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60)

해준이 비록 천애 고아이긴 하지만 이쪽 집안에서 애지중지하는 친혈육과 다름없는 사람이니 집안을 들먹이던 그쪽도 이쪽이 밀어붙이면 결국 받아들일 거다.

“그러니까……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자고…….”

현규 형이 협조적일 경우의 이야기지만, 현재로서는 그 방법 외에는 없었다.

초조함에 빠르게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리던 수현은 마음을 정하곤 곧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현규가 저장해 둔 번호를 찾아 메시지를 보냈다.

[퇴근 후에 뵐 수 있을까요?]

라고.

* * *

[왜 집에 안 와?]

[어디야?]

[내가 곧장 집으로 오라고 했지?]

[전화받아.]

[너, 왜 전화 안 받아?]

[이따위로 나오겠다 이거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벨 소리와 함께 중간중간 리듬을 타는 듯 들어가는 메시지 알림음의 불협화음에 수현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쯤 되면 스토커다. 경찰에 신고해도 신고받아 줄 것 같다.

“우리 형이지만 지독하다, 진짜…….”

자기 애인한테나 이렇게 연락하지, 애인한테는 연락 잘 안 한다고 만날 때마다 욕이나 처먹으면서 동생한테는 스토커 짓을 한다.

‘이러니까 매번 차이지.’

그러고 보니 내 결혼이 급한 게 아니라 큰형의 결혼이 더 급한 거 아닌가, 아니 이 김에 아예 큰형을 먼저 보내 버릴까, 하는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이도 적절하고, 알파에 집안도 나쁘지 않고, 외모도 좋고, 학력도 능력도 ‘준수함’ 그 자체다.

알파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큰형은 말 그대로 ‘알파’의 정석을 달리는 사람이다. 물론 성격이 다소 집요하고 너무 다혈질이긴 하지만 그 외에 부분에서는 온몸으로 ‘나 알파’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왜 아직 결혼을 못 했을까?

“어디 문제가 있나…….”

나 말고 큰형까지 문제가 있으면 우리 집도 큰일 아닌가 턱을 괸 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울려왔다.

“문제라면, 아주 많지.”

넌 존재 자체가 문제야, 라는 둘째 형의 말이 들려오는 것 같은 기분에 휙 하니 소리나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둘째 형은 아니다.

현규 형이다.

“오셨어요?”

역시나 형 친구 중에서도 그다지 친한 사람은 아니라 조금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자 좁은 바의 구석 자리로 들어선 형이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는다.

막 퇴근을 한 듯 아까 본 양복 차림인 형을 보며 맞은편 자리에 앉자 곧 메뉴판을 든 직원이 다가온다.

진한 붉은색의 메뉴판을 건네는 남자를 보며 수현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고는 대충 주문했다.

“전 커피요.”

그 말과 동시에 점원과 형의 시선이 이쪽으로 날아든다.

그건 ‘위스키 바에서?’라는 의문이 담긴 시선이었다. 동시에 ‘제정신이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잠깐 착각했어요. 그냥 형 드시는 걸로 마실게요.”

“술을 마실 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마시나 안 마시나 제정신 아닌 건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요.”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인데 술 마신다고 달라질 게 뭐냐 싶어 그렇게 말하자 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일리 있다는 제스처였다.

“싱글 몰트는 뭐가 있지?”

그 질문에 형 기분이 진짜 아주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날 죽이려는 거다.

“발베니 레어 메리지가 들어왔습니다.”

“좋아. 안주는 직접 초이스하고…… 얼음은 필요 없지?”

설마 싱글 몰트 위스키에 얼음을 타려는 건 아니겠지, 라는 눈빛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음 넣어 달라고 했다가는 얼음통으로 얻어맞을 것 같은 기분에 다소곳이 앉아 술을 기다리자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2년 차이인 데다 형의 친구다 보니 햇수로 알아 온 건 대충 15년이 넘지만 얼굴을 본 건 실제로 얼마 되지 않는다.

둘째 형의 친구라고 해 봐야 같은 학년에 같은 반이었을 뿐이고 둘째 형이 일방적으로 따라다닌 거지,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탓에 어린 시절에도 데면데면했고 자란 후에는 더욱 접점이 없어 볼 일이 없었다. 특히 이 사람이 유학 간 뒤에는 만날 일조차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 이 사람과 자신의 관계는 사실 이제 막 일주일 된 직장 동료라고 봐야 한다. 그것도 같이 일할 일 없는, 그냥 직장만 같은.

그래서인지 너무나 어색하고 불편한 그 분위기에 어떻게 입을 열까 망설이다 가장 무난한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다.

“일, 방금 끝나셨나 봐요.”

“그러니 지금 왔겠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한심해하는 게 분명한 그의 답에 도저히 더는 이 침묵을 참을 수 없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냥 대놓고 말할게요. 주영이랑 약혼하실 거예요?”

이미 한 번 했던 그 질문에 형은 처음의 것과 비슷한 답변을 내놓았다.

“글쎄?”

“형이 약혼 거절해 주시면 안 될까요?”

간절함을 담아 그렇게 부탁한 순간 현규 형이 진짜 너무나 이상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눈빛은 어째서, 라고 묻고 있었다. 그래서 주저리주저리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아까 통화를 어디서부터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주영이가 저희 삼촌하고 사귀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데도 주영이랑 약혼하실 거예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형 약혼자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요…….”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은 사람하고 결혼할 거냐는 말에 형이 진짜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건 흡사 선형대수학 책을 처음 펼쳤을 때 자신의 표정과도 같았다.

대체 얘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딱 그런 얼굴이었다.

그 순간 비로소 형의 가족 사항과 환경이 빠르게 굳어 있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형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 수를 측정 불가능할 만큼 많은 이복형제와 그나마 측정 가능한 동복동생을 보유한, 일명 동물의 왕국이라 불리는 집안의 유일한 적자니, 그럴 수도 있다.

그래, 거기까지는 이해했다.

문제는 그걸 이해하고 나니 형을 설득할 방법이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철저하게 연애와 결혼을 분리한다면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괜히 위하는 척 말 돌리지 마. 문제는 주영이와 내가 아니라, 너일 텐데?”

정확히 정곡을 찌른 그 말에 수현은 움찔했다. 사실, 그 문제가 가장 크긴 하다.

“……들으셨어요?”

“들렸지.”

“그러니까 그냥 거절해 주시면 안 될까요?”

“어차피 나도 결혼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거절은 상관없지만…….”

그 말에 수현의 얼굴이 환해지려는 순간 주문한 안주와 술이 도착했다. 차례로 테이블 위에 세팅되는 술과 잔, 그리고 안주를 내려 둔 직원이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호출하라는 말과 함께 사라지자 술을 잔에 따른 현규가 다시 느긋하게 말을 꺼낸다.

“이번 건은 나도 거절하기 어려운 일이라서…….”

단 하나의 희망을 잘라 내 버리는 그 말에 막 잔을 들던 수현은 놀라 되물었다.

“왜요?”

“아버지의 목적은 결혼 자체가 아니라 날 괴롭히는 거니까. 그리고 아버지뿐 아니라 할아버지까지 합세하셨다니…… 피할 방법이 없지, 나도.”

“대표님이 집안에서 아직 그 정도의 권위가 있으신가요?”

그 동물의 왕국의 왕이, 라는 수현의 질문에 술을 한 모금 넘기던 현규가 수현을 보며 웃는다.

아주 묘한 얼굴로.

“……어쩌면 이렇게 버릇이 없을까?”

수현의 형인 지수도 어지간히 버릇없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닌데 얘는 대체 누굴 닮아서 저 모양일까, 하고 현규가 진지하게 수현의 성장 환경에 대해 고찰하는 사이 수현이 더 생각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는다.

“제 버릇은 저희 집안 문제니 일단 넘어가고, 그래서 거절이 어려우시다고요?”

“아무리 나라도 집안에서 정한 결혼을 거절하는 건 힘들어.”

“우성 알파가 그 정도도 못 해요?”

도리어 본인이 화를 내는 수현의 뻔뻔함에 현규는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넌 우성 알파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전지전능한 인간이요.”

“오답이야. 우성 알파는 조금도 전지전능하지 않고 오히려 종마로서 집안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어.”

그러니 거절은 어렵다는 현규의 답에 수현은 속이 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러고는 한 잔 더 술을 넘기는 모습에 현규가 인상을 쓰는 순간 이번엔 다시 휴대폰의 메시지 알림음이 울려왔다.

그 소리에 진짜 싫다는 얼굴로 휴대폰을 확인하던 수현은 화면에 뜬 메시지에 비명을 내질렀다.

[식장 예약했다.]

“아, 진짜!”

무슨 인간이 하나에 꽂히면 정도를 모르냐고. 벌써 식장 잡았다는 소식에 수현이 그대로 테이블 위로 엎어지자 천천히 잔을 비우던 현규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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