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바로 가야 하나요?”
-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다. 현규 형과 손잡기로 한 이상 대표님을 피해 갈 수는 없으니 오늘 다 끝내 버리자는 각오로 수현은 휴대폰만 챙겨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잠깐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왜?”
“볼일이 있어서요. 잠깐 다녀올게요.”
괜히 미적거리면 이것저것 물을 것 같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막 문을 닫으려는 순간 팀장님께 우르르 몰려드는 직원들이 보였다.
현규 형 말대로 검은 티셔츠를 유니폼처럼 입고는 우르르 몰려드는 걸 보니 진짜 바퀴벌레 떼 같긴 하다.
이래서 현규 형이 질색했던 모양이다.
멀리서 보니 진짜 꼴 보기 싫다는 생각을 하며 휴대폰으로 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대표님 호출받았어요.]
짤막한 문자를 보낸 뒤 엘리베이터로 가 막 상향 버튼을 누르는데 곧장 전화가 걸려 왔다.
- 아버지가 호출했다고?
“네.”
- 지금 어디야?
“엘리베이터 앞이요.”
- 몇 호기?
그 말에 호기가 뭔데, 라고 하다 서둘러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 문 위의 번호판을 확인했다.
“어…… 5호기요.”
- 23층에서 내려.
23층이면 전기팀이 있는 층이다.
“같이 가시려고요?”
뭐 굳이 둘이 움직이나 싶어 되물었지만 답 대신 돌아온 건 뚝 하며 끊긴 전화였다.
그냥 얌전히 올라오라는 경고와 다름없는 그 태도에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타 23층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잠시 기다리자 빠르게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곧 멈춘다.
칭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사이 현규를 발견한 수현은 그에게 인사를 건네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안녕하세요.’의 ‘안’ 자도 꺼내기 전에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현규는 곧장 닫힘 버튼을 눌렀다.
다급해 보이는 모습에 수현이 32층 버튼을 누르려 손을 뻗는데, 현규가 수현의 손목을 잡아 말린다.
“먼저 대화부터.”
그 말에 수현은 금세 납득했다. 이것저것 말을 맞출 게 많다.
“아버지가 왜 호출하신 거지?”
“아침 일이 블라인드에 올라왔거든요. 그걸 보신 것 같아요.”
“……아…….”
“보셨어요?”
“우리 회사 관련 글이나 회사 직원이 글을 올리면 자동으로 모니터링하도록 프로그램을 깔아 놨으니까.”
“……그런 것도 모니터링해요?”
“대부분 기업들이 다 할걸.”
“아…….”
그래서 대표님도 빨리 알았구나, 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다 문득 떠오른 바가 있어 서둘러 형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형한테 물어볼 게 있었는데요…….”
“뭘?”
“우리 어떻게 사귀게 된 거예요?”
바로 옆에 선 형을 올려다보며 우리 서사는 어떻게 되냐고 묻자 형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다.
역시, 어제 그 이야기도 했던 모양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
“……술 마신 뒤로 기억이 뚝뚝 끊겼어요.”
그래서 기억나는 부분이 있고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솔직히 말하자 형이 아주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술 마실 때마다 그래?”
“그건 아니에요. 어젠 피곤해서 그런 거예요.”
“너, 술 끊어.”
“……어제가 특별한 거예요.”
“그래도, 중간중간 기억이 끊길 정도면 심각한 거야.”
“그런 날은 극히 드물어요.”
계속되는 변명에 형의 눈빛이 점점 사나워진다. 말 여러 번 하게 할래, 라고 혼내는 기색이 역력한 그 눈빛에 빨리 기브 업을 외쳤다.
“줄일게요. 그리고 피곤한 날은 안 마실게요. 어제는 진짜 아주 특별한 케이스였어요.”
피로에 멘탈까지 나간 상태라 그랬던 거라고 솔직하게 말했지만 형은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생활 하면서 술을 안 마신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형도 아는지 더는 잔소리하지 않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간다.
“고등학생 때부터 네가 날 짝사랑하다 지난주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뒤로 자꾸만 생각나 바로 그날 저녁에 고백한 거야.”
“……제가요?”
“그럼?”
내가 고백했겠냐, 라는 현규 형의 반문에 쉽게 답이 나왔다.
“……제가 한 게 맞겠네요.”
둘 다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쪽이 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이니까, 라고 납득한 뒤 고개를 끄덕이자 형이 아주 구체적인 설정을 짜 준다.
“고등학생 때부터 짝사랑했다는 네 고백에 감동받아 내가 곧장 고백을 받아들였고 지난 한 주 동안은 서로 바빠서 통화만 하다 어제 일 마친 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키스하고, 밤에 술집에서 만난 뒤 네 집으로 가 섹스하고 곧장 동거하기로 한 거야.”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개연성까지 있어서 그럴듯하다. 청춘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첫사랑 이야기 같은 전개에 현실성을 뒤섞은 섬세한 전개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저, 설정은 완벽하긴 한데요…….”
“……그런데?”
“제가 고등학생 때부터 형을 짝사랑했다는 걸 사람들이 믿어 줄까요?”
난 그때 삼촌하고 결혼한다고 떠벌리고 다녔는데, 라는 말에 형이 이번에도 기가 막힌 답을 내놓는다.
“그러니까 더 숨겼겠지?”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삼촌하고 결혼할 건데 형을 짝사랑하니 완벽하게 숨기고 다닌 거라면, 다른 사람들이 눈치 못 챈 것도 당연하다.
절대 자신이 그렇게 섬세한 편은 아니지만 하여간 그렇다면 그런 거다.
“알았어요. 입력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돌아가서 나머지 부분도 얘기해야 하니 일찍 퇴근해. 내 짐들도 옮겨 올 테니 받아 두고.”
“옮겨 올 짐이 또 있어요?”
아직도 가져올 옷이 남았냐고 수현이 놀란 얼굴로 현규를 바라보자 현규가 이것 봐라 하는 얼굴로 웃는다.
“내 짐이 겨우 그것뿐일까…….”
“그럼 뭐가 또 있는데요?”
“이것저것.”
“귀찮…….”
자기도 모르게 터진 마음의 소리에 수현이 서둘러 입을 다물자 현규가 그런 수현을 내려다보며 싱긋 웃는다.
“뭐라고?”
너 방금 귀찮다고 했냐, 라는 말을 축약한 한 단어에 수현은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옮기셔야죠. 옷도 있고 칫솔도 있고 향수도 있어야 하고……. 여행만 가도 캐리어를 쓰는데…….”
이러다 나 잘 데나 남아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건 그냥 말 안 하기로 했다.
“오후에 매트리스와 소파 새로 들어올 테니 받아 두고.”
그 말에 놀라 다시 고개를 들고 물었다.
“오늘요?”
“그래.”
“하루 만에 배송이 돼요?”
“내가 필요하다면 해야겠지?”
말과 함께 번뜩이는 눈빛에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너도 이제 그만 좀 닥치고 나한테 필요한 일이나 하라는 눈빛이었다, 그건.
그걸 아주 잘 알아들었다.
“……32층 누를게요.”
형의 손을 대신해 버튼이나 누르겠다며 손을 뻗자 형이 또 한 번 제동을 건다.
“잠깐. 그 전에 한 가지 더.”
“네?”
더 할 말 있냐며 돌아보는 시선에 현규는 재빨리 수현의 목뒤를 오른손으로 쥐었다. 그러곤 곧 고개를 숙여 수현의 목덜미를 세게 빨아들였다.
생경한 그 감촉에 수현은 흠칫했다. 어쩐지 소름이 끼쳐 몸을 떨자 살짝 이를 세워 살을 깨문 현규가 이번엔 더 세게 살을 빨아들인다.
솜털이 쭈뼛 서는 아찔함에 눈을 질끈 감은 수현이 본능적으로 현규의 팔을 세게 쥔 순간 갑자기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 버튼을 눌렀는지, 23층에서 천천히 열리는 문 너머에 선 두 남자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엉켜 있는 현규와 수현을 보곤 눈을 휘둥그레 뜬다.
그사이 만족스럽게 수현의 목덜미에 흔적은 남긴 현규는 천천히 고개를 들다 이쪽을 바라본 채 굳어 서 있는 남자들을 확인하곤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옆에 거 타시죠.”
우리가 좀 바빠서, 라고 현규가 덧붙이자 그나마 재빨리 정신을 수습한 오른쪽의 남자가 여전히 굳어 있는 왼쪽 남자의 손목을 잡아끈다.
“야, 옆에 왔다. 그럼, 수고하세요.”
본인이 뭘 수고하라는 한 건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관성대로 인사를 마친 남자가 옆의 남자를 잡아끌고 옆으로 가는데 워낙 복도가 고요해 둘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최대 주주 아냐?”
“야, 가. 일단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