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안 푸드 트럭 사장님 224화
얼음이 가득 담긴 물컵보다 더욱 서슬 퍼런 말에 주혁은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입은 미소를 가득 머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지은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주혁은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애쓰며 말없이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감사히 먹었습니다. 오랜만에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더 안 드세요?”
“네, 충분…… 한 것 같습니다.”
매일 밥 두 공기는 기본이고 세 공기까지 거뜬하게 먹어 치우던 주혁이 밥을 채 반절도 먹지 않고 숟가락을 내려놓는 모습에 지은이 한숨을 쉬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밥이 별로 맛이 없었나 보네요.”
“…….”
“주혁 씨가 밥을 남기는 걸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제 음식이 이제 질리신 건가…….”
그렇게 말하며 주혁이 남긴 밥을 바라보는 지은의 얼굴은 정말로 쓸쓸해 보였다. 거기에 ‘밥도 아직 많이 남았는데…….’라며 읊조리자 주혁은 심하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주혁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어떻게 지은의 음식이 질릴 수 있단 말인가. 솔직히 전력을 다해 뛰어왔기에 주혁은 지금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지은이 차려 준 참치김치찌개와 두부구이, 거기에 계란프라이를 비롯해 하나하나 손맛과 정성이 담긴 반찬들로 가득 찬 이 정갈한 밥상은 주혁에게 있어서 언제나 삶의 활력소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저 이 자리를 잠시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변명을 둘러댔던 것뿐인데 정말로 아쉬워하는 지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주혁은 자신이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거기에 자신처럼 숟가락을 내려놓으려 했던 까망이가 그런 지은의 반응에 말없이 김치찌개 국물을 떠먹고 있는 모습을 보며 주혁은 일종의 배신감까지 느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라는 뜻과 함께 제발 살려 달라는 구조 요청을 눈빛으로 보내자 까망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은에게 말했다.
<주인이 해 준 밥은 언제나 맛있다냥.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냥.>
“……!!”
그런 의미로 부른 구조대가 아니었는데, 자신만 쏙 살겠다고 구조 요청을 거부한 까망이의 애교에 지은이 피식 미소를 짓고는 까망이의 앞에 주혁 몫의 계란프라이를 밀어주며 말했다.
“많이 먹어, 민까망.”
<고맙다냥!>
“지은 씨…….”
주혁이 다급하게 지은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그녀의 손에는 주혁의 숟가락과 젓가락, 그리고 아직 반절도 채 먹지 못한 밥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밥그릇이 들린 상태였다.
“다 드셨다고 하셨으니까 이건 치울게요?”
“……아.”
“아 참. 그리고 오늘 후식은 없어요.”
콰아앙-
식사 이후에 후식과 함께 커피나 차를 즐겨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지은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통보에 주혁의 얼굴이 처참해졌다.
그런 주혁에게서 매정하게 등을 돌리고는 싱크대에 그릇들을 처리한 지은은 방으로 횅하니 들어가 버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마자 얼굴을 감싸 쥐는 주혁에게 당황한 낯빛을 숨기지 못한 까망이가 중얼거렸다.
<……비상사태다.>
“그런 것 같습니다.”
<주인이 후식을 제공하지 않다니. 정말 큰일이다. 인간들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지?>
“그걸 저에게 물어보신다 하셔도 잘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왜 굳이 그런 쓸데없는 말을 꺼내서! 예전과 지금은 다르다는 걸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애초에 주혁이 지은의 각성을 걸고넘어진 것부터가 이 사태의 시발점이었다. 고개를 쭉 빼서 굳게 닫힌 지은의 방문을 확인한 까망이가 말했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다.>
“확실합니까? 대리자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그 당시의 지은 씨는…….”
<그때랑 지금은 상황 자체가 다르니까.>
단호한 까망이의 말에도 주혁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분명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어떤 정령왕도 정화하지 못했던 그 당시의 창조의 기운의 힘은 신에게 주도권이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창조의 대리자라 할지라도 사실상 그 힘을 사용하기 위해선 신과의 보이지 않는 치열한 싸움을 해야 했다.
회복되지 않은 창조의 힘을 끌어오는 것은 지은의 몸에 엄청난 부담을 안겼다. 그렇기에 지은의 몸은 계속해서 약해져 갔고, 약해진 몸과 함께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정신은 신의 정신 지배를 허용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 것 같은 몸을 끌고도 지상에 쏟아져 나오는 타락의 기운에 맞서 싸웠던 지은의 모습을 주혁은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결코 그렇게 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사람들을 구하는 것만을 생각했던 지은을 결국 창조의 공간 안에 구금한 것은 까망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남아 있는 창조의 기운과 함께 자신의 생명력을 모두 불태워 모든 것을 되돌려 처음부터 다시 싸울 수 있는 전장을 만들었던 지은이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너무나 힘들었고 외로웠던 지은은 자신이 다시 이 세계에 주인공으로 선택받는 대신 그저 지켜보길 원했다. 비록 그동안의 기억은 모두 없어질지라도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의지를 이어 대신 싸워 주길 원했다.
<사실 이번 회차에만 주인이 등장한 건 아닐 거다.>
“저희가 찾지 못했을 수도 있고, 스스로 등장하지 않기를 원했던 것일지도 모르죠.”
<그래, 그러니까 이번에는 지켜 내야만 해. 그리고 그게 바로 나와 너의 역할이기도 하고. 지금부터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주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말을 내뱉으며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까망이의 귀가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난 이만. 뒤를 잘 부탁하지.>
“네?”
<이것도 구도자의 역할이다. 알아서 답을 찾도록.>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까망이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닫혀 있던 방문이 벌컥 열리며 지은이 거실로 나왔다.
“까망이는 도망쳤네요?”
“……아.”
서늘한 지은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주혁은 방금 전까지 지은을 지키겠다고 말하던 까망이가 자신을 두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심기가 불편한 지은을 자신에게 떠넘긴 까망이를 마음속으로 욕하며 주혁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설거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지은 씨.”
“아뇨, 주혁 씨는 배도 부르시고 힘드셨을 텐데 쉬세요.”
“제발.”
“…….”
“제발 저에게 설거지를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십시오, 지은 씨. 제가 설거지는 정말 잘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벌떡 일어난 주혁이 허둥대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지은은 분명 자신의 온전한 각성에 대해 주혁과 까망이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더 깊게 캐지 않고 여기서 멈춘 이유는 둘이 숨기려고 하는 것이 자신에게 절대로 해가 되는 내용은 아닐 거란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에휴. 앉아요. 아직 배 다 안 찼을 거잖아요.”
“네?”
“조금 기다려 봐요. 찌개도 다시 데워야 하고, 계란프라이도 더 해 줄게요. 두부구이는 또 그새 다 먹었네. 비엔나소시지 어때요?”
“…….”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는 주혁의 팔을 잡아끌어 의자에 앉힌 지은이 가스레인지의 불을 다시 켰다. 금방 노른자가 살아 있는 계란프라이와 함께 수북하게 쌓인 비엔나소시지는 물론이고 따뜻하게 데운 찌개, 그리고 그릇 가득 담은 쌀밥까지 차려진 한 상이 완성되었다.
“지은 씨…….”
“먹는 동안 같이 있어 줄게요. 혼자 밥 먹는 거, 그거 좀 쓸쓸하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맞은편에 앉은 지은이 턱을 괴고 주혁을 바라보았다. 지은의 표정이 어느새 많이 풀려 있는 것을 확인한 주혁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슬며시 피어올랐다.
‘나한테 숨기는 게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을 믿는다.’라는 지은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따뜻한 밥상이었다.
“감사합니다.”
“……후식으론 뭐 드실래요? 지금 집에 사과랑 귤밖에 없긴 하지만요.”
“뭐든 좋습니다, 저는.”
“맨날 다 좋대 진짜.”
처음으로 지은이 자신에게 반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주혁의 몸이 멈칫 굳었다. 반말을 한 것도 모르는지 ‘나 지금 아직 화 다 안 풀렸음.’이라고 티를 내려는 듯 흘겨보는 지은의 모습에 결국 주혁은 웃음을 터트렸다.
* * *
“노아와 협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결국 후식은 귤이었다. 주혁과 함께 소파에 나란히 앉아 귤껍질을 까며 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비슨은 이미 키드에게 능력이 흡수당했고, 강령술에 걸린 상태였어요. 그걸 알아챈 게 조금 늦긴 했지만.”
“노아와 이태서가 손을 잡고 강령술에 걸린 희생자들을 추적하러 나갔고요?”
“네, 키드는 빠져나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강령술에 걸린 데이비슨과 다른 사람들은 분명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본체인 키드는 이미 그림자의 능력을 이용해 빠져나갔을 것이란 지은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주혁이 한국에서 느껴지던 키드의 기운이 이미 멀어졌다는 사실을 알려 준 뒤였다.
“키드가 제 능력이 각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당분간은 몸을 숙인 채 숨어 지낼 거예요. 이전과 달리 저를 기습하려 하지도 않을 거고요. 그런데 신기하지 않아요?”
“어떤 것이 말입니까?”
이태서와 키드가 합작해 집에 함정을 만들었고, 타락의 기운으로부터 지은을 지키기 위해 마나가 폭발하자마자 끌려간 신의 공간에서 온전한 힘을 각성하게 되었다는 일련의 과정들을 설명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말을 하면서도 결국 자신이 온전한 힘을 각성하게 된 계기가 바로 강해지고 싶다는 의지 덕분이라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슬라임에게 이리저리 치이며 구를 때도 항상 곁에서 함께했던 주혁과 유라, 성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좌절했을 때도 있었다.
어째서 나는 헌터가 아닐까. 어째서 나는 저 사람들과 같이 싸울 수 없을까. 그런 고민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했었는데, 왜 이제 와서?
그런 지은의 고민을 가만히 듣고 있던 주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엔, 지은 씨가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정확히 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 말은…….”
“수많은 갈림길 중에서 지금당장 어디가 올바른 길인지 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당장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선택한 길이 막다른 길이 될 수도 있고, 험난한 장애물이 가득한 길이 될 수도 있고, 편한 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
“그래서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길을 선택하는 것조차 쉽게 결정하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신이 가진 이상, 신념, 가치관 같은 것들을 대입하며 어렵게 생각하죠. 정작 선택을 내려야 하는 타이밍에도 말이죠.”
그렇게 말한 주혁이 자신의 말에 집중하고 있는 지은의 입에 잘 깐 귤을 넣어 주며 말했다.
“방향을 확실히 정하셨으니,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걱정하지 마시고 계속 가시길. 제가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