 공기를 정화하고 눈도 즐겁게 했다.

조잡하고 화려한 장식 말고 린드버그의 장인들이 한껏 솜씨를 부린 태피스트리를 늘어뜨리고 그 끝에는 레아 린드버그의 상징이자 곧 린드버그 공국의 상징인 맹금의 표식을 달았다.

귀빈들이 조금씩 홀 안으로 들어서자 악단이 세련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다처럼 푸른 바탕에 파도가 부서지는 듯 희고 풍성한 레이스로 장식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음악에 가사를 보태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사했다.

다들 주위를 둘러보며 음색에 귀 기울이느라 잡담을 나누는 것도 잊었다.

한편 움직임이 편하면서 얼룩이 쉽게 지지 않는 단정한 의복을 차려입은 사용인들이 분주히 다니며 귀빈들의 시중을 들었다.

그들은 듣는 귀는 열렸으나 말은 하지 못하는 처지로 자기들끼리는 손을 움직여 의사소통을 해 시선을 끌었고 그 중심에는 제니스가 있었다.

레아 린드버그의 요청에 따라 제니스는 오늘 시녀장이 아닌 귀빈으로 참석하여 아름답게 치장했지만, 한자리에 가만히 있는 대신 홀 곳곳을 천천히 이동하며 다른 사용인의 보고를 들었다.

이렇듯 린드버그의 변화는 급진적이나 자연스러웠다.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선택받은 이들에게만 개방된 2층 발코니석에서 홀을 내려다보던 사람들은 입이 떡 벌어진 외국의 사절을 보며 뿌듯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린드버그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하며 애썼던 제국민들이었다.

레아는 그들의 사명감과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개별 좌석을 내주고 사용인들도 따로 붙여 주었다.

귀족 평민 가릴 것 없는 융숭한 대접에 제국 사람들은 얼떨떨해했지만 누군가에겐 스승이니 받아 마땅한 대우라고 강조하는 레아 린드버그의 말에 어깨에 힘을 빼고 그들과 린드버그의 백성이 함께 일궈 놓은 것들을 지켜보았다.

물론 제니스의 수어 스승으로 따라온 자작의 아들도 그 사이에 있었다. 그는 연신 눈물을 닦아 냈다.

시작은 제니스 한 사람을 위해서였지만, 이내 그녀가 홀로 수어를 쓴들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면 안 쓰느니만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결국 수도 전역에 있는 신체 부자유한 사람들을 위해 몇 사람의 전문가가 더 린드버그의 문을 열고 들어왔고 덕분에 그것은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교육의 분야도 조금씩 확대되는 중이었다.

하지만 배움이 있다면 응당 써먹어 보아야 하는 것. 당시 소통할 기회가 없어 우왕좌왕하는 그들에게 손을 내민 건 다름 아닌 공왕이었다.

레아는 시범적으로 대관식 기간을 그들에게 내어주었다. 시시콜콜 떠들어 재끼면서도 그것을 누가 발설할까 걱정하는 것이 일인 귀빈 몇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사용인들이 손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눈 있는 자라면 다 볼 테고, 그들은 안심하며 이말 저말 다 뱉어 내고 눈치도 보지 않을 것이니

결국에는 다 레아의 귀에 들어올 것이라는 것도 간과한 채.

아니나 다를까, 대부분의 귀빈들이 세심한 챙김과 변모한 린드버그의 분위기에 감탄할 때, 일부 외국 귀족들은 선망과 질투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수준이 높아졌다 한들, 제국에 나라를 팔아 모방하는 수준이지요.”

간단한 다과와 함께 제공되는 샴페인에 얼큰하게 취한 누군가가 빈정거렸다.

“제국이 린드버그에 이렇게까지 헌신하는 것을 보면, 우리도 잘 키운 오메가 하나 진상할 것을 그랬습니다.”

그 곁에서 다른 이가 거들었다.

“젊은 왕은 이런 게 문제입니다. 혁신이다 뭐다 하며 역사를 지키는 것은 뒷전으로 하고 그저 이미지를 탈색하는 데 공을 들이는 것이, 쯧쯧.”

나이가 지긋한 외교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은 린드버그의 사용인들이 옆에 있든 말든 이것이 문제다, 저것이 문제다 하며 일일이 꼬투리를 잡았다.

요약하면, 외세를 끌어들여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고 남동생을 팔아 받은 대가로 제국이 뒷배를 봐주니 한심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대화를 고스란히 얻어들은 벨프리 헨드릭은 화를 내는 대신 조용히 그들의 나라와 지위를 적어 내려갔다.

누가 뭐라 하는 사람이 없으니 목소리는 더 커지고 내용은 대범해졌다.

“형제의 나라니 뭐니 그렇게 말하는 건 허울에 불과하고 마정석 광산을 얻어먹어 제국도 하는 수 없이 움직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후, 제국도 속이 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마법의 종식을 대비한다며 자기들끼리 마정석을 독점하는 꼴이라니. 발베니 대상단에선 어마어마한 수수료 감축을 요구했다는데, 그것을 받아들인 공왕도 한 치 앞을 모릅니다. 그렇지 않소?.”

“린드버그도 제국이 등 돌리면 끝장이겠군요. 마정석은 물론 우성 오메가도 빼앗겼으니.”

“지금에야 기세등등하지만 끝은 불 보듯 뻔합니다. 참 어리석기 짝이 없지.”

탁.

그때 벨프리가 종이를 엎어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 연회장으로 내려간 그는 거들먹거리는 늙은이들에게 거침없이 다가갔다.

“이거, 반가운 얼굴들을 다 봅니다?”

벨프리가 방긋, 하고 웃었다.

그 모습을 본 그들이 입을 꾹 다물고 안색을 검게 물들였다.

황제의 측근이며 대공의 배우자. 그것보다 좋은 정치적 수완으로 유명한 헨드릭 공작의 막내아들.

이 자리에서 벨프리 헨드릭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아무 말 못 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기 시작하자 벨프리는 손을 저었다. 대신 예의를 수프처럼 마셔 버린 자세로 털썩 그들 옆에 주저앉고는 신랄하게 혀를 움직였다.

“여기저기서 초대장을 달라고 성화였던 것 아시죠? 나 원 참. 저희 공왕님의 인기가 이렇게 하늘을 찌를 정도입니다.”

뜬금없는 말에 그들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고 벨프리는 이내 이를 드러냈다.

“해서 추가분을 급히 발송하느라 미처 거르지 못한 불청객이 다수 섞인 듯합니다. 그 때문에 연회장 공기가 살짝 탁해진 것 같군요.”

킁킁. 코끝을 움직이며 대놓고 그들을 향해 인상을 찌푸린 벨프리는 그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약간 몸을 물리자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환히 미소 지었다.

“공국이 되어서도 제국의 영원한 형제의 나라, 린드버그의 새 출발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안 그래요?”

벨프리가 연거푸 “맞죠?” 하고 대답을 종용해서 그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속은 부글부글 끓어도 그에게 뭐라 할 처지가 못 되는 터라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만족한 듯 벨프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앗차, 한 가지 더. 우리 제국의 예비 황태자비께서는 외모도 인간성도 대륙 제일이시라 다른 누가 와도 아드리안 전하께서는 돌아보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제국에서 그쪽으로 떨어뜨릴 빵가루도 한 톨 없는 것은 당연하고요. 그러니까 같잖은 소리는 참았다가 댁에 돌아가셔서 하십시오. 좋은 날 이마에 열나게 하지 말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이야기한 후 빈정거리며 돌아서는 벨프리의 뒤로 그들은 얼어붙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건방지다, 감히.’ 따위의 말을 붙이기엔 그들은 한미했고 저쪽은 너무 높았다.

결국 대관식을 보기도 전에 눈치를 보며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혀끝의 면도날’로 회자될 린드버그 공국의 칼날 외교, 그 서막이었다.

* * *

“레바 왕국은 결국 참석하지 않았군.”

홀을 내려다보던 칼이 아드리안의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개별 소파에 껄렁한 자세로 앉아 제 손을 주무르는 데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귀빈들을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듣자 하니, 이번에도 아일라 공주에게 사절단에 합류하기를 강요했는데, 공주가 거부한 모양이야.”

황태자비 수업을 들음과 동시에 황태자와 동일한 수준의 정보를 제공받는 칼이 걱정스럽다는 듯 목소리를 내었다.

아일라는 홀연히 린드버그를 떠나 레바로 돌아갔고 그 후에는 어떤 연락도 따로 취하지 않았다.

그녀가 떠난 직후 레바 왕국은 혼돈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마물이 날뛴 흔적을 지우기도 전에 아일라 공주의 아버지, 그러니까 현 레바의 왕은 몸져누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왕위 찬탈을 두고 이리저리 다툼까지 일어나 아직도 네가 갖네, 내가 갖네 하며 온갖 권모술수가 오간다고 했다.

“이 혼란한 때에도 아일라에게 우성 알파를 만날 유일한 기회라고 떠들었다던데.”

그게 도대체 뭐길래.

과거의 린드버그도 마찬가지지만 레바 왕국도 만만치 않은 돌아이들만 모였다. 칼이 제 관자놀이에 검지를 대고 빙글빙글 돌리며 혀를 찼다.

“그녀의 바탕은 나쁘지 않아. 어쨌든 공주고, 열성이라도 우성에 가까운 오메가니까. 그런 그녀가 여태 홀로 있어야 했던 건 부모의 그늘이 너무 짙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심드렁한 어조로 말하던 아드리안은 조금 일그러진 칼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어느덧 회장 안의 사람들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양쪽으로 선 귀빈들 정 중앙에 길게 레드카펫이 깔렸다.

다니엘을 보필하는 젊은 사제들과 성기사 몇이 먼저 들어와 단상 앞에 열을 맞춰 섰다.

“그녀 자신이 벗어날 의지가 부족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지?”

칼은 아드리안의 옆으로 몸을 당겨 앉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드리안은 자연스럽게 칼의 어깨를 감싸고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 생각은 그래.”

사실은 좀 더 신랄하게 비판하고 싶었다. 어려운 상황도 스스로 타개하는 칼 린드버그를 옆에 두어서 그런지 아드리안이 보는 아일라는 한심하기만 했다.

칼은 아드리안의 손에 깍지를 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드리안. 어떤 울타리는 너무 높고 단단해서 시야를 가려 버려. 그런 곳에서 스물몇 해를 살면 그 뒤에 다른 세상이 있는 건지 상상도 못 하게 되잖아. 하지만 아일라 공주는 레아 누님과의 만남을 통해 조금은 세상 밖을 엿보게 되었을 거야. 그것을 계기로 후에 그녀가 움직인다면, 나는 진심으로 응원할 것 같아.”

조곤조곤 말한 칼이 아드리안의 손을 꽉 붙들었다.

그때 악단의 연주 대신 사제들이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여신을 찬미하고 신의를 지키라 당부하며, 새날의 축복을 노래했다.

성가에 맞추어 다니엘이 입장하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아드리안은 목소리를 낮추고 칼에게 말했다.

“응원은 마음으로만 해. 그리고 그녀가 영원히 그 울타리 안에 갇힌다고 해도 그걸 도울 일은 없을 거다. 나도, 너도.”

눈을 부라리는 아드리안에게 칼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차피 도울 방법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칼 린드버그는 그의 인생과 타인의 인생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그는, 레아 린드버그의 대관식이 눈에 안 들어올 정도로 아드리안 헤네켄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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