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안 돼도 어쩔 수 없고…….
“……몸에 이상은 전혀 없다고?”
“네.”
“그렇군…….”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요?”
“그냥. 궁금해서. 너 같은 케이스는 극히 드무니까.”
“그렇긴 하죠.”
지하 1층이라 금세 건물을 빠져나가자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반짝거리며 유독 따뜻한 볕에 창문을 연 수현은 창가에 기대 기분 좋게 웃었다.
일단 가장 큰 산인 큰형은 처리됐다. 현규 형과의 관계를 믿는지 안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정도로 큰형이 질색하고 물러섰으니, 삼촌과의 결혼은 확실히 중단될 거다.
그리고 아직 조용한 아버지의 경우는, 아마 괜찮을 거다.
삼촌과 주영이의 결혼이 주영이네 집 쪽에서 거절당한 와중에 그쪽에서 약혼을 진행 중인 현규 형과 자신이 스캔들이 났으니 오히려 기뻐하실 수도 있다. 아니, 높은 확률로 기뻐하실 거다.
스캔들이 요란하게 터진 탓에 잔소리는 좀 하시겠지만 큰형처럼 집요하게 굴지는 않을 테니 일단 삼촌과 자신의 결혼 이야기는 무마되었다고 봐도 된다.
현규 형 말대로 하루 만에 정리된 상황에 크게 만족하며 수현은 시원하게 도로를 가로질렀다.
* * *
가을과 어울리는 연한 갈색의 커튼과 새하얀 레이스 커튼, 그리고 벽 앞에 놓인 베이지색의 2인용 페브릭 소파와 유리 테이블, 마지막으로 바닥에 깔린 붉은색의 태피스트리 카펫까지.
분명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심플 이즈 더 베스트를 외치던 거실이 단풍이 든 산처럼 색색들이 아기자기한 거실로 탈바꿈해 있었다.
“예쁘네…….”
어차피 저기 앉아 있을 시간도 얼마 없지만 어쨌든 예쁘니까 좋다, 라는 무성의한 판단을 내린 수현은 곧 거실 사진을 찍어 현규에게 전송했다.
[다 옮겼어요.]
소파에 털썩 앉으며 1시간 만에 남의 집이 된 것 같은 거실을 돌아보는데 바로 답장이 도착했다.
[수고했어.]
예상보다 빠른 답에 소파에 벌러덩 누워 메시지를 보냈다.
[형 짐은 언제 와요?]
페브릭이라 그런지 포근한 느낌이 좋아 소파 위에서 뒹굴뒹굴하는 사이 답장이 도착했다.
[저녁에.]
형이 정리해야 하니 그 시간에 오는 게 맞긴 하겠다 싶어 소파 위에서 뒹굴거리다 일어나 등받이에 기대앉으며 다시 물었다.
[오늘 정시 퇴근 가능해요?]
[할 거야.]
그렇다는 건 가능하지 않아도 일단 정시에는 나오겠다는 거다. 일을 싸들고 오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그 말에 곧장 답신을 보냈다.
[1층 카페에서 기다릴게요.]
답장을 보낸 뒤 곧 자리에서 일어나 마트에서 장을 보기 전에 냉장고를 비우기 위해 냉장고 상태를 체크했다.
그나마 지지난달은 집에 와서 냉장고라도 열어 봤는데, 지난 한 달은 집에 와서 진짜 잠만 자고 나갔던 터라 뭐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뭐가 많았다. 그러니까, 유통 기한 지난 뭔가들이……,
이래서 형이 아침에 잔소리를 했구나 납득하며 냉장고 안에 있던 것들을 전부 들어내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넣자 냉장고 안이 아주 깨끗해졌다. 남은 건 계란뿐이다.
“이건 먹어도 되나?”
계란에도 유통 기한이 있지 않나 하며 산란일자를 확인하자 역시나 한 달 반이 넘었다. 유통 기한의 두 배가 지났다는 건데…….
“냉장고에 있었으니 괜찮겠지.”
아침에 먹고 안 죽었으니 괜찮은 거라는 판단에 계란은 그대로 둔 채 냉장고를 모두 비우곤 휴대폰에 장보기 목록을 적어 넣기 시작했다.
본의는 아니라곤 해도 이제 1인 가정이 아니라 2인 가정이 됐으니까 식재료들도 두 배가 필요한데…….
그 전에 형한테 생활비를 받아야 하나? 받아야 하면 얼마를 받아야 하나?
동거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서둘러 휴대폰으로 ‘동거 시 생활비는 어떻게’라고 적는데 때마침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금 통화 가능해?]
삼촌이다.
반가운 발신자명에 서둘러 메시지를 보냈다.
[응.]
답장을 보냄과 거의 동시에 벨이 울려왔다. 빠른 전화에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음식물 쓰레기통을 발로 옆으로 밀어 두곤 소파로 가며 통화를 시작하자 역시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 집이야?
“응. 집에 와서 냉장고 정리하던 중이야.”
자신의 마감 후 루틴을 잘 아는 삼촌이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된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 냉장고 또 난리 났겠네.
“응.”
삼촌이 생각하는 딱 그대로일 거라고 당당하게 말하자 삼촌이 웃는다.
- 그렇게 자랑스러워할 게 아니지.
“다 치웠어.”
- 잘했어. 그럼, 이제부터는 좀 쉴 수 있는 거야?
“응. 일단 작업은 다 마무리됐으니 이젠 CS 남았지.”
다음 주부터 내 직업은 엔지니어가 아니라 CS직원이야, 라고 선언하자 삼촌이 쓰게 웃는다. 그다음 단계도 잘 아는 탓이다.
- 고생해.
“고생해야지. 세상은 넓고 문맹은 많으니까.”
아무리 사용자 매뉴얼이나 FAQ를 정리해 줘도 아예 매뉴얼을 보지 않거나, 혹은 봐도 이해를 못 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라 시스템을 한 번 엎고 나면 아예 유치원 선생님이 된 기분으로 하나하나 설명해 줘야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 없이 부가 기능만 추가된 것뿐인데 아이콘이나 메뉴 위치를 찾지 못해 문의하는 경우도 부지기수고, 바뀐 시스템을 보면 일단 짜증부터 내며 문의부터 하고 보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그보다 최악은 매뉴얼을 다 읽어도 그 의미를 숙지하지 못해 하나하나 다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게 된다.
‘나는 인간이 아니라 AI다.’라고.
-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너 독립한다고 했을 때 혼자 어떻게 살려나 걱정했는데.
“내가 장담하는데 그 집에서 혼자서 제일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나야.”
청소와 정리는 좀 못하지만 일단 생존에 가장 중요한 요리를 잘하는 데다 기계와 수리, 목공에 강하고 기본적으로 겁도 없고 혼자서도 잘 노는 편이라 자신은 혼자 사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집안일에는 젬병이라 니트와 면도 구분 못 하는 큰형이나 겁이 많아 아직도 혼자 잠을 못 자는 둘째 형과는 격이 다르다.
그러고 보니 최근 새벽에 무섭다고 징징대는 둘째 형 전화를 못 받아 줬는데 요즘은 누가 받아 주고 있나 모르겠다. 큰형은 착신 거부 걸어 버릴 사람이고 아버지나 어머니도 절대 받아 줄 사람이 아니니까, 그럼 또 삼촌한테 징징대고 있으려나…….
- 그건……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
어떻게 보면 성격이 가장 단순한 사람이 혼자서도 잘 살기는 하는 것 같다고, 해준도 순순히 인정했다.
“지금 생각났는데 둘째 형 아직도 삼촌한테 밤에 전화해서 징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