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60)

“……사실은…… 아니요.”

“솔직해서 좋네.”

“제 얼마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입니다.”

“장점일지 단점일지는 두고 봐야지.”

“그렇긴 한데…… 어차피 솔직해진 김에 솔직하게 묻겠는데…… 주영이랑 약혼하실 건가요?”

단도직입적인 그 질문에 그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띤다.

표정만 봐도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다.

네가 알아서 뭐 할 건데, 라는 의미였다.

“내가 왜 그걸 너한테 말해야 하지?”

“그게…….”

막 대답을 하려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문이 열렸다. 지하 2층이었다.

1층에서 내렸어야 했는데, 라고 떠올릴 틈도 없이 문으로 빠져나가는 그를 보곤 뒤를 따라나서며 그를 불렀다.

“저기, 형.”

“팀장님.”

빠른 정정에 곧장 호칭을 바꿨다.

“네, 팀장님. 잠깐 시간 좀 내 주시면 안 될까요? 딱 10분이면 되는데요.”

“바빠.”

“그럼, 퇴근하신 뒤에라도요.”

그 말과 동시에 차 앞에 도착한 그가 막 운전석의 문을 열려다 고개를 끄덕인다.

“연락해. 시간 되면 만나 줄 테니.”

“……연락처 모르는데요.”

번호가 뭐냐는 질문에 운전석의 문을 연 그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다.

“내 연락처를 모른다고?”

“네.”

내 친구도 아니고 형 친구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는데, 그것도 특히 일주일 전에 한국에 들어온 사람의 연락처 따위 알 게 뭐냐고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휴대폰.”

내놓으라는 짤막한 말에 가방을 뒤지자 그가 인상을 쓴다.

“네 손에 들고 있잖아.”

그 말에 백팩의 지퍼를 열던 오른손을 보니 휴대폰이 있다. 그래, 방금까지 큰형하고 통화를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집 나간 내 정신이 문제일 뿐.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자서요……. 여기요.”

잠금을 푼 뒤 두 손으로 공손히 휴대폰을 건네자 그가 연락처란으로 들어가 번호를 입력한 뒤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연락해.”

“네. 운전 조심하세요.”

습관 같은 그 인사에 너나 잘하라는 듯 이쪽을 바라본 그가 곧 차에 올라타는 모습에 뒤로 물러서자 차가 서서히 움직여 저 멀리 사라져 간다.

꽉 찬 주차장을 느긋하게 가로질러 곧 위층으로 사라지는 차를 확인한 뒤 이번엔 휴대폰을 들고 주영의 이름을 찾았다.

보통은 메시지를 보내고 기다리지만 오늘은 그럴 틈도 정신도 없어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며 다시 통화를 시작했다.

“야, 나와.”

* * *

“그냥, 집에 가서 쉬지…….”

얼굴을 보자마자 그 상태로 왜 만나자고 한 거냐고, 주영이 걱정을 하는 순간 아주 잠깐 테이블 앞에서 졸던 수현은 다크서클이 가득한 얼굴을 들어 앞에 선 주영을 바라봤다.

“나라고 이 상태로 나오고 싶었겠냐?”

내가 시체 상태인 건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수현이 빨리 앉으라고 손을 까닥이자 주영이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린다.

“얘기 들었구나.”

“방금 일 끝내고 나오면서 횡액 입었지. 어떻게 된 거야? 현규 형도 아직 모르던데.”

“나도 방금 우연히 들었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랑 통화하면서 싸우시길래…….”

역시나 너무나 예상 가능한 그 상황에 수현은 앓는 소리를 냈다.

“아, 진짜 망할 영감탱이들, 붙을 거면 한강 다리 밑에서 제대로 붙으라니까.”

왜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냐고 수현이 짜증을 내며 커피를 한 모금 넘기는 모습에 주영이 쓰게 웃는다.

“그냥 아버지도 화나셔서 그런 거야. 얘기만 나오는 중이니 걱정하지 마.”

“그쪽 집안하고도 얘기 끝났다며?”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괜찮아.”

“뭘 믿고?”

“현규 형은 절대 나랑 약혼 안 해.”

나 싫어해, 라는 주영의 철없고 느긋한 말투에 수현은 주영이 아직 모르고 있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수현은 알려 주기로 했다.

“이건 너희 선에서 끝날 문제가 아냐.”

“……응?”

“진원 형이 나더러 이번 달 안으로 삼촌이랑 결혼하래.”

그제야 느긋하던 주영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랑? 삼촌? 그러니까, 해준 형?”

“그래.”

“……너, 결혼 생각 없다고 했잖아.”

“당연히 없지. 그런데 너희 영감탱이한테 까였다고 우리 영감탱이랑 큰형이 분기탱천한 상태라 수가 없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너희보다 빨리 결혼시킨다고 난리야. 난 일 잘하다 나와서 독박 쓰게 생겼다고.”

“어…….”

본인 부친의 급한 성미뿐 아니라 이쪽 영감과 큰형의 불같은 성미를 잘 알기에 주영 역시 더는 이게 웃어넘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 표정을 굳혔다.

“진짜, 결혼한다고?”

“일단, 내가 삭발을 해서라도 시간을 끌어보긴 하겠지만 우리 아버지랑 큰형 둘이 밀어붙이면 아무리 나라도 버티는 데 한계가 있어. 너도 알잖아, 우리 아버지 흥분하면 말 안 통하는 거. 그리고 무엇보다 삼촌은 우리 아버지가 나랑 결혼하라고 하면 절대 거부 못 해.”

못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거다.

삼촌은, 아니 해준은 ‘삼촌’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냥 말 그대로 호칭만 삼촌인 사람이었다.

단순하게 관계를 표현한다면 ‘타인’ 그리고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한다면 조부모님의 오랜 친구분의 아들이었다.

아주 오래전 조부님의 친구 커플이 화재 사고로 사망한 뒤 살아남은 유일한 핏줄인 해준을 조부께서는 입양하길 원하셨지만 해준은 그대로 부모님의 아들로 남기를 원했고, 그런 탓에 입적은 하지 않은 채 조부모의 보호 아래 친아들처럼 자라났다.

다른 친척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해준의 부모님은 양쪽 모두 가족이 없다고 들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비슷한 또래인 자신과도 친형제처럼 자랐는데, 문제는 조부모님이나 부친이 해준을 너무나 사랑하고 아껴 어떻게든 해준을 가족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이유로 집안의 유일한 오메가인 수현과 결혼을 시키겠다고 일찌감치 선언했고 수현 역시 그에 대해 큰 불만을 품지 않고 자라 왔다. 어린 시절부터의 교육으로 그와 결혼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언젠가 내가 결혼을 하게 되면 당연히 그 상대는 해준일 거고, 해준의 아이를 낳고 잘 살 거라고 막연히 떠올렸었다.

적어도 자신에게 아주 큰 하자가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아직 우리 할아버지는 가세 안 했는데, 여기에 우리 할아버지까지 붙으면 그때는 진짜 답이 없어. 알지? 우리 할아버지 일생일대 소원이 우리 삼촌 입적이라는 거. 삼촌이 입적을 거절하니 나랑 결혼시켜서 우리 집안사람으로 만들 거라고 노래를 하시던 분이야. 그러니까 빨리 해결해야 돼. 안 그러면 나 진짜 다음 주에 삼촌하고 결혼해야 할지도 몰라.”

그러니 너도 머리를 짜내 보라는 말에 주영이 초조한 듯 입술만 달싹인다.

“해준 형은?”

“아직 연락 안 했어. 네가 어떻게 나올지 보고 나도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하니까. 네가 현규 형이랑 약혼할 생각이 없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약혼을 깨야지.”

“……어떻게?”

“어떻게든.”

아직 머리가 잘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쪽 결혼은 그쪽 약혼의 부록으로 딸려 온 케이스라, 일단 그쪽의 약혼을 깨는 게 먼저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당사자들이 완강히 거부하고 다른 상대가 있다고 한다면 절대 억지로 진행하지는 않으실 거다. 최소한 이쪽 어른들은 그렇다. 당장은 흥분해 제정신이 아니라 일단 일을 키우고 있지만 만약 삼촌이 거부하면 강요는 못 한다.

하지만, 문제는 삼촌이 절대 거절을 못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거부권이 없다. 늙은이들이 노망났냐고 날뛰어 봐야 이 나이 되도록 애인 하나 없는 놈이 말이 많다고 각하한 뒤 무조건 결혼을 진행할 거다.

사실 그간도 계속해서 결혼해라, 파트너를 찾아와라, 다들 하는 연애를 왜 넌 못 하냐, 성질머리가 그 모양이니 애인도 없지 등등의 잔소리 폭격이 쏟아졌지만 그럭저럭 그 지뢰들을 피해 올 수 있었던 게 최후의 보루인 삼촌 덕분이었는데…… 그간 방패를 너무 오래 써서인지 그 방패에 발등 찍히게 생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디서 애인이라도 하나 만들어 둘 걸 그랬다고 후회해 봐야 이미 너무 늦었다.

큰형이라면 벌써 식장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젠장…….’

아버지랑 큰형, 둘 중 하나만이라도 골치 아픈데 둘이 연합했으니 그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던 수현은 문득 옆에 놓인 휴대폰을 보곤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까 얼결에 현규 형을 잡기는 했는데…… 카페인을 퍼부으며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이 모든 이상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찾으라면 그건 ‘강현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삼촌은 절대 이 상황을 거부할 수 없고 주영도 거부할 입장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우는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았다 보니 아무도 말을 안 들어줄 거다.

그러니 이 난잡한 상황을 종결시켜 줄 건 현규 형뿐이다.

좀 까다롭고 무서운 데다 별로 친하지도 않아 어색하고 불편한 상대이긴 하지만 먹이 피라미드의 정점에 선 현규 형이라면 이 약혼을 깰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규 형의 부친도 어지간히 말이 안 통하는 상대라 쉽지는 않겠지만…….

“일단 현규 형하고 얘기해 봐야겠어.”

“……현규 형?”

“응.”

“……형, 귀찮게 하면 싫어할 텐데…….”

“내가 물불 가리게 생겼냐?”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혼날 텐데, 라는 주영의 중얼거림에도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수현은 무조건 감정에 호소하기로 마음먹은 채였다.

어떻게든 현규 형을 설득해 형 쪽에서 확실히 약혼을 거부해 준다면 당연히 그쪽 약혼은 깨지는 거고 그렇게 상황이 흘러가면 아버지나 큰형의 화도 확실히 누그러질 거다. 그럼 일단 시간을 질질 끌다 적당한 상황에 다시 삼촌과 주영의 결혼 이야기를 진행하면 된다.

그러니까, 결국 시간이 문제다.

큰형의 말대로 자신과 주영은 이미 늦어도 상당히 늦은 나이다. 일반적으로 오메가가 28살까지 결혼은커녕 약혼자도 없다는 건 극히 드문 케이스다.

물론 자신처럼 큰 하자가 있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주영처럼 집안도 혈통도 나무랄 데 없는 오메가가 아직 정혼하지 않았다는 건 다른 쪽에 문제가 있다며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명분을 주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정기가 온 성인 오메가에게 파트너가 없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로 위험하다.

그러니 어떻게든 시간을 질질 끌면 결국 주영의 부친도 이 결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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