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기사 떠요?”
호기심과 걱정이 뒤섞인 그 물음에 현규가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한다.
“곧 뜨겠지. 굳이 막지는 않았으니까.”
“……그럼, 우리 가족들도 곧 알겠네요?”
“그렇겠지. 그 전에 알 수도 있고.”
그쪽도 어쨌든 모니터링을 하고 있을 테고, 그게 아니라도 블라인드에서 그 정도로 적나라하게 신상이 까졌으면 어디서든 소식이 들어갔을 테니, 라고 현규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현이 귀찮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다.
“아, 휴대폰을 끌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착신 거부를 할 수도 없고…….”
휴대폰으로 연락이 안 되면 회사로 전화할 거고 그것도 안 받으면 직접 회사나 집으로 찾아올 사람들이니 사실 수신 거부도 별 의미가 없다.그렇다고 일일이 연락을 받자니 머리가 빠질 것 같다.
하루에 다섯 번 이상 화를 내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 아버지와 하루에 전화 100통쯤은 가볍게 걸 수 있는 스토커 기질이 농후한 큰형, 그리고 입만 열면 온갖 비난과 협박과 인신공격을 일삼는 성격 파탄자 둘째 형이 합동 공격을 가하면 아무리 무던한 자신이라도 견디기 힘들다.
어차피 일도 끝났는데 휴가 내고 해외로 튈까 고민하는데 형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
“착신 거부는 왜?”
“형들 잔소리 귀찮아서요.”
상상만 해도 질린다며 수현이 몸서리를 치는 모습에 현규 역시 대충 상상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수현의 둘째 형과는 친구고 큰형과도 유학 시절에 같은 대학에 다녀 그 둘이 어떻게 나올지 모를 수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수현은 형들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 사랑의 표현 중에 괴롭힘의 비율이 90%라 문제지.
“연락은 받아. 어차피 거쳐 가야 하는 문제니.”
그러라고 일을 키운 거니 귀찮아도 참으라는 현규의 조언에 수현이 귀찮다며 삐죽이다 결국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받을게요.”
“더 할 말은?”
“일단은, 없어요.”
“그럼, 가지.”
다음 일정이 있는지 조금 서두르는 현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수현은 다시 비상계단을 나와 곧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다른 층과 비교해 유독 고요한 복도를 지나가며 수현은 조금 작은 목소리로 현규에게 물었다.
“새우장 좋아하세요?”
“……새우장?”
“오랜만에 해 볼까 해서요. 손은 많이 가는데 가을이라 먹고 싶어서요.”
“……새우장을 한다고? 네가?”
의심 가득한 현규의 눈빛에 막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수현이 하향 버튼을 누르며 억울해하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린다.
“전복장도 하고 게장도 하고 장은 다 잘해요.”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딱히 아실 필요 없으시니까요. 할까요?”
여전히 불신으로 가득 찬 현규의 눈빛에 수현이 어깨를 으쓱한 순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어차피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지만 혹시나 해서 의견을 구하며 수현은 열리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19층과 23층 버튼을 누르자 수현의 옆에 다가선 현규가 문을 바라보며 은근한 투로 말을 건넨다.
“그럼, 퇴근하고 같이 쇼핑할까?”
“……같이요?”
“같이 장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말로 동거의 묘미니까.”
여봐란듯이 같이 퇴근해 같이 장을 봐 돌아가자는 현규의 제안에 수현이 슬쩍 현규를 올려다본다.
“동거 많이 해 보셨나 봐요?”
경험담 같은데, 라며 수현이 빤히 현규의 옆얼굴을 바라보자 현규가 한순간 인상을 확 찌푸린다.
“누가 그래?”
다소 신경질적일 정도로 과한 현규의 반응에 수현은 당황해 눈을 껌뻑였다.
“너무 쉽게 동거하자고 하시길래 많이 해 보신 줄 알았죠.”
“너는 왜 그렇게 쉽게 받아들였는데?”
형이 무서워서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그 말을 하면 현규가 더 화낼 것 같아 현명하게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필요하니까요.”
“나도 필요해서 한 거야.”
사람 다 거기서 거기라며 다시 시선을 돌린 현규가 여전히 기분이 안 좋은지 작게 혀를 차는 모습에 그의 눈치를 보던 수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오늘 같이 퇴근하는 거예요?”
그 말에 대번에 여태 뭐 들었냐는 의미가 담긴 시선이 날아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근처는 오피스촌이라 마트가 없어요. 여기서 두 정거장 정도 가야 큰 마트가 있는데 차 가져가야 할 거예요. 냉장고도 많이 비어서.”
“그럼, 거기로 가.”
“운전은 제가 할까요?”
“네가 길을 아니까.”
“그럼, 집에 가서 짐 두고 제 차로…….”
조금 전 일은 완전히 잊은 채 아주 평화롭게 오후 계획을 짜던 중 갑자기 휴대폰 진동이 울려왔다.
그냥 언제나 울리는 진동일 뿐인데 오늘따라 그 진동이 유독 요란하게 느껴졌다. 마치 발작하듯 요동을 치는 휴대폰에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건 절대 받으면 안 되는 전화라고 자신의 육감이 말하고 있었다.
“전화.”
안 받을 거냐는 현규 형의 채근에 손안에서 용트림을 하고 있는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보자 역시나 예상했던 그 이름이 반짝이고 있다.
“젠장.”
“왜?”
“큰형이에요.”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데 옆에 선 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받아.”
이 전화를 받으면 최소 1시간은 시달릴 게 뻔해 진짜 죽어도 받기 싫었지만 어차피 거쳐 가야 하는 관문이었다.
매도 빨리 맞는 편이 낫다고 하니 그냥 빨리 얻어터지는 쪽을 택한 수현은 도를 닦는 마음으로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터져 나갈 듯한 고함이 쏟아져 나왔다.
* * *
초가을의 날씨는 더없이 청명했다.
유난히도 하늘이 높고 푸른 오전, 보송보송한 햇볕 아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수현은 헤드셋을 낀 채 태블릿으로 12월 24일의 식단을 짜고 있었다.
보통 크리스마스이브는 삼촌이나 형들과 보내는 탓에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나는 게 보통이라 늘 안주 위주로 식단을 짜는 편이다. 올해는 삼촌이 빠질 거라 좀 달라질 수 있지만 그래도 술이 메인인 건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안주는…….
“……바지락 술찜.”
위스키는 너무 세니까 역시 소주와 그에 어울리는 안주가 좋지 않을까 고민하는데 벼락같은 고함이 울려왔다.
- 이 자식, 너 내 말 안 듣고 있지?
수화부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노성에 퍼뜩 정신을 차린 수현은 그제야 자신이 큰형과 통화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몇 마디 뒤로는 돌림 노래일 게 뻔해 볼륨을 작게 하고 식단을 짜다 보니 어느새 12월 식단을 짜고 있었다.
- 이런 대형 사고를 쳐 놓고 딴생각을 해? 너, 당장 집에 와! 와서 얘기해!
“나, 아직 근무 중이야.”
급한 일은 대충 마무리된 상태라 옥상에 올라와 느긋하게 광합성을 하며 식단을 짜는 중이지만 일단 회사에 있으니 그렇게 얼버무리자 형이 또 한 번 버럭 노성을 내뱉는다.
- 이 상황에 근무가 문제야?
“근무가 문제지. 그러고 보니 형 일 안 해?”
혹시나 해 휴대폰으로 통화 시간을 확인하니 1시간 10분이 넘었다.
1시간 넘게 저렇게 소리를 고래고래 내지르는 것도 대단하지만 사무실에서 저러고 있다는 건 더 대단했다.
- 말 돌리지 마! 현규랑 너 둘이 어젯밤에 대체 무슨 작당 모의를 한 거야? 이건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들어 주는 척이라도 하지. 갑자기 사귀기로 한 것도 어이없는데 동거? 사기를 치려면 좀 믿을 만한 사기를 쳐! 우리가 호구로 보여?
두 눈 뜨고 코 베이는 것도 화나는데, 이렇게 무시당하는 건 더 열받는다고, 흡사 거위처럼 꽥꽥거리는 형의 고함에 역시나,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예상한 대로 현규 형과 자신이 사귄다는 건 아무도 믿지 않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조금 했는데 이 순간 의심이 확신이 되었다.
이래도 되는 게 아니라 이래야 했다.
이 정도로 센세이셔널하고 적나라한 방법이 아니었다면, 현규 형과 사귄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고 그대로 결혼을 진행했을 거다.
“작당 모의라니.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현규 형 짝사랑했다니까.”
- 어제 오후에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애인 없다던 녀석이 오늘 아침에 갑자기 동거 중이라니 그걸 누가 믿냐고?
“뭐…… 그건 이해해.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으니까.”
인생은 진짜 알 수 없다고 헛소리를 하자 형이 부득부득 이를 간다.
- 웃기지 마. 너희 둘이 어제 결혼 얘기 듣고 작당한 거 다 알아. 이렇게 하면 파혼이라도 할 줄 아나 본데, 세상이 그렇게 만만해 보여?
“안 하면 어쩔 건데?”
- 이수현!
“이미 블라인드 글 여기저기 퍼져서 사방에 소문 다 났고 조금 더 있으면 기사도 뜰 텐데, 이 상황에서 나랑 삼촌 결혼한다고 하면 꼴만 더 우스워져. 삼촌이 주영이랑 사귀는 것도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여기서 더 문제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결혼식은 취소하고 다시 주영이랑 결혼 추진해. 그쪽도 어차피 약혼 깨질 테니.”
- 야,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 같아? 그래, 너랑 삼촌 결혼은 취소한다 쳐. 너랑 삼촌 관계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데 여기서 결혼 추진하면 삼촌 얼굴에 침 뱉기니 전면 무효화하겠지만 그쪽은 쉽게 파혼이 될 것 같아? 그쪽 집은 우리랑은 달라. 그쪽 약혼도 여기랑은 완전 다른 문제고.
우린 너희를 위해 한 거지만 그쪽은 애들 사정에는 조금도 관심 없다는 큰형의 주장에 80% 정도는 동의했다.
정확히는 형과 아버지의 자존심을 위해서 진행한 결혼이지만 어쨌든 1% 정도는 날 걱정하고 79% 정도는 삼촌이 상처받을 걸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발상일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계산이 먼저인 약혼이라도 실시간으로 동거 상황 생중계하는 사람하고 결혼 진행할 집은 없을 것 같은데?”
집안 체면이 있는데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중얼거리며 바지락 술찜 아래 해물파전과 육전을 추가했다. 그런데 현규 형이 이런 거 좋아할까, 해외에서 오래 살아서 오히려 더 좋아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질색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양식을 좀 넣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형이 네가 이래서 안 된다는 듯 혀를 찬다.
- 너 그 회사 다니면서 아직도 강 대표님을 그렇게 모르냐? 그 집에서 우리 집처럼 스캔들 신경 쓰겠냐고? 그리고 현규 정도면 최고급 종마야. 너랑 동거한다 해도 아무도 신경 안 써. 심지어 두 집 살림을 한다 해도 아무도 신경 안 쓸걸.
“……두 집 살림을 신경 안 쓴다고?”
- 잘 숨기기만 하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