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60)

“저런…….”

이 인간들이 없는 미팅까지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왕따당하고 있는 현규 형에게 측은함이 들었다. 그래서 안쓰럽다는 듯 형을 바라보자 형이 그 시선이 못마땅한 듯 인상을 쓴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표정이 아주 불손한데…….”

“……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 차로 가실 거죠?”

“그래.”

이제 그만 가자고 서둘러 형과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점심시간이라 모여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우리가 나타나자 뚝 하니 대화를 멈춘다.

마치 음소거 버튼을 누른 듯 일시에 고요해진 복도에 이쪽도 떠들면 안 될 것 같아 입을 딱 다물었다. 하지만 형은 주변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차는?”

“어…… 오피스텔 지하에 있어요. 그러고 보니 형 차는요?”

어젯밤에 현규 형의 차를 탄 것 같아 그렇게 묻자 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오피스텔 주차장에.”

“그럼 오늘 주차 등록도 해야겠네요.”

안 하면 주차 요금 엄청 나올 테니까.

관리실에 전화해두려 번호를 찾는 사이 막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이 가득 찬 엘리베이터에 밀리듯 올라타 자리를 잡는데 역시나 엘리베이터 안도 너무 조용하다.

물론 이게 당연한 거긴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무거운 침묵과 함께 이쪽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에 어떤 깨달음이 느껴졌다.

셀럽은 참 피곤하게 사는구나, 하고.

역시 인생은 있는 듯 없는 듯, 다수 안에 묻혀 존재감 없이 사는 게 최고라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이 어느새 만원이 된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춰 선다.

순간 열린 엘리베이터 문밖으로 우르르 내려서는 사람들에 떠밀려 몸이 휘청거렸다. 다행히 많이 밀린 건 아니라 서둘러 균형을 잡으려는데 형이 자연스럽게 허리를 끌어안아 몸을 지탱해 준다.

그 힘에 놀라 흠칫하자 형이 아주 싱긋 웃는다.

“조심해야지.”

다정한 형의 목소리와 함께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주 불편하고 억지로 웃으며 장단을 맞췄다.

벌써 휴대폰을 들고 빠르게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보이는 걸로 봐서는 효과가 아주 좋았다.

“조심할게요.”

“그래.”

그러니 이제 좀 놔달라고 형을 바라보자 형이 허리를 놓으며 자연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넌 진짜 손 많이 가.”

슬쩍 지나가는 그 행동에 조금 심장이 두근했다.

와, 이런 게 설렘이라는 건가 하는 생각에 엘리베이터를 나가 홀을 가로지르며 형의 재킷을 슬쩍 잡아당겼다. 그러곤 형의 귓가에 대곤 아주 작게 속삭였다.

“형, 저 방금 진짜 두근거렸어요.”

날 두근거리게 한 건 형이 처음이라고 칭찬하자 막 건물 밖으로 한 걸음 내딛던 형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본다.

“……왜요?”

“……그걸 말로 하는 시점에서 넌 이미 글렀어.”

“뭐가요?”

“……아무것도 아냐. 운전은 네가 할 거지?”

“네.”

회사 건물을 나와 바로 옆 건물로 향하는데 새삼 너무 가까운 거리에 형이 헛웃음을 흘린다.

“진짜, 너무 가까운데. 이건 출퇴근한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야.”

“전에 다니던 회사가 하도 퇴근을 안 시켜 줘서 이직하면서 가까운 집을 찾는데 마침 옆 건물이 주거형 오피스텔이더라고요. 그래서 재빨리 계약했죠. 사실 윤 팀장님 따라온 거라 당연히 퇴근 안 시켜 줄 줄 알았거든요.”

1·2층은 상가, 3층부터 8층까지는 사무실, 9층부터 26층까지는 주거형 오피스텔이라 딱 좋았다. 그래서 보자마자 곧장 계약했는데 그게 진짜 신의 한 수였다.

“퇴근 못 할 걸 알면서 왜 따라왔는데?”

“그래야 독립을 하죠.”

“그래도 용케 허락받았네. 지수 성격에 절대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사실 허락받고 나온 건 아니에요.”

그 말에 얼마 걷지 않아 건물 안으로 들어선 형이 무슨 소리냐고 바라보는 시선에 솔직하게 과정을 설명해 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이 회사로 온다고 하면 아버지가 반대할 게 뻔해서 이직하는 거 비밀로 하고 집 다 구해 놓은 뒤에, 이직했는데 퇴근을 안 시켜 주니 나가 살겠다고 통보해 버렸죠.”

그것도 전화로, 라고 솔직히 말하자 형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는다.

“그래도 안 끌려갔다고?”

“그날 큰형한테 문자랑 부재중 전화 100통 받고 아버지한테 이틀 잡혀 잔소리 듣고 둘째 형 욕은 뭐…… 전화 왔길래 볼륨 줄여서 멀리 두고 안 들어 버렸거든요.”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줄줄이 과거를 읊자 형이 조용히 이쪽을 내려다본다. 네 과거 행실이 안 좋았다는 게 이런 의미였냐, 라는 그 시선에 모르는 척 지하 2층 버튼을 누르자 형이 한숨을 내쉰다.

“왜요?”

“앞으로 좀 골치 아프겠다 싶어서.”

“……왜요?”

물음과 동시에 지하 2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훅 하니 끼쳐 오는 주차장의 열기에 숨을 몰아쉬며 오래 방치해 둔 차로 다가서 문을 열자 형이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올라탄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가는 시간이 있으니 서둘러야 할 것 같아 서둘러 시동을 거는데, 차창이 뿌옇다.

“너, 차를 얼마나 세워 둔 거야?”

“……어…… 대충 한 달 정도요……?”

아마 그럴 거라고 하며 서둘러 시동을 걸고 와이퍼를 움직이는데 형이 뭔가 떠올랐는지 막 기어를 바꾸려는 손목을 잡는다.

“잠깐.”

“왜요?”

“가기 전에 이것부터 껴.”

뭘, 이라는 생각에 형을 돌아보자 형이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열어 보인 순간 헉하며 숨을 멈췄다.

그건, 누가 봐도 명백한 웨딩 밴드였다. 웨딩 밴드와 링으로 유명해진 주얼리 브랜드의,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쳐 누가 봐도 웨딩 밴드라고 알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반지는 언제 사셨어요?”

“친구에게 부탁해 준비한 거야. 급하게 준비해야 해서 제일 대중적인 브랜드에서 매장에 있는 반지로 가져오라고 했어. 사이즈를 몰라서 가장 많이 팔리는 남자의 약지 사이즈에 맞춰서 가져오라고 했으니 안 맞아도 일단 껴 넣어.”

내 건 맞췄으니까, 라며 왼손을 들어 보인 형의 약지에는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껴 있었다.

굉장히 심플하지만 너무나 ‘나 커플링이에요!’라고 주장하는 디자인의 반지에 수현은 당혹감을 느꼈다. 현규의 추진력도 무섭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이 정도로 티 내면 오히려 역효과이지 않을까요?”

이건 좀 너무 급하지 않냐고 수현이 걱정하자 현규가 그 말을 대번에 비웃는다.

“지난주에 고백받았을 때 주문한 반지를 오늘 받은 거지.”

말과 동시에 강제로 왼손 약지에 끼워지는 반지에 수현은 납득했다.

“아, 형은 사귀기로 하면 반지부터 주는구나…….”

그게 루틴이구나 하고 납득한 순간 반지를 끼던 형이 이마를 툭 친다.

“어떤 인간이 사귀기 시작하는데 반지를 줘?”

“그럼 왜 주시는 건데요?”

“이래야 티가 나니까.”

한 회사 안에서 일하고, 바로 옆 건물에서 동거하면서 커플링까지 하면 완벽하니까, 라는 현규의 말에 수현이 정확히 손가락에 맞는 반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결혼을 전제로 만난다고 했으니까, 사실 이상할 건 없다.

이 반지 이름이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아마 형은 이름까지는 모르고 그냥 대충 샀을 거다. 친구에게 부탁했다고 하니.

“손가락에 딱 맞아서 다행이네요.”

“평균 사이즈니까. 살짝 크긴 한데 일단 이걸로 참아. 제대로 된 반지는 천천히 맞출 거니까.”

“아니에요. 잘 맞아요. 이거면 되죠, 뭐.”

어차피 몇 달 끼지도 않을 텐데, 라고 중얼거린 수현은 출구 쪽으로 차를 몰며 도착 전에 현규가 알고 있어야 하는 정보를 알렸다.

“아, 맞다. 오늘 점심에 첫째 형도 나올 거예요. 형이 식당 예약해 놨어요.”

“진원 형?”

“네, 오전에 통화했는데 전혀 안 믿더라고요. 사기를 칠 거면 좀 믿을 만한 사기를 치라고 하길래 일단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했어요. 보면 알겠죠. 대표님도 금세 알아챘으니까.”

여전히 그 시스템은 이해 못 하겠지만 유용하기는 하다고 수현이 웃자 현규가 묘한 시선으로 수현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그래…….”

“예상대로 아무도 안 믿는 눈친데…… 신기하게 둘째 형은 믿더라고요.”

“그 녀석이 믿어?”

“네. 믿다 못해 너무 상황에 이입해서 감정 과잉 상태더라고요. 형이 나한테 사기 치는 거니까 당장 헤어지래요. 안 그러면 형한테 농락당하다 버림받을 거라고요. 제가 형한테 수술당한 거라는데요.”

지하 2층에서 두 번 코너를 돌아 막 지상으로 올라온 차 안에서 그렇게 말하자 형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한다.

“……이지수가 그래?”

“네.”

“여전히 입이 백지장이네, 이지수…….”

“그건 그래요.”

우리 형이 입이 되게 가볍다고 웃던 수현은 막 1차선으로 차선을 바꿨다. 그러곤 순간 뭔가 떠오른 듯 현규에게 묻는다.

“맞다. 그런데, 백해경이 누구예요?”

이건 애인으로서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형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얼굴을 한다.

“……이지수가 그 녀석 얘기도 해?”

“네. 형이 그 사람 때문에 마침 주변에 있는 멍청한 저랑 사귀는 거라던데, 저 조심해야 돼요?”

수현이 일신의 안부에 대해 묻자 현규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작게 중얼거린다.

“이지수 가만 안 둬.”

“그건 절대 찬성이요. 제발 가만두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고, 그 사람이 칼 들고 따라다니고 그래요?”

다시 백해경이라는 사람으로 돌아와 수현이 나도 방어 태세를 취해야 하냐고 묻자 현규가 길게 한숨을 내뱉는다.

“그럴 성격은 아냐. 주로 말로 사람 잡는 편인데…….”

거기까지 말한 현규가 문득 말을 멈춘 채 수현을 쭈욱 훑어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넌 괜찮을 거야.”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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