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60)

물론 이 경우는 너무 오픈돼서 조금 눈치는 보겠지만 오히려 이때가 기회라고 달려드는 집안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게 형의 주장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까지는 서주영으로 약혼자가 픽스된 상태였지만 이젠 주영이네 집 반응에 따라 현규 형이 경매에 올라갈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거다.

“……그럼 주영이네 약혼은 안 깨질 수도 있다는 거야?”

- 말이라고 해? 강 대표님은 잔머리만 굴리지, 서 대표님은 더 계산적이고 교활한 사람이야. 그 두 집안에서 갑자기 결혼 이야기 진행된 걸로 봐서는 강 대표님하고 서 대표님 사이에 뭔가 있었던 건데, 그걸 그렇게 쉽게 포기할 것 같아? 조건으로 보나 뭘로 보나 어떻게 봐도 주영이네 쪽에서는 삼촌보다는 현균데?

확실히 집안으로 보나 개인적으로 보나 그렇기는 한데…… 그렇게 듣고 보니, 뭔가 이상하게 찝찝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뭔가 당한 기분이었다. 아니, 뭔가에 낚인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기당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에, 그래도 설마설마하며 태블릿 화면을 손으로 두드리는 사이 형이 대뜸 말을 돌린다.

- 하여간 너, 일단 오늘은 집으로 퇴근해. 와서 얘기해.

“드디어 미팅 시간 됐나 보지?”

슬슬 대화를 끊으려는 기색에 시각을 확인하니 11시 30분이다. 짧은 미팅이 있을 법한 시간이다.

“나 오후에는 일 있는데 그냥 점심때 보지? 점심때 삼촌 만나기로 했는데.”

- ……삼촌 만나기로 했어?

“응. 내가 그쪽으로 갈 거야.”

현규 형도 같이지만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겨우 다 화내고 안정됐는데 그 말 하면 영원의 도돌이표가 시작된다.

- ……그럼, 연희로 와. 룸 예약해 둘 테니까.

“알았어. 아, 아빠한테는 말하지 마.”

- 왜?

“아빠한테 잡히면 퇴근 못 해, 우리.”

아빠 오면 오늘 밤에 식당 문 닫는 시간까지 잔소리 들어야 한다고 아직도 아빠를 모르냐고 하자 큰형도 그건 싫은지 질색한다.

- 나랑 삼촌만 나갈게.

“응.”

- 1시 예약이야.

“알았어.”

남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신 뒤 쓰레기통에 넣고는 휴대폰을 확인하는데 알림난이 난장판이다.

중고 친구들 단체 채팅방뿐 아니라 전화 개인 메시지, 그리고 가족들의 부재중 통화 수가 장난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신기한 건 회사 직원들에게서의 연락은 제로라는 사실이었다. 그 난리가 났는데 팀 단체 채팅방도 고요하다.

오전의 관심도로 봐서는 채팅창이 불타다 못해 터지고 있어야 정상인데 이 정도로 조용하다는 건 다들 차마 자신에게만 말을 걸지 못하고 있는 거다. 직접 물어보기에는 너무 민망한 소재가 섞여 있으니까.

“소문이 다 퍼지긴 했네…….”

친구들이 이 정도로 연락을 해 오는 거면 알 만한 사람은 이제 다 안다는 거다.

다행히 아버지는 오전에 다른 일정이 있으시다니 아직은 모르시는 것 같고, 큰형은 통화했고, 삼촌은 조용하다. 아마 점심때 만나기로 했으니 만나서 얘기하려는 것 같다.

그리고 둘째 형은…….

“대박…….”

현규 형과의 스캔들에 제일 화가 났을 둘째 형이 조용할 리 없다 했더니 역시나 큰형과 통화 중 10건의 메시지와 6건의 부재중 통화가 와 있었다. 큰형과 비교하면 몇 건 안 되는 것 같지만 이 정도면 둘째 형 인생에서 최고의 끈기와 성실함을 보인 거다.

그리고 그렇다는 건 즉 눈알이 돌아갔다는 의미다.

“……귀찮은데…….”

큰형은 일단 화가 나면 흥분해 남의 말을 전혀 안 듣고 무조건 전진 전진만 하는 타입이지만, 그 흥분이 식고 냉정을 되찾으면 지극히도 합리적이고 냉정한 사람이다. 그래서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사흘 정도만 안 보면 해결이 되는데 둘째 형은 아니다.

평소에도 자기 말만 하고 남의 말을 안 들어 꼰대의 벽이라고 부르는데 오늘의 특수 상황을 떠올려 보자면 지금은 벽 정도가 아니라 성 수준일 거다.

아마 전화를 하는 즉시 자기 말만 3시간은 떠들어 댈 텐데…….

둘째 형 연락은 그냥 씹어 버릴까 하는데 여지없이 벨이 울리며 화면 위로 ‘철벽’이라는 이름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순간 그냥 휴대폰을 화장실 변기에 처넣어 버릴까, 고민했지만 오늘은 연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이어셋을 귀에서 빼 거리를 두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 야, 이 모지리 새끼야! 네가 아주 돌았지? 나가 살더니 이젠 아주 다 지 마음대로야! 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거야?

휴대폰 볼륨을 내려 놓고 이어셋을 멀리 뒀는데도 쩌렁쩌렁하게 울려오는 고함에 새삼 둘째 형의 목청에 감탄했다.

진짜 귀에서 피날 것 같다.

-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유분수지! 마주쳐도 인사도 제대로 안 하는 데면데면한 놈들이 동거? 말 같은 소리를 좀 해라. 너 현규한테 수술당하는 거야! 그건 알고 있어?

여전히 자신의 손안에서 개미 소리처럼 울려 대는 소리에 수현은 ‘바로 그거다!’라고 생각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낚였다, 당했다, 사기당했다, 라는 애매한 표현만 떠올랐는데 큰형과 통화하면서 느꼈던 그 기분은 정확히 나도 모르게 수술당했다, 라는 느낌이었다.

아니, 분명히 약만 먹어도 되는데 얼결에 네, 네, 네, 하다가 반항 한 번 못 하고 수술당한 딱 그 느낌이다.

그래, 그거다, 바로.

- 현규가 뭐라고 하면서 널 꼬신 건지 몰라도 그 자식 자기가 급하니까 그냥 옆에 있는 너한테 작업 건 거야! 주영이랑 약혼도 약혼인데 백해경이 돌아와 들이대니까 그 새끼 피하려고 그러는 거라고!

“……백해경이 누군데?”

- 아, 있어, 그런 새끼! 하여간! 주영이는 그럭저럭 참을 만한데 백해경은 극혐하는 놈이라 걔랑 엮이기 싫어서 멍청하고 순진한 너 꼬신 거야. 이 반편이 새끼야!

둘째 형의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현규 형에게 낚였다는 가설이 점점 힘을 얻기 시작했다.

어제는 너무 피곤한 데다 자신 쪽도 급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현규 형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라는 걸 알 수 있었을 거다.

심지어 현규 형은 그 사실을 고지받지도 못한 상태였으니까…….

아무래도, 자신이 당한 것 같다.

그래, 당했다.

하지만 어제 그 사실을 알았다면 안 당했을 거냐, 라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현규 형 역시 급하다는 걸 알았어도 자신은 결국 당했을 거다.

자신은 어설프게 딜 같은 건 못 하니 그냥 양쪽 다 급하니 어떻게든 하자고 형에게 넘어갔을 거다.

그러니까 이번 일은 쌍방과실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뭐, 어쨌든 우리 사귀고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 그러니까! 그 새끼가 뭐가 부족해서 너 같은 반편이 모지리 새끼랑 사귀겠냐고? 너 그 자식한테 사기당한 거라니까?

답답하다는 듯 발을 구르는 듯한 지수의 반응에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수현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고민하다 비로소 중요한 사실을 눈치챘다.

지수는 현규와 수현이 사귄다는 걸 믿고 있었다. 정확히는 현규가 방패로 쓰려고 수현을 꼬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 순간 수현은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예상보다, 그의 둘째 형은 바보였다.

당연히 너희 둘이 아무리 짜고 사기 쳐 봐야 우리가 당할 것 같냐고 할 줄 알았는데 그 말을 믿는다는 사실에서 수현은 너무 당황해 입만 뻥긋거렸다. 솔직히 자신의 주변 사람 중 진짜 믿는 사람이 나올 줄 몰랐다.

그 순간 아버지한테 둘째 형한테 재산 증여하는 건 좀 미루라고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사기당할 정도면 일주일 안에 전 재산을 말아먹을 수 있다.

- 하여간, 당장 현규한테 헤어지자고 해. 동거는 무슨 동거야? 너 백해경만 해결되면 곧장 현규한테 버림받아! 그 새끼는 그런 새끼라고! 너 그 새끼한테 농락당하는 거야. 사방팔방에 동거한다고 생중계하다 차여 봐. 현규야 너랑 헤어져도 전혀 문제없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하자품인데 너 그런 소문까지 나면 결혼 못 해!

그건 뭐 더없이 바라던 바이기는 하지만…….

“형, 그 말 현규 형한테 그대로 전해도 돼?”

약간 심술궂게 나간 그 말에 형이 침묵한다. 그건 안 된다는 소리다.

이제 슬슬 둘째 형도 고함은 다 지른 것 같아 다시 귀에 이어셋을 끼웠다.

“이제 형도 그만 일이나 해. 안 바빠? 우리 회사 요즘 일 없어?”

곧 망하는 거냐고 약간 농담을 섞어 말을 건네자 둘째 형의 목소리가 다시 커진다.

- 내가 지금 왜 일을 못 하는데? 아침부터 친구들 메시지 받고 통화하느라 일을 할 수가 없다고!

“잘됐네.”

어차피 일하기 싫어하는데 신났겠네, 라고 받아치며 자리에서 일어서 계단 쪽으로 향했다.

근무 시간이라 텅 빈 옥상을 가로질러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둘째 형이 버럭 고함을 지른다.

-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너 오늘 집으로 퇴근해!

“아, 나 호출 왔다. 일하러 들어갈게.”

- 야, 이 상황에 일이 중요해?

“응. 먹고살아야 하니까.”

- 먹고는 살게 해 줄 테니 너 당장 그 회사 관둬. 애초에 내가 너 그 회사로 이직할 때부터 기분이 안 좋았어. 현규랑 헤어지고 회사 관두고 본가로 돌아와. 어딜 형들도 안 한 동거를 해?

“그건 내 자유고. 나 진짜 일하러 가야 돼. 나중에 봐.”

적당히 끊을 때가 됐다 싶어 서둘러 통화를 끊은 뒤 아예 소리를 무음으로 해 놓고 사무실로 내려갔다.

파란만장한 오전이 그렇게 슬슬 마무리되고 있었다.

* * *

사무실 안은 고요했다. 사실 어제도 고요했지만 어제까지는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라도 울려 댔는데 오늘은 그 소리도 없다.

휴대폰만 든 채 여기저기 메시지를 보내고 받느라 다들 손만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끔 이쪽을 힐끔거리는 시선에 수현은 모른 척 밀린 서류 정리했다.

다들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팀 분위기상 차마 그런 걸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유일하게 그게 가능한 사람이 팀장님인데, 팀장님은 팀장 회의에 참석하러 갔다고 하니 아마 오늘 오전 내로 풀려나긴 힘들 거다.

일은 다 마무리됐고 다음 주부터는 적용에 들어가니 문의 들어올 걸 감안하고 오늘 서류 작업 다 해 놓고 내일은 FAQ 정리를 해놔야 하나 고민하는데 휴대폰이 울려왔다.

[내려가.]

현규 형이다.

그 메시지에 시각을 확인하니 벌써 1시다. 슬슬 나가 봐야 한다.

“저 점심 먹으러 갑니다.”

차를 가져가야 하니 서둘러야 할 것 같아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이쪽을 힐끔거리던 직원들이 고개를 빼고 바라본다. 그러곤 슬금슬금 모여드는 꼴에 막 사무실 문을 여는데 형이 바로 문 앞에 서 있다.

“어? 빨리 오셨네요?”

“마침 일이 빨리 마무리돼서.”

“오늘 팀장 회의 있다고 하던데…….”

우리 팀장님은 어디에, 라고 중얼거리자 현규 형이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쓴다.

“아까 미팅, 팀장 회의 아니었어요?”

“……팀 미팅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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