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린드버그는 다니엘의 손끝에 묻은 성수가 레아 린드버그의 이마에 닿을 때, 그녀의 얼굴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빛깔로 물드는 것을 입을 떡 벌리고 보았다.
레아의 머리카락은 점차 짧아지더니 이제는 어깨 바로 위에서 흔들렸다.
그녀가 입은 옷은 치마와 상의가 분리된 의상이었는데, 상의 뒤쪽이 마치 연미복처럼 길게 늘어져 그 끝이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그녀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을 때 늘어진 의상이 팔락 소리를 내며 바닥에 펼쳐졌다.
그리고 이윽고 다니엘이 그녀의 왕관을 높이 들었다.
와아.
박혀 있는 스무 개의 마정석이 처음에는 투명했다가 레아의 머리에 왕관이 얹히는 순간 오색으로 빛을 발하다 이내 잠잠해졌다.
모두가 침을 삼키며 천천히 일어나는 그녀를 보았다.
상의가 펄럭거리며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 손잡이가 드러났다가 곧 모습을 감췄다.
드레스와 검이, 그리고 그녀의 왕관이 여성이자 알파이고, 동시에 공주에서 공왕이 된 인생 전부를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얼굴에 전례 없을 정도의 결연한 의지가비쳤다.
레아가 사제들의 성가를 뒤로하고 왕좌에 앉았다.
그때 어디선가 꽃잎을 가득 실은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근처에 꽃잎을 뿌려 놓고 사라졌다.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이내 모두에게 번져 그 소리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박수가 멈추고 사제들이 줄줄이 퇴장한 뒤 악단은 다시 명랑한 음악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레아 린드버그는 자신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인산인해가 된 곳에서 비스듬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이 가장 잘 닿는 곳에 벨프리가 있었고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 *
칼이 감각이 점점 없어지는 입꼬리 끝을 더듬자 아드리안은 그를 붙잡고 함께 살짝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아드리안과 칼, 레아와 벨프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엄격히 금한 후원에서 칼이 기지개를 쭈욱 켰다.
“반쪽짜리 왕족이라 몰랐는데,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
인사를 할 사람은 왜 그렇게 많은지.
그들과 인사를 나누며 짧은 사담을 곁들이는 동안에 그 안에 숨어 있는 정치적 동향이나 그들이 제국에 바라는 것을 은근히 파악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새삼스레 다 존경스럽더라니까. 두 분 폐하랑 벨프리랑 누님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칼이 크으, 소리를 내면서 엄지를 치켜들자 아드리안은 그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하며 물었다.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나?”
얼굴에 불만을 그득 담은 아드리안에게 칼이 짓궂게 말하곤 이내 피식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드리안은 매일 멋있지. 늘 존경스럽고, 또 사랑스럽고.”
이제 애정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거침이 없는 칼 린드버그였다.
아드리안의 무한 애정 공세가 거름이 되어 칼 린드버그는 머뭇거림을 그만 내려 두고, 사랑을 꽃피우기 위해 적극적인 태도를 견지하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아드리안은 칼을 덥석 안고 그의 볼에다가 입을 쪽쪽 맞췄다.
“겨우 여기다 입술을 맞춰 보네.”
말캉한 볼을 깨물다가 은근슬쩍 입술에 혀를 가져다 댄다.
칼이 기쁘게 응하며 입술을 벌리자 치열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입천장을 게걸스레 핥았다.
아까부터 칼의 목덜미에서 향기가 폴폴 올라와 계속 몸이 달았던 아드리안은 쿠션 위로 그를 눕히며 본격적으로 입을 맞췄다.
“하아.”
칼이 달뜬 한숨을 뱉어 내는 소리에 아드리안이 저도 모르게 칼의 상의를 들어 올리며 손가락을 밀어 넣으려는 그때, 벨프리가 대놓고 혀를 차며 나타났다.
“아, 저기요. 남의 후원에서는 좀 자중하십시오.”
벨프리가 이를 득득 갈았다.
진작 끝난 짝사랑은 둘째 치고 형제나 다름없는 아드리안의 적나라한 애정 행각이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아, 죄. 죄송.”
칼이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옷을 추스르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아드리안은 체, 하고 혀를 차면서도 칼 옆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와, 씨. 진짜 밖에서 일 치를 뻔했다.’
아드리안의 뜨거운 손바닥이 맨몸을 더듬을 때 저도 모르게 이대로 끝까지 달릴 생각을 했던 칼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벨프리는 두 사람이 누워 있던 파티오에 털썩 앉으며 아드리안을 노려보았다.
“금슬 좋은 건 알겠는데, 장소를 가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관식 내내 둘이 속닥속닥거리고, 손을 주무르면서. 제가 맞은편에서 그 꼴을 다 봤다고요.”
칼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달아올랐다.
“그게 뭐 어때서. 우리는 신혼이야.”
아드리안은 뉘 집 개가 짖나 하며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 모습에 더 화가 난 벨프리가 아드리안에게 거침없이 삿대질을 했다.
“어차피 내일부터 질리도록 붙어 있을 건데 뭐 하러 신혼인 티를 여기서 내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분은 엄밀히 따지면 신혼이 아니라 연애 중입니다! 공인되었다고 해서 애정 표현까지 공인할 필요가 있습니까?”
목에 핏대를 세운 채 말하는 벨프리는 그간 쌓인 게 많았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벨프리의 반응을 보고 한참을 머뭇거리던 칼이 사과를 건넸다.
“벨프리, 미안합니다.”
“아뇨, 왕자님께서는 제게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툭하면 덤비고 느끼한 말을 해 대는 이분이 문제지요.”
벨프리가 씩씩거리며 아드리안에게 불경한 눈빛을 보냈지만 당사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신 중간에 있던 칼이 안절부절못하며 벨프리를 달랬다.
“아니, 뭐, 저도 같이 즐겼고 그러니까…….”
“아, 알겠다. 너 지금 화났구나?”
아드리안이 칼의 말을 숭덩 자르고 벨프리에게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우리가 공왕 대관식에 집중하지 않아서. 맞지?”
뜬금없는 소리에 칼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벨프리의 얼굴이 화닥닥 달아올랐다.
“아, 아닙니다. 그냥, 아랫사람들도 많은데, 꼭 그.”
수상해 보일 정도로 당황하는 벨프리 때문에 더 당혹스러워하는 칼의 손을 다정히 쥐어 진정시키며 아드리안은 키득키득 웃었다.
“어쩐지 서슬 퍼렇게 노려보더라. 뭐냐? 이제 뭐 자기 알파라고 공공연히 티 내고 다니는 건가?”
“그런 겁니까? 교제는 아니라더니. 마음은 벌써 준 겁니까?”
정곡이었다.
누가 봐도 멋있고 아름답고 혼자 다 하는 레아 린드버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벨프리는 문득 맞은편 박스석에서 꽁냥대느라 정신없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순간 벨프리의 머릿속이 과열되었다.
공왕의 멋진 모습에 감동은 못할망정, 감히 신성한 대관식에다가 꿀을 발라?
하지만 그가 아무리 눈을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아도 아드리안과 칼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게 또 괜히 서운하고, 부러웠다.
벨프리도 누군가와 체온을 나누고 부대끼며 애정을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레아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그가 원하는 상대가 레아 린드버그임을 확신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 * *
그렇게 적당히 바쁜 시간이 끝나 바깥 공기 좀 쐬려고 나왔더니 이 소름 돋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여기서도 이러고 있는 거 아닌가.
아니, 이곳을 지키는 병사가 수십에, 필요하면 달려 나오려고 대기하는 사용인이 열댓 명이다.
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저 꼴을 봐야 하지, 으!
웬만하면 그냥 자리를 피하려고 했건만 짜증이 솟구친 벨프리는 한마디 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본전도 못 건지고 부부 사기단, 아니 부부 놀림단에게 붙들렸지만.
“저는 두 분 사이를 쌍수 들고 환영합니다. 너무 잘 어울려요. 그것은 외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벨프리의 지식 탐구에 대한 열정과 아버님에게 물려받은 정치적 감각이 레아 누님의 것과 닮아 있는 것 같아서요!”
당사자보다 더 들떠 보이는 칼 린드버그의 말에 벨프리가 “그, 그런가요?”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칼은 이때다 싶어 벨프리의 등을 팍팍 떠밀었다.
레아의 장점을 줄줄이 나열하고 벨프리를 칭찬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인 것으로 귀결되었다.
콧방귀를 뀌고 돌아서면 그만인데도 벨프리는 더 듣고 싶었다.
그와 레아 린드버그와의 사이에 장애물은 없다 봐야 했다. 마음도 이미 줬다. 다만 ‘연애. 그거 먹는 건가요?’의 상태로 살아온 20년이 자꾸 벨프리의 확신을 깎아 먹고 있었지만.
벨프리의 표정에서 무언가 읽어 낸 아드리안은 칼의 손목을 잡아당겨 그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그의 귓가에 대고 “네가 없으니 허벅지가 시리다.”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여름에 허벅지가 시리기는 개뿔.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얌전히 아드리안의 허벅지를 데우는 칼 린드버그도 그렇고, 아드리안 전하야 원래 능글맞은 구석이 있었다 치지만 왕자님까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차라리 타국의 귀족들에게 시달리더라도 먼발치에서 레아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벨프리가 이마를 짚으며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갈까 말까 생각할 때 아드리안은 장난기를 지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첫 히트, 왔다 갔지?”
벨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땠느냐.”
아드리안은 재차 물었다. 벨프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땠냐고?
“두 번은 겪기 싫은 경험이었습니다.”
내 몸 같지 않은 감각. 시트가 닿는 한미한 감촉에도 몸서리치며 울고. 그 자리에 없는 알파를 원망하며, 아무나 붙들고 해갈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
억제 효과가 있는 마정석을 쓴 뒤 얼마나 자괴감에 시달렸는지 모른다.
잠시지만 아무나 괜찮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마치 몸을 파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구 한 사람이 아닌, 불특정의 알파를 원하는 것처럼.
그 마음을 아는 칼이 염려 어린 시선을 던졌다.
칼의 첫 히트는 미미했고, 다행스럽게도 그 자리에는 아드리안이 있었다. 그다음부터 아직까지도 본격적인 히트는 오지 않은 듯했다.
다만 아드리안과 몸을 겹치는 매 순간이 히트처럼 뜨겁고 강렬했고, 아드리안의 러트가 찾아올 때면 칼도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유사 히트를 겪었다.
짝과 함께 수십 번의 밤을 보낸 자신도 아직 경험할 때마다 생경한데, 벨프리는 오죽할까 싶다.
평생을 베타로 살았고, 고위 귀족으로 살았던 터라 벨프리의 고통은 남들의 두세 배는 되었을 것이다.
아드리안은 칼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을 통해 그가 벨프리를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차렸다.
“베타가 아닌 형질자가, 그것도 우성의 형질자가 홀로 지내는 그 긴 시간을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너는 잘 알 거야.”
당연한 말이었다. 아드리안의 가까이에 있었던 터라 벨프리는 고스란히 그의 고통을 지켜봐 왔다.
그 시간을 돌이켜 보면 늘 칼 린드버그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그만큼 아드리안은 괴로워했었다.
벨프리가 고개를 수그렸고 아드리안이 이때다 싶어 강하게 말했다.
“네 마음에 확신이 섰다면 미루지 말거라. 너에겐 히트를 한 번 견디는 것도 큰일이었겠지만 공왕께선 벌써 열 번의 해가 넘어간 동안 러트를 혼자 견디고 계셨다는 것을 알아야지. 확신하건대, 네가 준비될 때까지 그녀는 계속 기다릴 거야.”
오메가의 히트만큼 괴로운 알파의 러트.
둘이 합쳐 하나가 되기 위한 달콤한 과정이지만 사람은 짐승과 달라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알아서 해결해야만 했고, 그건 그냥 고통에 불과했다.
맞다. 맞아.
벨프리의 눈앞에 순간 불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레아의 인내심은 벨프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고 단단했다.
그녀를 더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벨프리는 아드리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곧 헐레벌떡 달려가는 벨프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드리안과 칼이 흐뭇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