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 요즘은 안 그래. 애인 생긴 것 같던데.
“와, 그 애인 불쌍해…….”
세상은 넓고 알파는 많은데 왜 하필 우리 둘째 형 같은 진상을 만나나, 하며 본 적도 없고 어쩌면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를 둘째 형의 미지의 연인에게 애도를 표했다.
아직 안 헤어졌다면 어서 헤어지고 헤어졌다면 부디 다음에는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 그것도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
“둘째 형은 어리광이 너무 심해. 그거 고치기 전에는 절대 결혼 못 할걸.”
- 형한테 악담하지 말고.
“악담이 아니라 팩트야.”
성격은 급한데 근성은 없고 어리광 심하고 겁도 많고 말도 많고 짜증도 많고, 남의 말은 전혀 안 듣는 데다 흥분하면 온갖 비난과 힐난에 인신공격까지 안 가리고 해 대는 인성이라 결혼 상대로는 최악이다.
집안과 외모와 스펙은 더없이 좋지만 성격적 결함이 너무 크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인성에 너무 큰 하자가 있다.
- 형 욕은 그만하고…… 우리 할 얘기 있지?
“응?”
- 일단, 그 전에 내가 어젯밤에 주영이랑 통화한 뒤라는 거 명심하고 얘기해.
그 말은 어제 이미 주영이에게 네가 현규를 만나 담판을 짓겠다고 한 걸 다 들은 후니, 어설프게 잔머리 굴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런 경고가 아니라도 어차피 삼촌은 이쪽의 아군이라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었다. 삼촌도 주영이도 이쪽에 협조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주영이한테 얘기 들었으면 다 알겠네.”
- 대충 어떻게 된 건지는 알겠지만 정확히는 모르니, 설명해 줘야겠지?
“알았어. 그러니까…….”
* * *
정확히 5분간, 지난밤부터 현재까지 있었던 일을 간단히 요약 정리 해 삼촌에게 브리핑을 마친 순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지금 삼촌이 뭘 하고 있는지 눈앞에 선연히 그려졌다. 아마 이마를 짚은 채 대체 얘를 어쩌면 좋으냐, 라는 얼굴을 하고 있을 거다.
지난 28년간 늘 그랬던 것처럼.
- 수현아…….
“응.”
- 일단 이걸 확인하자.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는 거지?
“응.”
-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고?
“응.”
- 그렇다면 오늘 진원이가 얼마나 충격받았을지도 알겠지?
동생이 갑자기 그 상태로, 그것도 지난밤을 함께 보낸 상대와 함께 나타났으니 아마 기겁했을 거라고, 해준은 진원이 오늘 정신이 나가 있던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줬다.
사실 해준도 꽤 놀랐지만 어제 들은 바가 있기에 아는 척하기도 애매하고 모른 척할 수도 없어 ‘사생활’이라는 말로 대화를 자른 거다.
그 정도로 오늘 수현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런데, 진짜 그게 그렇게 적나라하게 보여?”
도대체 그 메커니즘을 이해 못 하겠다고 수현이 다시 묻자 잠시 침묵하던 해준이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작게 중얼거린다.
- ……역시 모르고 한 짓이네.
긴 한숨과 함께 들려온 앓는 소리에 수현은 겸연쩍어하며 목을 긁적였다.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형이나 해준이 그렇게 충격을 받은 이유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페로몬이라고 하지만 결국 냄새가 덧씌워져 티가 나는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꼴 보기 싫은 건가 고개를 의아해하자 다시 한번 긴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 너야 아예 모르니 그렇다 쳐도, 현규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파혼할 생각.”
- …….
“왜?”
- 파혼은 현규가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강 대표님이 어떻게 나오든 그 집안의 실권자는 현규야.
최대 주주니까, 라는 해준의 말에 자기도 어제까지는 그런 줄 알았다고 수현도 동의했다. 사실 그래서 어제 현규 형을 만나 거절해 달라고 부탁한 거니까.
“현규 형도 그간 쳐 놓은 사고가 있어서 거절이 힘들다고 하던데? 종마의 역할은 해야 한다고.”
- 결혼할 생각만 있다면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어, 현규는. 아예 결혼을 안 할 거라면 모를까.
“그럼 지수 형 말이 맞나…….”
- 지수가 뭐라고 했는데?
“백해경이라고 형 스토커가 돌아와서 그 스토커 떼어 내려고 그런 거라던데.”
둘째 형은 현규 형이랑 나랑 사귄다는 걸 믿더라고, 그렇게 바보일 줄은 몰랐는데, 라는 수현의 중얼거림에 해준이 재빨리 되묻는다.
- 백해경?
“응.”
- 아…….
“삼촌도 알아?”
- ……유학할 때 알던 애야. 그런데, 걔가 현규 스토커라고?
“지수 형 말로는.”
- ……차라리 그렇다면 납득은 되는데…….
“그래?”
잘은 모르겠지만 스토커 기질이 농후한 사람이긴 한 듯 드디어 납득한 해준의 반응에 수현은 ‘위험한 사람인가?’라고 뒤늦은 고민을 시작했다.
현규 형은 그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다고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 김에 현관문에 열쇠를 하나 더 달까, 하는데 삼촌이 빠르게 대화를 이어 간다.
- 그래,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겠는데…… 너 진짜 이대로 괜찮은 거야?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미 일은 터졌고 이 정도로 일이 크게 터진 이상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그냥 얌전히 현규 형이랑 동거하다 삼촌하고 주영이 결혼한 뒤에 헤어지는 게 최선이다.
솔직히 여러모로 치이고 낚인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수현이 야무지게 답한 순간 해준이 뜻밖의 질문을 내뱉는다.
- 너, 혹시 나 때문에 그런 거야?
순간 허를 찔린 듯 수현의 표정이 굳었다.
분명히 그게 제일 큰 원인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삼촌과 결혼할 수 없었던 것도 맞다.
“삼촌이 원인 중 하나인 건 맞지만 삼촌 때문에 그런 건 아냐. 늘 말하지만 난 내 기저귀 갈아 주던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지는 않아.”
기저귀가 뭐냐, 세포 분열 당시의 초음파 사진을 본 사람과 결혼이 웬 말이냐, 싶었다.
10살이라는 나이 차이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너무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게 더 문제다. 어린 시절부터의 인간관계나 사소한 습관, 잊고 싶은 흑역사들까지 전부 알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무난하게 살기는 좋겠지만 그 사이에서 어떤 화학 작용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어릴 때야 어른들이 결혼하라니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은 좀 아니다. 더더구나 한쪽에 애인도 있는 상황에서는.
- 나도 내가 분유 타 먹이던 녀석이랑 결혼하고 싶지는 않아.
“그럼 더 강하게 거부했어야지.”
삼촌이 거절하지 못하니 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라고 수현이 지적하자 이번에는 해준도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문다.
다른 문제에는 똑 부러지면서 수현의 가족과 관련된 문제에는 유독 우유부단해지는 해준이나, 원래 성격이 소극적이고 내향적이라 여기저기 휘둘리기만 할 뿐 본인 의견을 내지 못하는 주영이나.
이 사건에 관련된 네 명 중 두 명이 저렇게 소극적이니 수현과 현규가 강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각자 파트너 체인지해서 결혼식장에 끌려갈 판이다.
“하여간 그렇게 됐으니까 삼촌은 모르는 척해.”
- 아는 척은 안 하겠지만 진짜 이래도 괜찮은 거야? 아니, 너는 그렇다 치고 현규네는? 그쪽 집에서는 꽤 세게 나올 텐데?
“그렇지 않아도 오전에 대표님이 절대 인정 못 한다고 떼어놓겠다고 하시더라고. 현규 형은 주영이랑 약혼할 거라고.”
- ……그래?
“응. 아무래도 영감탱이들 사이에 뭐가 있었던 것 같아. 사업 쪽이면 현규 형이 알 텐데 언급 안 하는 걸로 봐서는 사업 쪽은 아니고 개인적인 거래 같아. 아니면 앞으로의 사업 투자, 뭐 그런 쪽이나.”
- ……그럼 어지간해서는 포기 안 할 것 같은데 현규네나, 주영이네나.
“포기하게 해야지.”
- 이쪽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이제부터는 조용히 있어. 괜히 너만 치일 수도 있어. 현규도 그렇게 다정다감한 편은 아니라 널 캐어해 주지는 않을 거고…….
아니, 애초에 현규가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할 성격이 아닌데, 라고 의아해하던 해준은 문득 말을 멈췄다. 그러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지 침묵한다.
“……삼촌?”
갑작스러운 정적에 수현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럼에도 한동안 조용하던 해준이 잠시 후 작게 중얼거린다.
- ……아니, 아무것도 아냐.
어떻게 들어도 뭔가 있는 게 분명한 말투였지만 수현은 굳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해준이 말을 안 하는 거라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뭐든 확실해지면 얘기해 줄 거다.
인생에 도움이라고는 안 되는 쓸모없는 형들과 달리 삼촌은 신용도 높은,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 아까 커플링 봤는데…….
“응.”
- 그건 언제 준비한 거야?
“형이 오전에 급하게 친구한테 부탁해서 매장에 있는 걸로 갖고 왔대.”
같은 회사라 커플링 끼고 다니면 티 나니까, 라며 다시 왼손의 반지를 보자 다이아몬드가 반짝인다.
디자인은 굉장히 심플하지만 확실히 그 브랜드 특유의 볼륨감이 있어 조금 불편하긴 하다. 일할 때 끼기에는 좀 번거로울 것 같다.
- 급하게 산 것치고는 너무 잘 맞는 것 같던데? 네가 사이즈 알려 줬어?
“아니. 남자들 평균 사이즈로 갖고 왔대.”
손을 많이 쓰는 엔지니어다 보니 손에 뭐 하는 걸 싫어해서 시계도 안 차는데, 반지 사이즈를 알 리가 없지, 라고 중얼거리며 손을 돌려 보자 진짜 사이즈가 잘 맞기는 한다.
내가 대한민국 남자 평균 사이즈인가, 하고 햇살 아래 다이아몬드를 비춰 보는데 형이 다시 묻는다.
- 너, 그거 이름이 뭔지는 알아?
“알지. 저번에 삼촌하고 같이 가서 고른 거잖아.”
원래는 삼촌이 프러포즈 링으로 쓰려고 골랐다가 주영이 손가락 사이즈를 몰라 미뤄 둔 채라 기억하고 있었다.
- 현규는 알아?
“보통은 모르지 않을까?”
웨딩밴드로 유명한 디자인이긴 하지만 결혼 준비하러 다니지 않은 이상 이름까지는 모를 것 같다고 덧붙이자, 그제야 삼촌이 납득한 듯 화제를 넘긴다.
- ……그래, 그렇겠지. 하여간 상황은 알겠어. 그런데 아무리 사정이 그래도 오늘 일은 너도 경솔했어. 진원이 많이 놀랐을 테니 나중에 만나면 사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