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60)

아무래도 작지만 명확히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 뒤로 곧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진짜 오늘 내로 끝나겠네요.”

공개적으로 글을 올리기에는 좀 민망한 목격담이라 블라인드에는 올라오지 않겠지만 직원들 단체 채팅방에는 올라갈 수 있다.

오늘 오전 내내 직원들 채팅방이 터지겠구나, 하며 수현은 멍하니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머릿속으로 사내 모임의 수를 세 봤다.

일단 수현이 아는 모임만 해도 동기 모임, 트래킹 모임, 스페인 회화 모임, 포도주 모임, 낚시 모임 등등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모임이 있으니 그중 하나에만 퍼트려도 사내 전체로 퍼져 나가는 건 순식간이다.

그러고 보니 팀장 단체방도 있다고 했으니 직급별로 또 모임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왜 난 대리방에 초대를 못 받은 걸까, 이직자라 차별하는 건가, 라고 고민하는데 현규 형이 다시 손을 뻗어 온다. 그 움직임에 순간 움찔하자 형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으며 자신을 지나 번호판의 32층 버튼을 누른다.

괜히 긴장했다는 민망함에 겸연쩍어져 목을 긁적이자 곧장 자세를 바로 하고 선 형이 충고한다.

“이제 올라갈 테니 정신 똑바로 차려. 그리고 아버지가 꽤 화가 나셨을 테니 엄청 내쏘실 거 각오하고.”

아마 들어서자마자 융단 폭격을 가할 거라는 현규의 말에 수현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전 남의 말 전혀 안 들어요.”

그러니까 상대의 말을 그대로 안 따른다는, 관용적 의미가 아니라 진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아예 안 듣는다.

태어난 순간부터 잔소리 자판기 같은 아버지랑 형들한테 하도 당해서 앞에서 누가 잔소리를 하면 주기율표를 외우거나 오늘 저녁 식단을 떠올리며 여기에 뭘 넣어 볼까, 아니면 양념을 바꿔 볼까 등등을 고민한다. 그러다 가끔 메뉴를 입 밖으로 내뱉어 곤란해질 때가 있기도 하지만 하여간 날 잡고 하는 긴 잔소리에는 타격받지 않는다. 생활 속 잔소리가 싫을 뿐.

어쨌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건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한다고 하자 이쪽을 내려다본 형이 신기해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다, 이내 웃는다.

그 묘한 미소에 조금 움찔하며 되물었다.

“왜요?”

“……대충 고른 뽑기가 꽤 잘 뽑힌 기분이라, 좀 어이가 없어서.”

“……인생이 좀 그렇긴 하죠.”

엔지니어 네 명이 줄줄이 붙어 몇 달을 정성 들여 고민하고 만든 게임은 쪽박 차고 그냥 며칠 만에 후루룩 만든 애플리케이션이 대박 치는 것처럼, 인생은 알 수 없다고 중얼거리며 수현이 숫자판을 바라보는 사이 드디어 3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23층보다 더 고요한 복도를 본 수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잠깐 짬이 난 김에 묻는다면…… 해물탕 싫어하세요?”

“갑자기, 그건 왜?”

“오늘 저녁에 해물탕이나 할까 해서요. 뭐, 오늘 무사히 퇴근할 수 있을 경우의 얘기지만요.”

“가리는 건 없어.”

“갑각류 알레르기는요?”

제가 게랑 새우랑 조개류를 엄청 넣거든요, 라고 수현이 덧붙이자 고요한 복도를 걸어가며 현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알레르기는 없어. 넌?”

“저도 없어요.”

“그래.”

넌 그럴 것 같았다는 현규의 답에 막 대표이사실로 다가서던 수현이 다시 묻는다.

“황태 빼고는 다 잘 드시는 거죠?”

정확히 기억한 현규의 불호 재료를 수현이 언급하자 현규가 잠깐 움찔하며 말을 멈췄다, 이내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대꾸한다.

“……뭐…… 그런 편이지.”

“그럼, 해물탕을 메인으로 동태전, 아 황태 싫어하시면 동태도 싫어하시겠네요. 그럼 전은 대구전으로 하고 나물 몇 가지에 마른반찬 만들게요. 오랜만에 무말랭이도 좋겠네요. 하는 김에 계란장도 좀 할까…….”

아니, 요즘 새우도 괜찮을 텐데 새우장이나 좀 담글까 했지만 새우장은 금방 먹어야 하니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다른 메뉴들로 머릿속을 채우며 노크한 뒤 곧장 문을 열었다. 그러곤 곧 안으로 들어서자 비서실에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본다.

그 시선에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하나 주변을 돌아보는데 마침 현규 형이 바로 옆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고요하던 비서실의 분위기가 일순 긴장되며 안쪽의 있던 한 남자가 일어서 이쪽으로 다가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강 팀장님?”

“무슨 일일 것 같아?”

진짜 몰라서 묻는 거냐, 라는 대신한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가 현규를 한 번 보고 다시 수현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확인한 뒤 묘한 말을 남긴다.

“……같이 오신 건가요?”

겉으로 보이는 남자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말의 내용은 전혀 정중하지 않았다. 왜 같이 온 거냐고 따지는 느낌이었다.

“내 사람은 내가 지켜야 하니까.”

“……사회적으로는 아주 바람직한 태도입니다만……. 대표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지는 모르겠네요. 일단, 들어가시죠. 기다리고 계십니다.”

현규와 대화를 하던 남자가 마지막 말을 남기며 문을 두드리자 기다렸다는 듯 답이 나온다.

“들어와.”

조금 낮고 힘이 들어간 음성에, 남자가 곧 문을 열자 현규가 수현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한다.

그 신호에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선 수현은 넓은 사무실 안 소파에 앉은 강 대표를 발견하곤 곧장 그쪽을 향했다.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휴대폰만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옆모습에 바로 수현의 뒤를 따르던 현규가 혀를 찬다.

“사람을 불렀으면 쳐다는 보시죠?”

이게 무슨 매너냐는, 현규의 불만에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본 중년의 남자가 두 사람을 보곤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너희…….”

두 사람이 함께 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당황한 얼굴로 막 입을 열려던 남자가 다음 순간 차마 그 뒷말을 잇지 못한 채 멍청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헤에 벌린다.

그러곤 잠시 자신이 본 게 맞나 하는 얼굴로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이내 설마 하며 고개를 내젓다, 다시 두 사람을 확인하곤 경악한다.

그사이 그의 옆으로 다가선 현규와 수현이 소파에 자리 잡자 그제야 남자가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린다.

“그래, 그랬군…… 어쩐지……. 그래, 그래야 말이 되지.”

그래, 그랬어, 라며 실성한 사람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던 남자는 갑자기 웃음을 흘리다, 이내 뚝 하니 웃음을 그쳤다. 그러곤 곧 번뜩이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너희 둘 다 오늘 죽었어, 라고 말하는 사나운 남자의 시선에 수현은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자신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현규 형이 말한 그 이상 시스템이 정확히 통한 듯했다. 특히나 대표님은 우성 알파니 더 강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우성 알파는 더 민감하니까.

일단, 이론적으로는…….

“그간은 눈치 없이 일만 하는 곰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여우였네. 사기를 친 것도 모자라 그 꼴을 하고, 내 아들하고 같이 들어오다니. 보기보다 아주 간이 커, 이 대리.”

단순하게 생긴 게 제법 머리가 돌아간다며 빈정거리는 남자의 음성과 말투에 수현은 이번에도 그냥 모르는 척 오늘의 메뉴 선정에 들어갔다.

그사이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길게 숨을 몰아쉰 남자가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앉으며 앞에 앉은 두 사람에게 휴대폰을 흔들어 보인다.

“아주 제대로 사고를 쳐 놨어, 둘이. 우리 회사 게시판도 아니라 블라인드에서 이 난리라니……. 유명해져서 좋겠어.”

이를 악문 채 비웃는 남자의 얼굴에 현규 역시 등받이에 기대며 느긋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알려질 일인데 쉬쉬해 봐야 꼴만 우스워지니까요. 뭐든 당당한 게 좋죠.”

“과시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 믿어 주지, 이쯤 되면 너무 티가 나 믿을 수가 없다고, 아들.”

사기를 치려면 제대로 쳐야지, 라는 남자의 말에도 현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제가 제 것에 대한 소유욕이 대단해서요. 사실, 이것도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일관성 있게 뻔뻔한 현규의 반응에 남자가 이것들이 어딜 감히 약을 팔아, 라는 얼굴로 묻는다.

“그러니까, 어제 오전까지만 해도 서로 인사도 안 하던 녀석들이 저녁에 갑자기 사랑에 빠졌다고?”

그걸 나한테 믿으라는 거냐는 남자의 다그침에 현규가 잘못된 부분을 짚어 준다.

“그럴 리가요. 어제 갑자기가 아니라 이 녀석이 고등학생 때부터 절 짝사랑하다 지난주에 귀국했을 때 고백해서 사귀기로 한 겁니다.”

우리가 약을 파는 건 맞지만 안 사면 어쩔 건데, 라는 현규의 설명에 남자가 개소리하지 말라는 투로 되묻는다.

“지난주에?”

지난주에 시스템개발팀은 죽어 가고 있었는데, 라는 의미가 담긴 남자의 반문에 현규가 담담히 대꾸한다.

“당시에는 이 녀석이 너무 바빠서 전화로만 연락하다 어제 일이 끝난 뒤에 만나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기로 한 거죠.”

어차피 집안끼리도 서로 다 아는 사이에 나이도 나이니 어른스러운 교제를 하기로 했다는 현규의 그럴듯한 주장에 남자의 시선이 현규를 지나 그 옆의 수현에게로 향한다.

“……내 아들이 이렇다는데 이 대리 입장은?”

“형과 같습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그렇다는 수현의 답에 남자가 더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내지른다.

“이것들이 어디서 사기를 쳐? 한국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연애라고? 그것도 네 성질에 오메가랑?”

“저도 슬슬 결혼할 때가 됐으니까요. 안 한다고 해도 어차피 집안에서 강제로 짝짓기를 해 줄 텐데…… 어차피 결혼해야 한다면 제가 원하는 상대와 하는 쪽이 좋을 것 같아서요.”

이 정도면 딱 좋은 상대 아니냐고 현규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그제야 이 사달이 난 이유를 깨달은 듯 남자가 아차 한 얼굴을 한다.

“어쩐지…… 오메가와는 겸상도 안 한다는 녀석이 뜬금없이 모자란 녀석과 스캔들을 일으켰다 했더니 역시, 그것 때문이었군. 대체 어디서 샌 거지? 네 약혼은 극비리에 진행 중이었는데?”

극비리에 진행 중인 일의 협력자들은 좀 신중히 고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밀려왔지만 수현은 필사적으로 참아 냈다.

대표님도 그다지 성격이 신중하지는 못한 걸로 아는데 그런 사람이 다혈질에 흥분하면 사방 10미터 내에서 청취 가능하게 통화를 하는 사람들과 일을 한다는 건 극비는커녕, 제발 좀 알아달라고 외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마, 그 일을 도모한 세 영감탱이만 모르고 있을 거다, 이미 소문 다 났다는 걸.

“저런, 제 약혼을 진행 중이셨다니…… 곤란하시겠네요. 그래도 다행히 약혼 발표 전에 먼저 스캔들이 터졌으니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없겠네요.”

상대 입장에서는 사기당한 기분이겠지만, 이라고 현규가 모른 척 대꾸하자 남자가 쾅 하고 테이블을 내리친다.

“웃기지 마! 약혼 소식 듣고 급조한 관계인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애초에 너희 둘은 성격상 사귈 수가 없어!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그건 아버지 의견이시고요. 어쨌든 블라인드에 글이 떴으니 곧 이런저런 커뮤니티에 퍼질 거고 인터넷 신문들도 가만있지 않겠죠. 마케팅팀에서 손을 쓰긴 하겠지만…… 사람들이 흥미 있어 할 소재니 아무리 막아도 SNS에서 빠르게 퍼져 나갈 겁니다. 그런 이유로 앞으로 저랑 약혼하겠다고 나서는 집안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내가 블라인드 글을 처리하지 않았고, 일부러 인터넷 신문사에 그 블라인드 글이 모두 사실이라고 확인까지 시켜 줬다며 현규가 싱긋 웃자 남자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하게 질린다. 그러곤 곧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테이블을 내리친다.

“이 자식,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슬슬 여기저기 기사가 뜰 겁니다. 곧 결혼 발표도 있을 거라고 말을 흘려 놨으니까요.”

“웃기지 마! 뒤통수 맞은 건 둘째 치고 내가 미쳤다고 이정현이랑 사돈을 맺어? 그것도 이렇게 덜떨어진 반편이 모지리랑 너를 결혼시키겠냐?”

갑작스러운 나온 아버지의 이름에 수현은 움찔하며 남자를 바라봤다. 방금 머릿속에서 아구찜에 시래기를 넣었는데 갑자기 아버지 이름이 나오다니 이건 또 뭔가 싶어 수현이 남자를 바라보자 수현과 눈이 마주친 남자가 재빨리 시선을 돌린다. 수현을 보기도 싫다는 얼굴이었다.

“하여간! 절대 이 녀석이랑은 안 돼! 당장 전부 오보라고 정정 기사 내! 넌 무조건 주영이랑 약혼해야 돼!”

“……상대가 서주영이었나 보군요.”

“어디서 모른 척이야?”

“처음 듣습니다. 어쨌든 그건 제 알 바 아니니 알아서 하시고, 저희가 일일이 부모님 허락을 받을 나이도 아니니 더 이상의 간섭은 사양하겠습니다. 그럼, 아직 근무 시간이라 가 보겠습니다.”

일방적으로 말을 끝낸 현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남자가 버럭 노성을 내지른다.

“가긴 어딜 가? 얘기 끝내고 가야지!”

“제 얘기는 끝났습니다. 이수현.”

이제 일어나라는 듯 현규가 수현에게 고갯짓을 하자 그제야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남자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또다시 새우장을 할까 말까, 하는 상황에서 인사를 마친 수현이 곧장 현규를 따라 문으로 향하자 남자가 경고하듯 소리를 내지른다.

“너희들! 내가 이대로 당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반드시 너희를 떼어 놓고 말 테니 각오해!”

분을 이기지 못해 남자는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지만 현규와 수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러곤 곧 비서실을 가로질러 나간 뒤 복도로 나서자 바로 수현이 현규의 옷자락을 잡아끈다.

그 힘에 현규가 왜 그러냐는 듯 내려다보자 수현이 손가락으로 비상계단 쪽을 가리킨다.

나가서 얘기 좀 하자는 의미였다.

그 말을 알아들은 현규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뒤 먼저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 바로 그 뒤를 따라 비상계단으로 나선 수현은 혹시 모를 불청객을 찾아 계단 위아래를 살폈다. 그러길 몇 초, 인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한 수현이 작게 현규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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