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60)

기억나는 것은 유난히도 파랗던 하늘과 지난밤 내린 빗줄기가 얼어붙어 반짝이던 앙상한 나뭇가지에 맺힌 얼음 조각들이었다.

그 모든 게 시리도록 눈부시던 오후였다.

The Harry Elkins Widener Memorial Library.

유난히도 투명한 햇살 아래, 긴 글이 새겨진 하얀 벽면 아래에 선 그를 본 순간 알아 버렸다.

그 사람이구나, 하고.

그냥, 알았다.

그의 외형도 분위기도 전혀 모르는 채, 아는 거라고는 석 달 전 새벽 걸었던 전화에서 그가 남긴 ‘죄송합니다.’라는 음성뿐임에도 신기하게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옆에 선, 익숙한 얼굴을 한 그 사람의 눈빛으로 알아 버렸다.

저런 게 사랑이라는 거구나, 하고.

눈이 시릴 정도로, 모든 것이 반짝이던 어느 오후였다.

실연하기 좋은 날이었다.

* * *

사람이 살다 보면 어느 날 마치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나간 짓을 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날을 흔히 ‘마가 낀 날’이라고 하는데 그날이 자신에게는 그런 날이었다.

“……머리 아파…….”

끙끙거리며 겨우 잠에서 깬 수현은 눈도 뜨지 못한 채 가장 먼저 그 관용 어구를 내뱉었다.

어릴 때 왜 사람들은 술을 마신 다음 날 늘 머리가 아프다고 징징댈까, 저러면 안 마시면 될 텐데, 라고 의아해했지만 그 썩은 어른이 되어 버린 지금 과음하면 두통이 온다는 걸 알면서도 늘 과음을 하게 되고 과음한 다음 날에는 전날의 자신을 원망하고 비난하며 두통 속에서 눈을 뜨는 게 일상이 되어 있었다.

두통뿐이면 다행이지, 심할 때는 복통도 겹치는데 오늘이 바로 그 심한 날인 듯했다.

허리가 아팠다. 그리고 배도 좀 아픈 것 같았다.

아니, 허벅지랑 다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사실은 온몸이 아팠다.

“젠장…….”

또 술 마시고 대차게 계단을 구른 걸까, 아니면 집에 다 와서 현관에서 잠든 걸까?

짚이는 게 너무 많아 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근육통 정도로만 끝나기를 바라며 막 돌아누우려는데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겁고 묵직한 게 허리에 감겨 있었다.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세게 몸을 휘감고 있는 힘에 겨우 눈을 뜨곤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뜻밖에도 눈에 들어온 건 사람의 팔이었다.

그러니까, 마네킹이나 모형이 아니라 진짜 사람의 팔이었다. 하지만 이게 누구의 팔인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어젯밤, 술을 마신 건 확실하다.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이 익숙한 느낌의 두통은 분명 과음의 증거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눈만 돌려 확인해 봐도 자신의 집이 맞다.

익숙한 흰색의 몰딩과 블라인드, 그리고 침대와 벽걸이 TV만이 놓인 구조가 자신의 침실이 분명함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뒤에 있는 누군가가 자신을 데리고 집에 왔다는 건데…….

짚이는 상대라면 일단 여러 친구들이 떠오르지만…… 그 녀석들은 일단 자신을 집 안에만 처넣으면 현관에서 처자든 말든 버리고 가는 놈들이다. 들어와 같이 잘 놈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의심 가는 대상은 작은형이지만…… 그렇게 떠올리니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둘째 형 역시 절대 자신을 침대로 데려와 얌전히 같이 잘 리 없다. 애초에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줄 리도 없지만 데려다줬다 해도 자신은 거실 소파에 재우고 혼자만 침대에서 잘 사람이다.

그렇다면…….

“……삼촌?”

혹시, 삼촌이 집까지 데려다준 건가 하는 생각에 다시 자신의 몸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팔을 내려다봤다.

주변에서 술에 취한 자신을 바닥이나 소파에 버리지 않고 침대에서 재울 사람은 삼촌뿐이니까…….

하지만, 역시 삼촌의 팔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느낌이 다르다.

아무리 숙취로 머리가 엉망이라도 태어났을 때부터 자신을 안아 주던 사람의 팔은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데 이건 삼촌의 팔이 아니다.

삼촌의 팔이 늘씬하고 잔근육이 많은 다정한 느낌이라면 이 팔은 근육질의 억센 느낌이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이렇게 억세게 자신을 끌어안고 잘 남자는 없다.

순간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가 대체 어젯밤 누굴 집에 데리고 온 건가, 하는 의문과 호기심에 연쇄 살인마를 등 뒤에 둔 공포 영화의 주인공처럼 아주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순간 보인 남자의 얼굴에 터져 나올 뻔한 비명을 간신히 목 안으로 삼켰다.

뭔지는 몰라도 어젯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개연성이 없어도 이 정도로 없으면 드라마도 안 본다. 그만큼 이 남자가 지금 자신의 침대에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분명, 어제 일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러 간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문제는 그 뒤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다.

“미친…….”

이 사람이 왜 내 침대에 들어와 있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일단 침대를 빠져나가려 팔을 뻗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격렬한 비명을 내뱉으며 몸부림을 쳤다.

“으악!”

육시(戮屍)나 오체분시(五體分屍)를 당하면 이런 기분인가, 라는 쓸데없는 경험을 늘리며 식은땀을 흘리다 다음 순간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팔을 움직인 탓에 또다시 밀려오는 통증을 참으려 입을 다물었다가 이번엔 혀를 깨물고는 베개를 손으로 쥐어뜯어야 했다.

침대에서 한 번 내려가려다 사망하겠다.

대체 어제 술 마시고 무슨 짓을 한 거냐, 이수현?

이 정도 근육통이면 최소 크로스핏 정도는 했어야 하는데 가끔 피곤할 때 술을 마시면 아무 데서나 잠이 들어 문제이긴 해도 술 마시고 운동을 하는 기괴한 버릇은 없다.

무엇보다 어제 자신의 상태가 크로스핏은커녕 걸어서 10미터도 가기 힘든 상태였다는 걸 감안하면 운동을 한 건 아니다. 그럼 또 계단에서 구른 건가 하며 진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만 내려 간신히 몸을 보는데…….

“으아…….”

아, 부분에서 커지려는 목소리를 간신히 손으로 틀어막아 가라앉힌 건 좋은데 이번엔 등과 허리, 그리고 허벅지에 동시에 힘이 들어가 진짜 육시를 당하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니, 육시고 근육통이고 그게 문제가 아니다.

절대 벌어질 수도, 그리고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절대 아닐 거라 믿고 싶지만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정황적 증거들로 머릿속이 혼란에 싸인 채였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라 이를 악문 채 침대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게 되질 않는다.

비명을 참으려다 보니 몸이 움직이질 않고 몸을 움직이려고 하면 비명이 자동으로 터져 나간다.

지독한 통증에 꼼짝 못 하고 끙끙대며 식은땀을 질질 흘리고 있는데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척이는 그 소리에 숨까지 멈춘 순간, 역시나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일어날 거면 그냥 일어나든가, 조용히 할 거면 조용히 하든가, 한 가지만 하지?”

잠에서 깨 약간 짜증이 난 듯 신경질적인 그 음성에, 움츠린 채 눈만 껌뻑거리고 있자 바로 뒤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사라졌다.

그 감각에 뻣뻣한 목을 돌려 뒤를 보자 절대 이 방에서 있어서는 안 될 사람 No.1에 속하는 남자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배스 가운을 걸치며 방 안을 걸어가고 있었다.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남자가, 너무 안 어울리는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걸 보고 있자니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이건 절대 숙취 때문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너, 매트리스 바꿔. 너무 푹푹 꺼지잖아.”

너무나 태연하게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아니 어제 만난 건 맞지만 하여간 너무 가까운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매트리스 타박을 하는 그를 멍하니 보고 있자 침대를 돌아 문으로 향하던 그가 툭 하니 말을 던진다.

“곧 출근해야 하니 일어나서 커피 내려. 표정 보니 해야 할 말도 아주 많은 것 같으니까…….”

당연히 출근은 해야 하지만 침대에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커피를 내리라니 네가 사람이냐, 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막 문 앞에 선 그가 다그치는 눈빛을 보낸다.

“대답은?”

안 할 거냐, 라는 그의 물음에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입 밖으로 나간 건 아주 짤막한 한마디였다.

“……네.”

하는.

* * *

탁 하는 소리를 내며 막 커피포트가 꺼진 순간, 때마침 추출이 끝난 에스프레소가 담긴 잔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서도 수현은 계속해서 자신의 거실 소파에 당당하게 앉아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는 남자를 곁눈질했다.

이 모든 상황이 당황스럽고 어이없는 자신과 달리 남자는 태연하고 침착했다. 아니, 침착하다 못해 뻔뻔하기까지 했다.

그가 이른 아침에 이 집에서 저렇게 편안하게 있어도 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절대 아니다.’다.

그와 자신의 관계는 명백하게도 형의 친구, 그리고 친구의 동생, 그것도 아니면 중·고등학교 동문이자 선후배 관계, 그리고 최근 추가된 동료 정도다.

그나마 동료가 된 것도 겨우 지난주부터의 일이다.

이 사람이 한국에 들어온 게 딱 일주일 전이었으니까.

그런데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무리 작업 후 걸어서 사무실을 나온 건 기억한다.

아니, 사실 그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그냥 나온 것 같다고 추측할 뿐이다. 중간중간 기억이 끊겨 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던 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하향 버튼을 막 누르려고 했는데…….

“커피는?”

여전히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려 인상을 쓴 순간 갑작스러운 그의 부름에 뜨거운 물을 따른 두 잔을 손에 들었다.

“……다 됐어요.”

회사에서처럼 그를 대해야 할지, 아니면 사적인 자리니 그냥 예전처럼 형 친구를 대하듯 대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아 애매한 존대어로 대꾸한 뒤 거실로 향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사지육신이 찢겨 나가는 듯한 통증은 여전했지만 너무 당황하다 보니 통증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대체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커피…… 연하게요.”

아침이니까, 라며 삐걱거리는 팔로 잔을 건네자 소파에 앉아 우아하게 잔을 받아 들던 그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 눈을 살짝 내리깐다.

“……이럴 때는 에스프레소로 마시지만…… 오늘은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 앞으로는 커피를 내리기 전에 기호에 대해 물어보도록. 그 정도 센스는 가져야지?”

내가 왜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그가 옆에 놓인 스툴을 권한다.

“일단 앉아.”

드디어 대화가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에 어기적거리며 스툴 위에 앉아 후들거리는 허리를 간신히 지탱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바라보자 커피를 한 모금 넘긴 그가 곧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하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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