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요.”
“……사람이 이런 식으로 여러 번 물을 때는 중요한 문제라는 거니 신중하게 생각하고 답을 해야지?”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어요.”
그러니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자 뭔가를 고민하듯 천천히 잔을 흔들던 형이 마침내 시선을 맞추며 작게 대꾸했다.
“섹스.”
라고.
* * *
“맙소사…….”
드디어 세세히 떠오른 어젯밤의 기억에 수현은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술을 마셨을 때는, 특히나 어제처럼 극도로 피로한 상태에서 술을 퍼 넣었을 때는 절대 어떤 결정을 내리면 안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멍청한 짓을 했다.
사실 그 이후에는 너무 취해 기억이 여전히 드문드문 끊긴 채였지만 그 끊긴 기억만으로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현규 형을 집으로 데려온 것도 자신이었고 어차피 하기로 한 거 단번에 끝내자고 한 것도 자신이었다.
술에 취해 완벽하게 판단력을 상실한 거다. 그러니까, 어제의 자신은 법정에서도 정식으로 감형을 받을 수 있는 심신 상실 상태였다.
“드디어 기억이 난 것 같아 다행이군.”
“기억은 났습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라고 작게 중얼거린 수현은 몸의 통증도 잊은 채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너무 취해 그다음 대화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둘이 사귀는 걸로 하자고 했던 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둘이 사귄다고 하면 어쨌든 이쪽 집안에서는 결혼을 포기할 거고 저쪽에서는 현규 형이 나랑 결혼하겠다고 우기며 약혼을 파기할 생각이었다.
거기에 섹스가 필요한 이유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빠르게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라는 게 현규 형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진짜 이걸로…… 될까요?”
“사귄다고 해 봐야 네 말대로 안 믿을 테고, 무슨 헛소리냐 증명해라, 라고 하실 테니 미리 증명하고 시작하는 거지.”
확실히 형들과 아버지라면 아마 ‘저거 또 지랄한다.’라고 무시하고 말 거다. 그건 맞다.
하지만…….
“그러니까, 진짜 효과가 있을까요? 하룻밤 잔 걸로…….”
이론적으로는 알파가 오메가에게 삽입한 상태에서 몸 안에 정액을 남기면 알파 페로몬이 강하게 뒤섞여 알파와 오메가들은 알아챌 수 있다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타인의 페로몬을 감지하기는커녕 아직 발정기도 오지 않은 반편이라 그 이론을 머리로는 아는데 솔직히 이해는 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페로몬으로 타인이 섹스를 했는지 안 했는지를 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럼 알파와 오메가는 모두 섹스한 다음 날 티가 난다는 건데…….
“항상 티가 나는 건 아냐. 임신을 원하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관계 중에는 콘돔을 쓰기도 하고 또 알파의 페로몬이 약할 경우에는 인지하지 못하니까.”
마치 수현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한 현규의 설명에 수현은 겨우 안도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런데, 그럼 이것도 소용없는 거 아니에요?”
기억에는 없지만 오체분시 수준으로 온몸을 고문하듯 관계를 가졌는데 효과가 없으면 억울하지 않겠냐고 불안해하자 현규 형이 묘한 미소를 입가에 띤다.
조금 짜증이 난 것도 같고 자존심이 상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한심해하는 것 같기도 한, 아주 복합적인 의미가 담긴 그 미소에 조금 움찔한 순간 형이 말을 건넨다.
“……그건 출근해 보면 알겠지.”
“출근해야 돼요?”
순간,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눈빛이 날아왔다.
그러고 보니 해야 한다. 온몸이 끊어져도 출근해 과시해야 한다.
내가 어젯밤 이 남자랑 잤다고.
……그것도 회사에.
그렇게 구체적으로 다시 생각하니 좀 미친 짓인 것 같다.
형의 말대로 진짜 확연히 티가 나는 거라면 회사에 가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아니, 가야 하긴 하는데…… 이건 좀 과격하지 않나? 소문이야 당연히 빠르게 퍼지고 곧장 아버지와 큰형 귀에도 들어가 난리가 나겠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아니, 그 전에 내가 회사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까?
술이 깨고 잠을 푹 잔 덕에 피로가 가시며 뇌가 정상적으로 가동하자 자신이 어젯밤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실감 나기 시작했다.
술을 끊어야 한다.
“곧 옷이 올 테니 받아 두고 아침 식사 준비해.”
“……옷이요?”
그럼 이 꼴로 출근할까, 라는 형의 눈빛에 금세 꼬리를 말았다. 시간 여유는 있지만 어차피 이 오피스텔은 바로 회사 건물의 옆 건물이었다.
차로 가면 차를 빼고 주차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정도로,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면 7분 짧으면 4분이다.
이런 곳에서 굳이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출근할 필요는 없긴 하다. 게다가 오늘은 같이 출근해야 하니까…….
“아침은 간단하게 준비해.”
너한테 기대치가 높지 않으니 대충 먹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이야기에 본능적으로 배려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려던 수현은 바로 정신을 차리곤 곧 이 처사가 상당히 부당한 것임을 알렸다.
“저기, 이 상황에서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제가 지금…… 너무 아프거든요.”
솔직한 그 말에 그가 ‘왜?’라는 얼굴로 이쪽을 돌아본다.
“온몸의 근육이 아프거든요. 거기……도 아프고요.”
“……아프다고?”
“네.”
“……겨우, 그 정도로?”
그게 말이 되냐는 듯 현규가 경악한 얼굴로 되묻자 수현이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하냐는 얼굴로 대꾸한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가 처음이라서요…….”
초심자는 좀 배려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수현의 정당한 발언에 현규가 표정을 굳힌다.
“……처음이라고?”
28살이, 라는 그 질문에 수현은 도리어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대꾸했다.
“아직 발정기도 안 왔는데 당연히 처음이죠.”
“그게 발정기랑 무슨 상관인데?”
“발정기도 아닌데 섹스를 왜 해요?”
발정기가 아니라도 섹스는 한다고 하려던 현규는 이내 수현이 어린 시절부터 해준과 정혼한 상태라 그럴 일이 없었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결혼과 연애와 섹스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지만 수현에게는 그 세 가지가 삼위일체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여태 연애를 못 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그건 수현의 별난 성격 탓이 가장 크겠지만…….
“그럼, 해준 형과도……?”
혹시나 해 던진 질문에 수현은 온 얼굴로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그딴 걸 묻냐고 말하는 그 표정에 현규는 난감해하며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그랬군…….”
“네, 그랬어요……. 그러니, 아침은 패스하죠.”
충격적인 어젯밤 탓에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사실 지금 앉아 있는 것도 힘들다고 부탁하자 현규가 이번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일단 쉬어. 출근은 할 수 있겠어?”
“해야죠.”
그걸 위해 몸이 걸레짝이 되는 걸 감수했는데 출근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출근하자마자 퇴근하는 한이 있어도 일단 회사에 발을 디뎌야 한다.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나와. 아, 안은 긁어내면 안 돼.”
할 말 다 했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선 현규가 주방으로 향하며 건넨 충고에 이제 완전히 제정신이 돌아온 수현이 민망해하며 말을 돌린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 안 하셔도 돼요.”
“넌 모를 것 같아서.”
그야,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어떻게 긁어내는 건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그가 말 안 해도 안 했을 거라고 하자 현규 형이 그럴 것 같았다며 웃는다.
“앞으로도 배울 필요 없을 거야.”
“그나마 다행이네요.”
형이 일어선 순간 때마침 벨이 울려왔다. 그 소리에 인터폰을 보자 그쪽으로 다가선 형이 화면을 확인하곤 현관으로 다가선다.
“내 옷이야. 가서 샤워부터 해.”
“네.”
투 룸 오피스텔 안에서 현관으로 향하는 형을 보며 다시 간신히 엉덩이를 들어 올려 어기적거리며 침실로 가는데, 막 문을 열려던 형이 뭔가 떠올랐는지 다시 자신을 부른다.
“아, 그리고 오늘 내로 매트리스 바꿔.”
“……꼭 바꿔야 돼요?”
“바꿔야지. 오늘부터 내가 이 집에서 살 테니까.”
“왜요?”
그렇게 묻는 순간 너 대가리가 안 돌아가냐는 의미의 눈빛이 날아왔다. 연애하는 김에 아예 동거까지 가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해 버리려는 거였다, 형은.
확실히 그쯤 되면 누구도 손 못 댄다. 아무리 모른 척 쉬쉬하려 해도 일단 회사에도 소문이 파다하게 날 테니까.
자신의 경우야 사실 상관없지만 현규 형에게는 리스크가 크다. 왜냐하면 현규 형이 우리 회사 대표님의 유일한 적자이자, 미래의 대표님이신 동시에, 현재 우리 회사 최대 주주니까…….
“아…….”
그래서 형이 회사에 먼저 퍼트리자고 한 거였구나, 하고 수현은 납득했다.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형의 약혼을 깨기 위한 옵션이었다.
“……형, 똑똑하시네요.”
“그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그냥 내가 주문할 테니 비밀번호나 내놔. 침구랑 매트리스, 그리고 소파도 전부 바꿀 테니.”
여기 가구들 다 마음에 안 들어, 라는 현규의 말에 수현이 이거 다 새로 산 건데, 라고 말하려는 순간 현규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직후 열린 문 틈으로 어마어마한 캐리어들의 폭격이 시작됐다.
* * *
“저기…… 옷을 옮기신 이유는 저도 충분히 이해했는데요…….”
“했는데?”
“……이건 좀 심하지 않나……요?”
현규의 말대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온 뒤 침실 안의 좁은, 명칭만 그렇지 실상은 조금 큰 옷장과 다를 바 없는 드레스룸의 문을 연 순간, 수현은 이곳이 자신의 집이 맞나, 하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아직도 내가 술이 덜 깼거나 어제 너무 과로해 머리가 어떻게 된 탓에 자신의 집과 남의 집을 구분 못 한 건가, 고민했지만 방금 들어간 욕실에 놓인 목욕용품들은 모두 자신의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 드레스룸의 오른쪽 옷걸이에 걸린 옷들은 모두 자신의 것들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