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정면의 옷걸이에 걸린 슈트케이스들과 처음 보는 옷들, 그리고 그러지 않아도 좁은 드레스룸을 꽉 채운 시계와 넥타이 진열장이 눈에 거슬렸을 뿐.
“우선, 옷을 다 옮긴 건 아냐. 일단 일주일간 입을 옷들만 대충 옮긴 건데…… 확실히 좁긴 하네. 당장은 무리지만 근처에 들어갈 만한 아파트를 알아보는 중이니 기다려.”
드레스룸 앞에서 고뇌에 빠진 수현의 옆으로, 어느새 편안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현규가 다가와 수현의 물음에 답해 주자 수현이 고개를 내젓는다.
“그게 아니라 전 제 옷이 왜 저기에 있는지가 궁금한 건데요?”
원래는 슈트케이스들이 걸려 있던 곳을 채우고 있던 자신의 문신 같은 검은 반소매 티셔츠와 검은 후드, 그리고 체크무늬 셔츠와 조거팬츠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모습에 수현이 이건 무슨 매너냐는 말을 돌려 하자 현규 역시 수현이 가리킨 방향을 내려다본다.
그러곤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수현을 바라본다.
“쓰레기라 대신 버려 준 건데?”
어차피 버릴 옷 아니었나, 하는 그의 말에 수현은 온갖 욕설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현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보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시스템개발팀은 검은 티셔츠가 유니폼인가?”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아니라면, 시스템개발팀은 복장 자율로 아는데 왜 다들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거지?”
로고나 브랜드, 그리고 등에 그려진 그림은 다르지만 지난 일주일간 현규가 만난 시스템개발팀은 모조리 검은 티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그것도 그나마 보기 좋은 케이스였고 간혹 수현처럼 트레이닝 바지나 조거팬츠에 슬리퍼를 신고 어슬렁거리는 직원들도 있었다.
엔지니어들이고 최근 회사의 시스템을 통째로 갈아엎느라 며칠째 밤을 새우는 중이니 그 정도는 모른 척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괴기했다.
다들 딱 떨어지는 양복과 정장 차림으로 다니는 회사 안에서 검은 티셔츠 무리가 슬리퍼를 신고 어슬렁거리는 건, 상당히 거슬렸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집까지 가까운 수현은 사무실을 거의 안방 취급했다.
슬리퍼를 신고 칫솔까지 물고 다니는 걸 몇 번 봐 그렇지 않아도 주의를 주려던 차였다.
물론, 말해도 안 듣겠지만.
“그거야 옷을 못 갈아입으니 검은 옷만 입고 다니는 거죠.”
“옷을 왜 못 갈아입는데?”
“퇴근을 시켜 줘야 옷을 갈아입죠.”
두 달간 진짜 집에 들어와 잠만 자고 나갔다는 수현의 말에 현규는 그제야 지난 두 달간 시스템개발팀이 격무 상태였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걸 기억해 냈다.
“그러게 오류를 내지 말았어야지.”
“오류는 내지 말아야지, 하면 안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게 능력이야. 너랑 팀장을 꽤 높은 몸값으로 스카우트한 걸로 아는데 그 정도 값어치는 해야지?”
“……그렇죠.”
그러고 보니 그때 아버지가 반대할까 봐 회사 옮긴다는 것도 숨기고 옮겼던 건데, 그 덕에 형과도 동료가 되었고 또 어쩌다 보니 애인까지 되게 생겼다.
진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옷은…… 뭐, 됐어. 나도 아직 한국 쇼퍼는 못 정했으니 그건 정해진 뒤에 얘기하기로 하고…… 우선 식사부터 하고 출근 준비를 하자고.”
“식사요?”
“그래.”
그러고 보니 뭔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커피 냄새가 아니라 먹음직한 밥 냄새였다.
“……형이 하셨어요?”
“있는 걸로 대충. 그리고 너, 냉장고 좀 치워. 유통 기한이 지난 것들이 한가득이야. 어떻게 레토르트의 유통 기한까지 지났을 수가 있지?”
갑자기 시작된 잔소리에 왜 자신이 이 사람을 껄끄러워했는지, 그 이유를 드디어 깨달았다.
저 잔소리와 결벽증이 거북했던 것 같다.
어릴 때도 가끔 볼 때마다 칠칠하지 못하다고 잔소리를 엄청 들었다. 사실 몇 번 보지도 못했는데 볼 때마다 잔소리를 들었다는 건 대단한 거다.
자신이 유독 남의 말을 안 듣는 것도 있지만 이 사람은 좀 심하다.
과거를 떠올려 보니 새삼 어제의 자신을 저주하고 싶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경솔했던 것 같다. 이런저런 과정은 차치하고서라도, 현규 형의 잔소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일 다 마무리되면 정리하려고 했어요.”
“언제?”
“주말에요…….”
“주말에 꼭 해야 할 거야.”
이제부터 내가 여기서 살아야 하니까, 라는 형의 말투에 부루퉁하니 대꾸했다.
“네에…….”
“표정이 아주 불손한데?”
“……죄송합니다.”
불손한 건 사실이라, 이런저런 설명 없이 사과하자 형이 이마를 툭 두드린다.
“일단 밥부터 먹어. 오늘은 아주 바쁜 하루가 될 테니.”
형의 말대로 자신의 생애 가장 파란만장한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준비는?”
“다 됐어요.”
김치찌개에 계란국, 그리고 김과 참치를 넣은 계란말이로 대충 아침을 해결한 뒤 수현은 언제나와 같은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를 유니폼처럼 걸친 채 집을 나섰다.
그러곤 평소 큰 프로젝트를 끝낸 뒤 출근할 때처럼, 눈의 초점을 풀고 최대한 멍청해 보이는 얼굴을 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오늘은 그게 잘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이 너무 또렷했다.
함께 출근하는 남자 때문이었다.
아무리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아침 식사를 거하게 했어도 여전히 힘이 없어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힐끔 옆에서 속도를 맞춰 걷는 형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에게 물었다.
이제 회사까지 5분 남았다.
진짜 이대로 진행해도 좋은 거냐, 이수현?
“청약 철회는 안 돼.”
기한 지났어, 라는 악덕 보험 설계사 같은 현규의 말에 수현이 어떻게 내 생각을 알았냐는 듯 현규를 바라보자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선 현규가 하향 버튼을 누르며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낸다.
“너 얼굴로 다 자백하는 타입인 거 모르나 보지?”
“……아니, 알긴 아는데요…… 그래도, 형은 절 잘 모르시잖아요.”
날 아는 사람이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세 알아채지만 어떻게 형이, 라고 놀라워하자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형이 사람들을 피해 안으로 들어서며 느긋하게 답한다.
“넌 뇌가 단순하니까.”
컴퓨터로 따지자면 MS DOS 수준이라는 기가 막힌 형의 평을 이번엔 순순히 인정했다.
“그건 인정. 형들은 넌 뇌도 이진법일 거라고 하니까요.”
수현의 고백에 현규가 코웃음을 친다.
“이진법씩이나?”
“그 정도는 돼요.”
삼진법은 무리지만 이진법은 확실하다고 답한 수현은 가방을 바로 메며 층수를 확인했다.
출근 시간이라 층마다 사람들이 올라타 엘리베이터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또 아주 못 참을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형 아침에 한식 드시나 봐요?”
“한국에 왔으니까.”
“그럼, 내일부터 아침에 한식 차려야 돼요?”
난 아침은 거의 커피만 마시는데, 라는 수현의 걱정을 현규가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아까도 말했듯이 너에 대한 기대치는 낮으니 대충 해. 토스트에 커피 정도면 돼. 꼭 한식이 먹고 싶을 때는 내가 해도 되니까.”
“저 요리 잘하는데요.”
그 말에 바로 네가 퍽이나, 라는 시선이 날아왔다. 현규가 못 믿는 건 이해하지만 수현은 조금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한 번 하면 기본이 12첩 반상이라 그렇지 요리는 잘한다. 형들이 네 존재 가치는 요리와 코딩뿐이라고 할 정도로.
하지만 굳이 현규 형이 원하지 않는다니 그건 나중에 증명하기로 하고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건물을 나서 방향을 틀자 바로 옆에서 따르던 형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본다.
“진짜, 바로 옆이었군…….”
집이 바로 회사 옆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현규가 본사에 출근한 건 일주일 전부터고 어젯밤은 술집에서 택시를 타고 온 거라 실감하지 못했는데 아침에 나와 보니 진짜 바로 옆 건물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건물 사이 거리는 도보로 1분 거리다.
이 정도면 그냥 회사에서 사는 거라고 봐도 될 정도다.
“그래서 이사 온 거예요. 퇴근을 안 시켜 줘서.”
이 거리면 잠깐 쉬는 시간에 집에 와서 잘 수 있다고 수현이 변명처럼 중얼거리자 현규 역시 그건 그렇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현규 입장에서도 아주 만족스러운 거리였다. 어차피 집에는 잠만 자러 들어가는데 출퇴근 시간이 준다면 좋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좋은 옵션이 딸려 왔다.
“괜찮네. 피곤할 때 퇴근하기도 편하고, 점심시간에 잠깐 들를 수도 있고…….”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날아오는 날카로운 시선을 의식한 순간, 수현은 움찔했다.
어쩐지 신변의 위협이 느껴지는 섬뜩한 그 느낌에 몸을 움츠린 수현이 현규를 돌아보자 현규가 그 시선을 무시한 채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오늘 퇴근은?”
“어…… 어제 일 끝났으니 딱히 문제없으면 아무 때나 해도 될 거예요. 보통은 신입들만 남고 3년 차 이상은 다 오전 근무만 하니까요.”
시스템개발팀은 완전한 탄력 근무제라 작업을 몰아 한 이후에는 딱히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한 달까지도 휴가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문제는 생기기 마련이라 실제로 쓸 수 있는 게 그 정도는 아니고 대부분 사나흘 휴가를 번갈아 내는 편이었다. 대신, 오전이나 오후 근무만 하는 경우가 잦을 뿐.
“잘됐군. 그럼, 매트리스랑 소파 받아 놔.”
“……진짜 우리 집에서 사실 거예요?”
했던 말 또 해야 하냐고, 조금 짜증 내는 듯한 형의 반응에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네, 사셔야죠.”
설마 동거 중인데 약혼에 결혼까지 진행하지는 못할 테니까, 라고 작게 웅얼거린 순간 가방 안에 있던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려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큰형이 아니다.
[태형이가 뭉치자는데. 다음 주 안 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