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60)

“무슨 일인데?”

“큰형이 식장 잡았대요…….”

“진원 형, 성격 급하네…….”

“이럴 때만 급해요. 평소에도 좀 이렇게 움직여 보지. 어떻게 된 게 사람이 중간이 없어.”

“어차피 정해진 일이었으니 놀랄 것도 없잖아.”

“뭐가요?”

“너랑 해준 형.”

“……형이 어떻게 알아요, 그걸?”

“중학교 때부터 지수가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 시절 가끔 삼촌이 픽업을 오면 친구들이 저 사람은 누구냐고 묻길래 약혼자라고 대답하긴 했다. 그 덕에 교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것 같다.

그때는 그럴 만한 다른 이유가 있긴 했지만 하여간 삼촌과 결혼할 생각이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어릴 때 하던 얘기죠. 그냥 어른들이 그러라니까 그러려니 한 거지, 지금은 상황이 다르죠.”

빠른 부정에 막 술을 마시던 현규 형이 느릿하게 대꾸한다.

“……그래?”

“다른 건 둘째 치고, 삼촌은 주영이랑 만나고 있는데 제가 뭐 하러 삼촌하고 결혼하겠어요? 우리 집은 결혼할 거라면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라는 쪽이라고요. 그래서 삼촌하고 주영이 결혼을 추진 중이었는데…….”

갑자기 일이 꼬였다며 수현이 다시 빈 잔에 술을 채우곤 한 모금 넘기자,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잔을 비우는 수현을 응시하던 현규가 다시 묻는다.

“……너는?”

지나치게 짧은 그 질문에 잔을 다시 내려 둔 수현이 무슨 뜻이냐는 얼굴로 현규를 바라보자 현규가 구체적인 설명을 더해 준다.

“애인이 있다면, 너희 집에서 굳이 결혼을 강요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애인 없냐는 그 질문에 수현이 억울해하는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있으면 제가 이러고 있겠어요?”

왜 아픈 데를 찌르냐며 수현이 다시 잔을 손에 들자 현규가 손을 뻗어 수현의 손목을 잡아 말린다.

“천천히 마셔.”

걱정이 담긴 그 말에 수현은 고개를 들어 현규를 바라봤다. 그러자 현규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다시 묻는다.

“얼음 필요해? 토닉은?”

갑자기 친절해진 현규의 태도에 수현은 조금 경계하듯 그를 힐끔거렸다.

절대 그답지 않은 그 태도에 수현이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잔을 들자 수현이 경계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현규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수현을 다그친다.

“표정이 왜 그따위지?”

“……형이 저한테 친절하신 건 처음이라서요…….”

“그간은 친절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지금은요?”

친절할 필요가 있냐, 라는 수현의 질문에 현규가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앉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 신호에 방금 술을 가져왔던 직원이 바로 옆으로 다가서 정중하게 묻는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이 녀석이 오늘 종일 굶었을 테니 식사가 될 만한 걸 준비해 줘. 소화가 잘되는 종류로.”

“이탈리안도 괜찮으실까요?”

직원의 제안에 현규가 수현을 돌아본다. 이탈리안 괜찮냐고 묻는 그 시선에 수현은 그제야 자신이 오전 샤워 후 컵라면 하나만 먹은 뒤 내내 커피만 마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건 그의 호의였다.

호의에는 예의 바르게 답해야 한다.

“……가리는 건 없는데요…….”

갑자기 저한테 왜 이러시나요, 라고 물으려는 순간 그가 다시 직원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럼, 이탈리안으로.”

“네.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메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친절한 직원이 멀어지자 다시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앉은 현규가 잔을 들어 올린다.

“속은 채워 가면서 먹어야지.”

그건 그렇기는 하고, 또 갑자기 빈속에 술을 퍼부어 확 하니 술기운이 오르고 있는 것도 맞지만 어쩐지 의뭉스러워 보이는 상대의 태도에 수현은 찝찝함을 느끼며 홀짝홀짝 술을 넘겼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현규를 힐끔거리는 그 시선에 현규가 잔을 천천히 흔들며 다정한 어조로 말을 건넨다.

“이쪽이 여의치 않다면 발상의 전환을 해 보는 게 어때?”

“발상의 전환이요?”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내 입장에서도 이번 약혼을 깨는 건 쉽지 않아. 솔직히 그간 나도 쳐 놓은 사고가 있으니까. 무엇보다 집안과 집안 사이의 문제기도 하고. 네 말대로 주영이의 연애를 문제 삼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들었다시피 결혼 전은커녕 결혼 후의 외도도 우리 집에서는 문제 될 게 없거든. 알다시피 혼외 자식들을 줄줄이 데려와도 적자만 있으면 오케이니까.”

그러니까 결국 현규 형 쪽에서는 약혼을 깰 수 없다는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깔끔하게 잔을 비운 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잔을 내려 둔 현규가 건넨 한마디에 수현이 다시 고개를 든 순간 현규가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느긋하게 말을 잇는다.

“너희 집은 다르지.”

갑자기 전환된 화제에 수현이 눈을 껌뻑이며 현규를 바라봤다. 그건 무슨 뜻이냐는 질문이 담긴 눈빛에 현규가 차분히 상황을 설명해 준다.

“그러니까, 결혼하기 싫다면 우리 약혼이 아니라 먼저 너희 결혼을 깨라는 소리야. 그리고 그 김에 이쪽 약혼까지 깨 주면 더 좋고.”

그걸 위해 그를 만난 건데 자기는 못 한다면서 무슨 소리인가 하는 생각에 수현이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많이 취한 모양이네. 그것도 못 알아듣는 걸 보니.”

확실히 피곤한 데 독한 몰트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퍼부어 제정신이 아니긴 했다. 슬슬 올라오는 술기운에 머릿속이 붕 뜬 듯 점점 의식이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생각은 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이해는 했는데요…… 어떻게요?”

“말했을 텐데? 너희 집이라면 굳이 네게 애인이 있는데 강요하지 않을 거라고.”

약간의 버퍼링 후 그럼 애인을 데려가라는 말이라는 걸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알아만 들은 거다.

“애인이 있어야 데려가죠.”

“생겼다고 하면 되지.”

“오늘 결혼 얘기 듣고 갑자기 애인이 생겼다 하면 누가 믿어요?”

“그러니까, 약간의 충격 요법을 써야겠지?”

“……어떻게요?”

내 과거가 그렇게 깨끗한 편은 아니라 절대 형들이나 아버지는 믿지 않을 텐데, 하는 눈빛으로 현규 형을 바라보고 있자 현규 형이 갑자기 또 웃는다.

“일단 뭐부터 먹고 얘기해. 머리가 돌아가려면 당분이 필요하니까.”

안주라도 먹으라는 듯 현규 형은 곧 브리치즈와 가리비구이, 그리고 위스키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느낌의 브라우니를 권했다.

마치 어린아이한테 사탕을 쥐여 주며 꼬시는 납치범 같은 음흉스러운 그의 행동에 일단 브라우니를 잘라 먹으면서도 계속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형은 여전히 입매를 느슨하게 한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은 이쪽을 향한 채였다.

그런데, 그 시선이 좀 불편하다. 살짝 미소를 띤 채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묘하게 껄끄럽다.

형의 눈빛은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악동처럼 광기 어리게 빛나고 있었다.

신변의 위험을 느끼게 하는 그 눈빛에 더는 침묵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충격 요법이라는 게 어떤 건데요?”

작은 그 물음에 술을 마시던 형이 살짝 눈웃음을 흘린다.

“성격이 급하군.”

역시 그쪽 집안 핏줄이야, 라는 형의 말에 자신의 상황을 알렸다.

“제 상황이 급하거든요…….”

큰형이라면 지금쯤 청첩장을 찍고 있을 수도 있다고 덧붙이며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하자 큰형을 잘 아는 현규 형이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진원 형이 추진력이 있긴 하지. 특히 쓸데없는 일에…….”

“그러니까요…….”

정작 성실히 해야 할 일에는 지나치게 느긋해 핀잔을 들으면서 이런 쓸데없는 일에만 열심인 것도 신기하긴 하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랑 똑같다, 그런 건.

“이번 달 안에 결혼한다고?”

“일단, 아버지랑 형 계획으로는요.”

“그럼, 2주 남았나?”

그 질문에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달력을 확인해 보니 정확히 17일 남았다.

“으악…….”

너무 촉박하다. 이 상태면 진짜 내일부터 청첩장 찍을 수도 있다.

피로함에 갑자기 취기까지 올라서인지 머릿속에서 망상이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아니, 형은 식장을 잡았다고만 했지 월말이라고는 안 했다. 그렇다면 그 날짜가 바로 이번 주말일 수도 있다.

청첩장은 휴대폰으로 돌리면 되니까.

‘젠장…….’

진짜 나 이렇게 얼결에 결혼하는 거냐고 절망하는 수현의 모습에 현규가 나지막하게 말을 건넨다.

“확실하게 바로 내일 결혼을 깰 방법이 있긴 한데…… 그 김에 운이 좋으면 내 약혼도 깰 수 있고.”

그쪽 약혼도 깰 수 있다니, 이 이상 완벽할 수 없는 방법에 더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게 뭔데요?”

“하지만 조금 껄끄럽고 불편하고 거북할 수도 있는 방법이야.”

“제가 그런 거 따질 상황이 아니라서요.”

“……그렇긴 하지.”

당장 이번 주에 결혼식장에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니까, 라는 형의 말에 몸이 달아 몸을 앞으로 숙였다.

“뭔데요, 형?”

뭐든 하겠다며 수현이 핏발이 선 눈으로 간절하게 현규를 바라보자 현규가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묻는다.

“진짜, 할 생각 있어?”

“네.”

“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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