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60)

“시치미 떼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방금 ‘술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묵비권을 행사하는 범죄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예리한 그의 지적에 할 말을 잃은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커피를 마시자 잔을 내려 둔 그가 다그친다.

“대답은?”

“……어제 퇴근하던 것까지요…….”

“……퇴근?”

“네. 엘리베이터에 탄 것까지…….”

순간 그의 얼굴에 살기가 어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섬뜩하게 지나간 그 눈빛에 살짝 눈치를 살피며 몸을 움츠리자 그가 싱긋 웃어 보인다.

그를 아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부터 종종 보아 왔기에 저 미소의 의미가 뭔지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넌 이제 죽었다는 뜻이 담긴 미소였다.

“그래, 그럼 거기서부터 얘기해야겠네. 엘리베이터에 날 만난 건 기억나?”

“……엘리베이터에서요?”

“그래.”

엘리베이터에서라니…….

서서히 기억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분명히 어제 일을 끝내고 눈만 뜬 수면 상태로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고 막 하향 버튼을 누르는데 전화가 왔다.

그러니까, 그 전화는…….

* * *

- 결혼해. 약혼 생략하고 곧장.

근 일주일 만에 통화를 한 큰형의 갑작스러운 결혼 강요에 수현은 당황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던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그러곤 되물었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 헛소리는 무슨 헛소리야? 결혼하라고! 당장!

아무리 뇌가 과부하 상태라 해도 큰형이 버럭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결혼 타령을 반복하자 그 말뜻을 금세 알아는 들었다.

역시 가장 빠른 교육은 주입식 암기 교육이다.

문제는…….

“아니, 소설과 영화에도 개연성이라는 게 있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려면 기승전결이라는 게 있잖아? 그런데, 무슨 일주일 동안 작업하다 이제 퇴근하는 사람한테 전화하자마자 다짜고짜 결혼을 하래? 최소한 왜 그런 얘기가 나오게 됐고 상대는 누구고 시기는 언제쯤이라는 것 정도는 설명을 해야지.”

- 상대는 뻔한 거고 시기는 당장, 이라고 했잖아.

평소의 큰형답지 않은 억지에 수현은 짜증스러운 듯 벅벅 머리카락을 긁어 댔다.

“아니, 그러니까 과정을 설명하라고. 갑자기 결혼하라면 어떤 인간이 네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하냐?”

- 갑자기가 아니지. 오히려 그동안 너무 이상했던 거지. 하여간 너 이번 달 안에 식 올릴 거야. 그렇게 알고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와. 결혼 플랜 짜야 돼.

화가 났는지 조금 빠른 말투와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단호한 형의 어조에 수현은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도 순간 뭔가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아무리 큰형이 하나에 꽂히면 물불 안 가리고 눈이 뒤집히는 성격이라 해도 아무 이유 없이 저렇게 흥분해 날뛸 리가 없다.

“혹시, 나 일하는 동안 무슨 일 있었어?”

- 있었지. 그것도 아주 큰 일이.

“뭔데?”

- 주영이 약혼한대.

“……서주영?”

- 그래.

갑자기 나온 고등학교 동창의 이름에 수현은 결혼할 때 됐지, 뭐…… 라고 중얼거리며 막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문득 확 하니 정신이 들며 그게 왜 문제인지 알아채 버렸다.

“서주영이 약혼을 한다고?”

- 그렇다고.

“그러니까 우리 삼촌하고 말고 다른 사람하고?”

바로 지난주, 철야 작업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친구인 주영과 통칭 ‘삼촌’이라고 불리는 해준은 아주 순조롭게 연애 중이었다. 비밀 연애 기간까지 합하면 3년을 넘게 만나 온 터라 슬슬 이제 결혼 얘기를 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며 가족들끼리 얘기를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일주일 사이 왜 뜬금없이 주영이 다른 사람과 약혼을 하게 된 거냐고 묻자 큰형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진다.

- 아니, 너 지금까지 내가 하는 말 어디로 들었어? 그러니까 우리가 이 난리지, 예정대로 삼촌과 결혼이 진행되는 거면 왜 너한테 삼촌하고 결혼하라고 하겠냐고?

“아니, 아니, 잠깐. 왜 갑자기 얘기가 그렇게 된 건데? 일주일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제발 과정을 좀 얘기하라고 화를 내자 그제야 큰형도 자신과 일주일간 연락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드디어 과정 설명을 시작했다.

- 나이도 나이고 하니 이제 슬슬 식 올려야 할 것 같아서 아버지가 그쪽에 결혼 얘기를 꺼냈는데 두 늙은이가 또 싸우다 열받아서 너랑은 절대 사돈 안 한다고 하고 깼어. 그래도 둘이 좋다 하니 어떻게든 되겠지 했는데, 되기는 개뿔. 그쪽이 오늘 일방적으로 다른 사람하고 약혼 준비 중이니 꿈 깨라고 통보를 해 와서 아버지 화병으로 몸져누우셨다고.

이러니 내가 흥분 안 하게 생겼냐며 분노를 토하는 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직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수현은 망연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바라봤다.

버튼을 누르긴 해야 하는데 몇 층을 눌러야 하는지도 잘 판단이 서지 않는 상태였다.

과로와 비약적인 상황 탓에 뇌가 썩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아니…… 그러니까 일주일 사이에 두 영감탱이가 결혼 문제로 만나서 싸웠고, 그러다 감정이 상해서 그쪽에서는 서주영이 다른 사람하고 약혼을 한다고 했고, 그 통보를 들은 아버지랑 형은 열받아서 당장 나를 삼촌하고 결혼시키려고 한다는 거지?”

내가 이해한 게 맞냐고 되묻자 큰형이 빠르게 답해 준다.

- 이제 뇌가 좀 돌아가나 보네.

제대로는 아니지만 삐걱거리면서라도 일단 뇌가 돌아가기는 했다. 덕분에 지금 상황이 얼마나 기가 막힌지도 알 수 있었다.

“아니, 무슨 말 같은 소리들을 해야지. 그쪽에서 그따위로 나온 건 열받을 만한데 갑자기 내가 거기 왜 들어가냐고?”

- 애초에 너랑 삼촌 둘이 결혼하기로 얘기되어 있던 거잖아.

“그게 언제 적 얘긴데? 그런데 이제 와서 열받았으니 삼촌이랑 결혼을 하라고? 그것도 이번 달 안에?”

- 오래전 얘기라도 실제로 얘기가 오간 건 맞고 이미 너도 너무 늦었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너도 안 팔리는 건 마찬가지니 그냥 진행해. 파트너가 있으면 우리도 안심되고 삼촌하고 너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으니 같이 사는 데도 문제없고. 그나마 내가 진행하기로 해서 이 속도인 거야. 아버지는 오늘 당장 둘 집부터 옮기라고 하신 거 그래도 식은 치러야 한다고 내가 말렸어.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니 드디어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건 늙은이들의 자존심 싸움이다. 원래도 사이가 안 좋았던 두 늙은이가 아들들 결혼 문제로 완전히 틀어져 반드시 내가 먼저 결혼시킨다고 오기를 부리고 있는 거다.

“망할 영감탱이들…….”

그럼 자기들이 만나서 머리채 잡고 싸울 것이지 왜 나한테 지랄이냐고 짜증을 내던 수현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떠올리곤 서둘러 머리를 내저었다.

“아, 하여간. 끊어 봐. 나 일단 주영이랑 얘기 좀 할게.”

- 얘기할 것도 없어. 그 녀석은 서 회장님이 결혼하라면 얌전히 할 놈이야. 너처럼 영감탱이 가만 안 둔다고 날뛸 종자가 못 돼.

확실히 그건 그렇다고 수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타고난 성격도 성격이지만 여러모로 주영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 우리 삼촌 차고 강현규랑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볼 거야, 내가.

갑자기 나온 그 이름에 놀라 서둘러 다시 형을 불렀다.

“잠깐, 잠깐만, 형. 강현규? 현규 형?”

- 응?

“아니, 주영이가 현규 형하고 결혼한다고?’

- 정확히는, 결혼이 아니고 약혼이지만…… 맞아.

단호한 큰형의 답에 허탈한 숨이 터져 나갔다.

“망할…….”

- 그래. 망할 일이지.

일단 얘기만 나온 상태고, 또 주영의 부친 성격도 변덕스러우니 그쪽 약혼도 또 깨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상대가 강현규라면 그런 기대도 할 수 없다.

일단 집안으로도 혈통상으로도 상대가 되질 않는다. 그쪽과 얘기만 제대로 된 거라면 주영이 쪽에서 절대 놓칠 리 없는 혼사다.

아마 그래서 아버지랑 형이 더 열받은 것 같다.

“그쪽하고도 대화 끝난 거 맞아?”

- 그 영감탱이 말로는 이번 달 안에 발표한다고 했대. 그러니까 너흰 이번 달 안에 결혼해.

이미 식장 알아보고 있다는 말을 수현은 한 귀로 흘려들었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

“그럼, 완전 깨졌다고 봐야겠네?”

- 몇 번 말해야 돼? 그러니까 빨리 결혼해.

“헛소리 그만하고.”

- 헛소리 아냐. 우리도 그간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한 거야. 원래는 네가 A 안이었지만 삼촌 의견 존중해서 주영이랑 최선을 다해 결혼을 추진했던 건데 이렇게 어이없이 까였으니 B 안으로 넘어가야지. 그게 너한테도 삼촌한테도 가장 이상적인 결말이야.

“내 의견은?”

- 어차피 사귀는 사람도 없잖아.

“사귀는 사람은 없어도 좋아하는 사람은 있을 수도 있지!”

- 있으면 3초 안에 얘기해.

그럼 그쪽으로 밀어줄 테니, 라는 말에 당황해 어버버 하는 사이 순식간에 3초가 지났다.

- 타임아웃이야. 퇴근하는 길이면 곧장 집으로 와.

“아니, 형! 형, 잠깐…….”

기다려 달라는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에 휴대폰만 멍하니 바라보는데 바로 뒤에서 아주 귀에 익은 목소리에 울려왔다.

“내가 누구랑 약혼을 한다고?”

나지막한 그 음성에 휙 하니 뒤를 돌아본 순간, 엘리베이터 안에 조용히 서 있던 현규 형이 눈웃음을 흘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웃고 있지만 눈빛이 살벌한 게, 역시나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아주 나빠 보였다. 이 사람이 웃을 때는 대부분 기분이 안 좋을 때니까.

순간 아차 했다.

평소라면 엘리베이터를 탄 순간 전화를 끊었을 텐데 피로와 수면 부족 탓에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한 상황이라 쓸데없이 통화를 길게 해 버렸다.

정규 퇴근 시간은 아니라 엘리베이터 안에 현규 형과 자신뿐이라 다행이지 한 사람만 더 타고 있었어도 오늘 밤이면 자신의 결혼 소식이 회사 안을 한 바퀴 돌았을 거다.

“……떠들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정보 고마워. 내 약혼 소식을 엘리베이터 안에서 엿듣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덕분에 이쪽도 미리 방어할 수 있게 됐으니 진원 형의 저주는 못 들은 걸로 해 줄게.”

진짜 다 들은 거다.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채, 부지런히 결혼식장을 찾고 있을 큰형에게 애도를 표하며 수현은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이 순간 가장 어울릴 만한 인사를 어색하게 건넸다.

“약혼, 축하드려요.”

갑작스러운 인사에 그가 나른하게 미소 짓는다.

“……진심으로?”

장난하냐, 내가 방금 대화를 다 들었는데, 라고 쓰여 있는 형의 얼굴에 재빨리 그 말을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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