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60)

“……블라인드요?”

결혼도 안 하지만 한다 해도 블라인드에 내 결혼 얘기가 왜 올라오는데, 라는 의문에 일단 개인 휴대폰으로 블라인드에 접속했다. 하지만 블라인드에는 너무 많은 글이 올라와 있어 대체 어디에 결혼 이야기가 있는 건지 찾기 힘들었다.

“무슨 글이요?”

“1시간 전에 올라온 글 중에 조회 수 제일 많은 글 봐 봐. 엘리베이터에서 봤을 때 조회 수 2만 넘었어.”

“뭐길래 2만이 넘어요?”

아침부터 다들 블라인드만 하나, 라며 페이지를 넘기는데 바로 다음 페이지에 좋아요와 조회 수뿐 아니라 댓글까지 폭발 중인 글이 하나 보였다.

벌써 조회 수가 47k다.

우리 회사 최대 주주가 직원이랑 결혼한다네. 신데렐라 얘기로 기사 좀 날 것 같아.

“이건 또 뭔 소리야?”

웬 신데렐라 타령이냐며 일단 그 글을 클릭해 보자 제목과 SJ라는 회사명 아래로 짤막한 글이 뜬다.

우리 회사 최대 주주 ㅅㅂㅌ 평사원하고 결혼하나 봐. 오늘 상견례 하러 간다고 함. 곧 모 그룹 신데렐라 기사 날 듯.

SJ – 0*******

누가 신데렐라야? ㅇㅅㅎ 대리도 금수저야. ㅇㅅㅎ 대리 형하고 최대 주주가 친구고 ㅇㅅㅎ 대리도 최대 주주 동창임. 애가 좀 모자라 보이고 하고 다니는 게 그래서 그렇지 집안은 좋아.

WESOFT – 3*****

그래도 둘이 회사에서 눈 맞은 거 아냐?

SJ – 0*******

그럴 리가. 금수저가 지네 회사 두고 우리 회사에 왜 왔겠어? 그냥 짜고 치는 고스톱이야. 애초에 결혼하기로 하고 ㅇㅅㅎ 대리가 먼저 회사 옮기고 최대 주주가 한국 돌아와서 사내 연애하는 척하다 결혼하는 거야.

SJ – y*****

그런데 결혼 가능해? ㅅㅂㅌ ㅇㅅㅎ 대리 ㅂㅌ 아님?

SJ – 0*******

ㅇㅁㄱ임.

SJ – y*****

ㅇㅁㄱ가 2달 동안 철야 작업이 가능해?

SJ – 7*****

그런데 아무리 직원들 ㅂㅌ가 대부분이라고 해도 그러고 출근해도 되는 거야? 너무 티 나던데? ㅋㅋㅋㅋㅋ

한신 은행 – s******

어느 정도길래?

SJ – 7*****

우리 막 ㅅㅅ했어요 광고하는 수준. ㅇㅍ랑 ㅇㅁㄱ는 다 알아봤을걸.

SJ – D*****

난 ㅂㅌ라 거기 있었는데도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최대 주주가 아침 했다고 하더라. ㅋㅋㅋ 그리고 저녁은 ㅇㅅㅎ 대리가 한다면서 침대 바꾼다고 하는 거 보니 둘이 이미 동거 중이야. 곧 결혼 기사 뜰 느낌.

SJ – y*****

최대 주주가 요리도 해? 대박.

SJ – L*****

헉! 그럼 최대 주주 한국 들어오자마자 같이 살기 시작한 거야? 그런데 ㅇㅅㅎ 대리 이직 후 매일 일만 하지 않았나? ㅅㅂㅌ 엄청 바쁘던데?

신용보험 – D*****

할 놈들은 다 하더라.

태화물산 – A**********

그런데 ㅅㅂㅌ이 뭐야? ㅅi바ㄹ탱?

SJ – y*****

ㅋㅋㅋㅋㅋㅋ SㅣVㅏㄹ팀이야. 시스템개발팀.

겨우 1시간 전의 일로 블라인드에서 어그로 취급까지 당하고 있는 글을 세세하게 읽어 내려가던 수현은 수많은 댓글 중 유독 자주 보이는 한 아이디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SJ – 0*******

이 사람은 확실히 뭔가 알고 있다. 풀어놓는 정보로 봐서는 아마 같은 학교 동창일 가능성이 커 보이는데, 문제는 고등학교에서 더 이상 정보가 업데이트 안 됐다는 사실이었다. 그 탓에 그가 하는 추측들이 모두 헛발질이다.

너무 자신만만하게 글을 써 놔서 다들 이 사람 말에 휘둘리고 있는데 슬프게도 진짜 다 틀렸다. 영화나 소설에서 멀쩡한 범인 놔두고 주인공 의심하며 따라다니다 빌런 짓 하는 경찰 같은 캐릭터였다.

일단 내가 아버지 회사로 안 가고 이 회사에 온 이유는 오로지 그 회사에 가족들이 드글드글한 탓이었다. 가족들 간섭이 지긋지긋해서 야반도주까지 해 가며 독립하고 이직한 건데 미쳤다고 가족 회사에 들어갈까…….

게다가 집안끼리 결혼이라니, 말도 안 된다. 우리 아버지랑 대표님이 아직도 연락을 하는 유일한 이유는 서로가 저 새끼 망하는 걸 꼭 실시간으로 봐야 한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사돈이라니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왜 모자라?”

형들이야 가끔 모자라고 덜떨어진 반편이라고 하지만 네가 뭔데 나한테 모지리라고 하는데. 해킹해서 어떤 놈인지 찾아낼까 고민하고 있는데 윤 팀장님이 어디서 굴러다니고 있는 의자를 끌고 와 옆에 앉으며 숨도 안 쉬고 닦달한다.

“강 팀장 한국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됐는데 어떻게 사귀게 된 거야? 진짜 동거해? 아니, 그런데 이 대리 어제까지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잖아. 아니, 그 전에 강 팀장이 이 대리 형 친구라는 게 사실이야? 이 대리도 진짜 금수저였어?”

물어볼 게 하도 많아 대체 뭐를 먼저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뒤죽박죽 뒤섞인 윤 팀장의 질문에 수현은 순간 입을 다문 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고 보니 현규 형과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니다. 했을지도 모른다. 현규 형처럼 교활하고 섬세하고 치밀한 사람이 그 정도 설정을 안 해 놨을 리가 없다.

그냥 자신이 기억을 못 하는 것 같다.

빌어먹을 술이 기억을 전부 잡아먹어 버렸다.

“……그게…… 원래, 현규 형이 둘째 형하고 중고등학교 동창이고 친구예요. 저랑도 동문 맞고요. 그런데, 제가 금수저는 아니에요. 저희 아버지랑 대표님이 친구이긴 한데요…….”

사이는 안 좋지만, 이라는 말은 빼고 팀장님의 의문에 하나씩 답해 주자 그간 자는 척하고 있던 직원들이 전부 미어캣처럼 목을 빼곤 파티션 너머로 이쪽을 바라본다.

더는 못 들은 척도 못 하겠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그렇게 됐어요. 원래 알던 사이인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서……그냥…… 만나는 중입니다. 그런데 진짜 결혼은 아니에요. 저희 삼촌하고도 알아서 오랜만에 같이 점심 먹기로 한 거예요.”

“그렇다는 건 어쨌든 집안끼리도 얘기 끝났다는 거네.”

집안끼리 얘기가 끝나기는커녕 오늘 집안이 뒤집어질 예정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어 적당히 말을 흐렸다.

“아니에요.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동거부터 해?”

오피스텔 건물을 나와 회사 간의 거리를 가늠한 형의 눈빛이 광기로 빛나던 걸로 봐서 형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려는 이유는 ‘회사가 가까워서’라는 게 정답이지만…… 그건 너무 웃길 것 같아 말을 돌렸다.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거라서요…….”

둘 다 바빠 따로 얼굴 볼 시간도 없으니까, 라고 웅얼거리며 가장 그럴듯한 변명을 대자 윤 팀장님이 화들짝 놀라 튀어 오른다.

“그렇다는 건 결국 결혼한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나중에요.”

‘언젠가, 아주 먼 미래에’라고 확실히 선을 긋자 윤 팀장님이 다시 소리친다.

“어쨌든 한다는 거잖아!”

“선봤다고 다 결혼하는 거 아니잖아요.”

“선하고 동거가 같아?”

“……같을지도요?”

형네 집에서는, 이라는 말을 빼고 슬쩍 시선을 피하자 팀장님도 그러고 보니 그럴 수 있겠다고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거기까지만 말한 뒤 묵비권을 행사하려 입을 다물었다.

현규 형하고 말도 맞춰야 하니 더는 말할 수 없다. 아마 현규 형도 어젯밤 필름이 끊긴 걸 알고는 점심때 구체적인 설정을 더 얘기하려고 한 것 같았으니까…….

현규 형은 블라인드에 글이 올라온 걸 알고 있을까, 고민하는데 책상 위의 전화가 울려왔다.

딱 좋은 타이밍에 걸려 온 전화에 서둘러 수화기를 손에 들었다.

“시스템개발팀 이수현 대리입니다.”

- 대표이사실 비서팀 정이원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 대표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시스템개발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뜻밖의 제안에 수현은 일단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되물었다.

“……대표님이요?”

- 네.

“왜 절 보자고 하시는 건데요?”

- ……이유는 아실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대표님이 벌써 블라인드 글을 보신 모양이다. 빨리 보고받아도 퇴근할 때쯤에나 보실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우리 회사 마케팅팀 직원들이 상당히 능력이 있거나, 종일 블라인드만 하거나 둘 중 하나인 듯했다.

“저만, 부르신 건가요?”

보통 이럴 때는 현규 형하고 같이 불러야 하지 않나, 했지만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불행히도 대표님은 그럴 입장이 아니다.

사내에서 농담처럼 현규 형을 최대 주주라고 부르는데 사실은 농담이 아니라 그게 팩트다.

보통은 서로 견제하기 위해 가족들이 나눠 주식을 보유하게 마련인데 현규 형네의 경우는 현규 형의 부친, 그러니까 현 대표님께서 측정 불가능한 슈뢰딩거의 혼외자를 보유하고 있는 탓에 그 주식을 사혼의 구슬로 만들 수는 없다고 판단 내린 회장님께서 모든 주식을 유일한 적자인 현규 형에게 전부 증여하신 탓이다.

만 20세가 됐을 때 조부의 주식을 모두 증여받은 현규 형은 10년째 이 회사의 최대 주주였고 그런 스토리를 모두 아는 사원들은 지난주에 현규 형이 전략기획팀 팀장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형을 팀장이 아니라 최대 주주라고 불렀다.

어차피 앞으로 2년 뒤에는 이사가 될 거고, 그 또 2년 뒤에는 대표가 될 테니,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호칭인 ‘최대 주주’라고 부르기로 한 거다.

그러니까 대표님은 현규 형을 불러 다구리를 칠 수 없다. 현규 형이라면 언제든 대표님을 끌어내릴 수 있으니까.

이름만이라도 회장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현규 형과 척을 지면 안 되니까 자신만 불러 조지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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