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 (150)화 (150/150)

“왕자님, 전하 좀 어떻게 해 주세요.” 

벨프리가 징징 우는소리를 했다.

대공의 생일이라 모처럼 제국에 돌아와 있는 벨프리에게 아드리안은 만날 때마다 고문 같은 짓을 했다.

존재감이 보통이 아닌 반지를 들이밀며 ‘너는 이런 거 못 받아 봤지?’ 하고 자랑하는 통에 귀가 썩어 버릴 지경이었다.

“괜한 짓을 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두 분이 시도 때도 없이 엉겨 붙어 사랑을 확인하는 통에 황성으로 들어오는 것이 두려운데, 그 위에 ‘먼저 받은 청혼’을 얹어 드리다니요.”

오메가가 하든 알파가 하든, 남자가 하든 여자가 하든 상관은 없지만. 보통은 작위가 높은 쪽이 청혼을 하는 게 통념에 가까웠던 터라 칼 린드버그의 청혼은 황성에 생각보다 큰 여파를 가져왔다.

그냥 청혼도 아니고 전 재산을 다 바친 청혼이라 더 회자되고 있었다.

오죽하면 황제가 달려와서 정말이냐고 연거푸 묻지를 않았겠냐고.

“다 좋은데 공왕 전하께만은 비밀로 해 주시지, 그분은 은근히 아드리안 전하와 견주려 하신다는 말이에요.”

그 탓에 벨프리는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분이 아드리안 전하를 본따 청혼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것보다 더한 것을 벨프리에게 해 주기 위해 뭔가 준비하고 있다는 게 공포였다.

“그 이성적이고 냉철한 분께서 외부에서 들어온 저를 대놓고 편애하는 걸로도 요즘 이리저리 말이 나오는데, 이러다 청혼 예산을 따로 편성하실까 봐 걱정입니다.”

“누님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시겠습니까?”

“저도 아니라고 믿고는 있지만, 요즘의 공왕 전하를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니까요.”

레아의 애정 공세는 의외로 과감하고 저돌적이었다.

아드리안을 통해 간접 경험을 충분히 쌓아 둔 벨프리가 당황할 정도다.

어흑, 하며 고개를 수그리는 그의 어깨를 칼이 말없이 두드렸다.

달리 해 줄 말이 없었다. 말은 저리 해도 한창 불타는 사이에 끼어들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칼이 먼저 조용히 일어나 다른 목적지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루루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서 있었다.

‘아이고.’

그가 들어온 곳은 다름 아닌 황성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는 제1 도서관.

요즘 황성에서 사용인들을 모아 무슨 모임을 만들었다는 루루가 도서관에 살다시피 한다는 것을 간과했던 탓이다.

칼이 이마를 탁 쳤다.

“오빠! 아드리안이 더 심각한 팔불출 다정공이 되어 버렸잖아. 이거 어떻게 수습할 거야?”

그녀가 눈을 부라렸다.

“언제는 팔불출이라 다행이라며?”

칼이 뚱하게 받아치자 루루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하고 단호히 말했다.

아드리안은 원래도 다정했고 지금은 좀 더 다정해졌을 뿐인데. 그게 뭐 어쨌다고 저렇게까지 열을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쫄깃한 맛이 사라져 버렸어. 아후, 내 팔자야.”

“팔자까지 나올 문제냐?”

루루가 바닥에 발을 탕탕 굴렀다.

칼 린드버그가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애지중지 키워 놨더니 어디서 이런 물이 들었나, 저번에는 낯 뜨거워 보지도 못할 무슨 그림책을 가지고 와서 이걸 시도해 보라느니, 저걸 시도해 보라느니 훈수를 두기까지 했다.

루루가 칼의 손을 꼭 잡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한 번 더 도망쳐봐. 다정한 놈이 눈 돌아갔을 때가 정말 맛도리인 거 몰라?”

그런 거 몰라!

루루의 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제가 도망을 언제 쳤다고, 도망이라는 건 진심으로 그 사람에게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는 게 아닌가?

지금처럼.

머리를 긁적이며 후다닥 도서관 밖으로 나온 칼 린드버그가 복도를 서성였다.

모처럼 수업이 없는 날이라 좀 돌아다녀 볼까 했더니 이리저리 시달리기나 하고.

“왕자님!”

귀찮은 게 하나 더 붙었다.

갑옷에 망토를 두른 키가 큰 여인이 반가워하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맥켈런 후작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칼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돌아서서 척척 앞서 나갔으나 후작은 단 몇 걸음 만에 그를 따라잡았다.

“저희 순수 마법에 대해 이야기하다 말지 않았나요?”

마저 이야기를 나눠 보아요!

하면서 계속 쫓아오는 후작에게 칼이 발걸음을 빨리하며 대충 대꾸했다.

“저는 순수 마법 따위 모른다고, 아니, 모르지는 않지만 이제 입문 단계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잖습니까?”

“그것은 학문적 관점에서나 그렇고, 왕자님은 이미 경지에 다다른 마법사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마정석과 수식을 사용하지 않고도 손끝으로 부리는 무궁무진한 마법의 세계! 그걸로 저희 헤네켄 제국을 진정한 대륙 제패의 길로 인도해 주시고.”

제국의 위세가 기울고 기울어, 풍전등화처럼 꺼지기 직전이라면 모를까 사서 먼치킨 노릇을 하는 건 관두기로 한 칼이 후작에게 소리쳤다.

“글렌 폐하께서 그것을 허락하신다면 제가 기꺼이 돕겠습니다!”

“호오? 약속하신 겁니다?”

맥켈런이 오던 길을 되돌아 사라졌다.

그제서야 칼 린드버그가 휴, 한숨을 쉬었다.

마법도 마찬가지지만, 칼 린드버그를 그렇게 써먹을 리가 없는 글렌은 한동안 맥켈런에게 시달리겠지.

글렌 폐하, 죄송합니다.

이제 갈 곳은 그의 방, 아니, 지금은 그와 아드리안이 함께 사용하는 침실뿐이었다.

칼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가, 이내 주변을 의식하며 다시 허리를 폈다.

탁.

그때 칼은 누군가와 부딪혔다.

살짝 가볍게 부딪힌 것 같은데 몸이 휘청거렸다.

잠시 비틀거린 칼의 어깨를 맞은편에 있던 사람이 쥐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습니다.”

칼 린드버그가 그 사람을 올려다보고는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 떴다.

거대한 산 같은 남자. 갑옷을 단단히 갖춰 입은 금발의 사내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얼굴로 칼의 팔을 놓고, 그를 아래위로 살폈다.

칼은 머릿속을 뒤적여 희미하게 그 사람을 기억해 냈다.

“듀벨, 경?”

“비 전하.”

듀벨은 다른 기사들처럼 경례를 붙이거나 하지 않으면서도 칼을 비 전하라 칭했다.

“아직은 아닙니다만.”

듣기에 나쁘지 않았던 터라 칼은 볼을 긁었다.

신전 밖으로 잘 안 나오는 사람이 황성에는 무슨 일일까.

“어쩐 일로 황성에 걸음을 다 하셨습니까? 혹시 대사제님께서 와 계신가요?”

듀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버번 백작님께 볼일이 있어 찾아왔다가 돌아가는 길입니다.”

아아, 황제에게도 크게 예를 차리지 않는 듀벨이 황성에서 유일하게 극진히 모시는 사람이 버번 백작이라고 했지.

“백작님께서 가끔 세상의 더러운 공기를 맛보아야 성력도 좋아진다고 하셔서.”

“그렇군요. 종종 나오셔야겠습니다.”

성력과 더러운 세상의 공기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린 나이에 입단하여 세상과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젊은 성기사를 안타까워하는 백작의 마음은 아는 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맞장구를 쳤다.

“그럼 이만.”

그리고 돌아서려는 칼 린드버그를 듀벨이 불러 세웠다.

“비 전하.”

“예?”

“여신께서는 무슨 결정을 내리시든지 반드시 인과 관계를 염두에 두십니다.”

칼은 그를 돌아보며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다만 그것이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영역일 때가 많기 때문에, 순응하고 따를 수밖에 없지요.”

듀벨은 진지했고, 칼은 여전히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이어진 그의 말에 칼 린드버그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떠졌다.

“모진 고초로 얼룩진 지난 생을 구태여 잊어버릴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신께서는 치밀한 계산을 통해 당신을 이곳에 부르셨고, 그 계획 말미에는 당신이 행복이 있었을 테니까요.”

“그 말씀은…….”

제가 다른 세상에서 온 영혼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미처 잇지 못한 질문이 칼 린드버그의 가슴께에 얹혔다.

성력이, 무섭구나.

듀벨은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선명히 떠오른 칼의 얼굴을 보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미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분은 사랑으로 실패하고 사랑으로 구원받으셨습니다. 그 때문에 사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게 인간끼리의 사랑이든, 지나가는 짐승을 이쁘게 여기는 애정이든, 혹은 주변의 모든 것을 귀애하는 마음이든 간에요.”

칼 린드버그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질문을 던지지 마십시오. 조급해하지도 마십시오. 그냥 걷다 보면 그분의 바람대로 되겠지요. 다행스럽게도 그분께서는 당신의 지난 삶과, 또 현재의 삶을 더불어 흡족해하시는 듯 보입니다.”

덧붙인 듀벨은 칼이 “저기…….” 하고 부르는데도 휙 돌아서 사라져 버렸다.

대사제도 아니고 비슷한 인간이라 여겼던 성기사의 말에, 칼의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잠시 제자리에 서 있던 칼은 다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냥 걷다 보면.”

듀벨의 말을 곱씹으며.

* * *

약간 멍한 상태로 방으로 돌아온 칼 린드버그에게 엘리자벳이 달려들었다.

“컹컹!”

어딜 다녀온 건지 흙이 잔뜩 묻은 발이 도장처럼 칼의 옷에 찍혔다.

“아앗!”

엘리자벳에 힘에 못 이겨 줄을 놓친 시녀가 울상을 지으며 달려왔다.

“어떡하죠? 왕자님 옷이!”

“아니야. 괜찮다. 나는 이대로 엘리자벳과 함께 씻을 테니 새 옷을 준비해다오.”

처음 만나던 날의 마르코만큼 어린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마르코는 더 이상 칼 린드버그의 몸종이 아니라 어엿한 헤네켄 제국의 기사 수련생이라 엘리자벳의 산책은 다른 사용인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상당히 날을 세워 다들 두려워했지만, 칼 린드버그의 타이름에 엘리자벳은 금방 황성의 새 명물로 거듭났다.

칼 린드버그가 손수 엘리자벳의 털을 문질러 거품을 내며 스펀지 같은 커다란 발바닥을 주물렀다.

“왕 크니까 왕 귀여운 내 강아지.”

“아우, 아우!”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중얼거리는 칼의 목소리에 맞추어 엘리자벳이 따라 울었다.

약간 김이 서린 욕실 창밖으로 타는 듯 노을이 펼쳐졌다.

“여신께서는 내 초조함을 다 알고 계셨나 봐. 엘리자벳.”

엘리자벳과 함께 체온보다 살짝 높은 욕조에 몸을 담그며 노을을 보던 칼이 말했다.

“아우?”

“나도 모르게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어 발버둥 쳤던 것도 다 아시고 계셨나 봐. 근데,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네?”

할짝.

칼의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오는 물방울을 핥은 엘리자벳이, 그렇구나. 동조하듯 씩 웃어 보인다.

듀벨은 마지막에 말했다.

〈그분은 자식들이 전부 행복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중요한 건 종교를 떠나 여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살고 있느냐의 문제이지요.〉

어쩌면 큰 의미 없이 설교하듯 말한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듀벨의 말로 칼은 확신했다.

이전의 인생을 후회할 필요가 없었노라고.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인생이 없었으면 지금의 칼 린드버그도 없었을 테니까.

칼은 입술을 물에 담그고 푸르르, 물거품을 만들었다. 엘리자벳이 그것을 따라 하며 코를 담갔다가 푸하, 소리를 내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게 웃겨서 엘리자벳을 쓰다듬으며 웃는데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이런 발칙한 짐승을 보았나.”

“어, 왔어?”

아드리안은 대꾸도 안 하고 훌렁훌렁 옷을 벗어젖히고는 그대로 욕조에 풍덩 들어왔다.

“어디 날 두고, 외간 짐승이랑 목욕을 해?”

그렇게 말하면서 아드리안이 엘리자벳에게 물을 튀겼고 성질이 난 엘리자벳이 아드리안에게 달려들면서 수영장처럼 넓은 욕조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린애들처럼 투덕거리는 모습에 가슴이 간지러웠던 칼 린드버그가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미치도록 좋아서.

웃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늘 웃는게 습관이 된 몸이었지만, 진심으로 즐거워서 웃는 건 아드리안 헤네켄과 마음이 통한 후였다.

칼 린드버그는 그 사실을 뇌리에 새기고 마음껏 웃었다.

〈끝〉

(후기)

안녕하세요, 리다무로 처음 인사드리는 고래꼬리입니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칼 린드버그와 아드리안 헤네켄, 그리고 다른 소중한 등장인물들을 아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직은 미숙하지만 봐주시는 독자님들과 지탱해주시는 출판사 덕분에 무사히 연재를 종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매 회차를 쓰고 수정하는 시간이 대부분 행복했습니다. 

글을 쓰는 제게도 그러했던 만큼 여러분들에게도 아깝지 않은 시간이었길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짧은 휴식 시간을 거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본편의 오탈자 수정 및 설정 오류등을 바로잡고, 아직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지라 금방 외전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미움은 조금, 사랑은 많은 한 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거듭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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