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60)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여전히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삼촌이 그러라니 그러겠다고 순순히 대꾸했다.

“알았어.”

당분간 보지 말자고 한 걸로 봐서는 한 달쯤은 만나기 힘들겠지만 어쨌든 다음에 기회가 오면 사과는 하겠다고 하자 삼촌이 슬슬 통화를 마무리하려 한다.

- 그리고 너희 일은 나도 모르는 척할 테니 뒷일은 알아서 해. 네가 벌인 일이니 책임도 네가 져야지.

“이쪽은 걱정 말고 삼촌이랑 주영이 걱정이나 해. 현규 형도 절대 주영이랑은 약혼 안 할 거라고 했으니 어떻게든 그쪽 약혼도 깨긴 깨겠지만, 그 영감탱이면 현규 형이랑 약혼이 깨지면 곧장 다른 쪽으로 갈아탈 수도 있어.”

보통 영감탱이가 아니라고 수현이 어제 오늘 모은 데이터를 토대로 현실적인 충고를 건넸다. 사실 큰형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테지만 큰형이나 아버지는 절대 삼촌에게 그런 이야기는 못 한다. 애초에 자신과 빨리 결혼을 진행하려고 한 것도 삼촌이 그쪽에서 거절당한 것 때문에 상처받을까 봐 나로 돌려막기 하려던 거니까.

“일 복잡해지기 전에 그냥 임신부터 하는 건 어때?”

- 수현아…….

아주 어린 시절, 냉장고에서 간식을 다 훔쳐 먹은 뒤 주방 바닥에 앉아 잼통을 끌어안고 잼을 퍼먹고 있을 때 자신을 발견한 삼촌이 자신을 ‘아가…….’라고 불렀을 때의, 딱 그 말투였다.

골치 아프고 어이가 없기는 한데, 애가 너무 해맑고 생각이 없어서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아니, 어차피 결혼할 건데 임신부터 하는 게 어때서?”

너무나 그 집안사람다운 수현의 말에 해준은 탄식했다.

- 내가 그 얘기를 사흘 전에 지수한테 들었는데 오늘 네가 똑같이 말하네. 너만은 진짜 곱게 키우고 싶었는데…….

그리고 실제로 곱게 곱게 키웠는데 어쩌다 이렇게 자랐냐는 삼촌의 한숨에 수현이 그대로 받아친다.

“말도 안 되는 꿈을 꿨네. 우리 집 유전자에서 곱게 키운 아이는 나올 수가 없어.”

괴수 집안에서 곱게 키워 봐야 괴수지, 티렉스가 곱게 사육한다고 풀 뜯어 먹진 않는다, 라며 수현이 DNA의 무서움을 역설하자 해준이 다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쉰다.

- 우리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알아서 하기 힘들 것 같으니까 이러지.”

- ……알아서 할게. 그리고, 주영이도 이거 알아?

“응. 방금 전화 왔길래 대충 설명해 줬어.”

- 주영이는 뭐라고 해?

“삼촌처럼 ‘수현아…….’라고만 부르다 끊었어.”

부를 때마다 점점 마지막 억양이 푹푹 내려가는 게, 딱 삼촌하고 엄마 같았다고 수현이 해맑게 전하자 해준이 한숨을 내쉰다. 주영이 왜 그랬는지 너무나 이해가 간 탓이다.

- 그래. 그럼 됐어. 나중에 연락할게.

“응.”

- 현규한테는…… 아니다. 내가 따로 연락할게.

“그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마무리된 통화에 휴대폰을 손에 든 채 소파에 다시 누워 있던 수현은 휴대폰으로 시각을 확인했다.

5시 19분. 아직 퇴근까지는 여유가 있지만 딱히 더 할 일도 없어 슬슬 나가 보기로 했다.

나간다고 해 봐야 어차피 옆 건물이지만 커피도 한 잔 마실 겸 오늘도 여지없이 검은색 티셔츠에 검은색 조거팬츠를 입고 나섰다.

데이트라도 하는 듯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 * *

[1층 카페에 있어요.]

엘리베이터 타고 2분, 걸어서 1분.

정확히 3분 만에 도착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현규에게 메시지를 보낸 수현은 귀찮아서 모르는 척하고 있던 친구들의 메시지에 일일이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

답장은 한결같이 현규 형과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다, 라는 게 전부였다. 그 메시지에 다들 현규 형이 미국 가서 고생이 많았나 보다, 현규 형 너한테 무슨 약점 잡혔냐, 라는 반응이라 꺼지라고 메시지를 남긴 뒤 알림을 아예 해제해 버렸다.

그러곤 다시 오전에 하다 멈춘 크리스마스 식단을 짜기 시작했다. 다시 소주냐, 막걸리냐로 돌아와 심각하게 안주 목록을 작성 중인데 휴대폰이 울려왔다.

큰형이다.

한동안 보지 말자더니 왜 벌써…… 라고 생각하다 문득 깨달았다.

형은 한동안 보지 말자고 했지, 전화하지 말자고는 안 했다.

“……휴대폰 잃어버리고 싶다…….”

변기에 빠트려도 요즘 기기는 방수가 잘되니 어디에서 좀 잃어버렸으면 좋겠다. 마침 휴대폰이 방전까지 돼서 딱 이틀 뒤쯤에 친절한 사마리아인이 충전 후 전화를 받아 주면 그때 찾게…….

업무 관련은 업무용 휴대폰 쓰면 되니까…… 라고 떠올리다 거기서 망상을 멈췄다.

어차피 형들이 회사랑 집까지 아는데 휴대폰을 잃어버려 봤자 아무 의미 없다.

“응.”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커피를 마시며 통화 버튼을 누르자 침통한 형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 식장 취소했어.

“잘했어.”

- 그리고 너 할아버지한테 전화 좀 해.

“왜?”

- 할아버지 심란해하셔. 어떻게 아셨는지 너랑 삼촌 결혼할 눈치라는 거 아시곤 어제부터 청첩장 준비하셨는데 결혼 취소라는 얘기 듣고 실망하셔서 앓아누우셨어.

집도 알아보던 중이셨대, 라는 말에 수현은 기겁했다.

그렇다는 건 청첩장을 진짜 찍으려고는 했다는 거다. 큰형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대박, 우리 가족들 진짜 성격 급해.”

오늘 이거 안 터트렸으면 당장 청첩장 뿌려질 뻔했다는 걸 알고 나니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쯤 되니 진짜 형이 잡은 날짜가 이번 주말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오늘이 목요일인데 오늘 오후에 청첩장 뿌리고 내일 예복 기성품으로 대충 맞추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식장 들어갈 뻔했다.

우리 가족들이라면 가능하다.

진짜 성격 더럽게들 급하고 추진력들도 쓸데없이 좋다.

- 뭘, 넌 안 급한 것처럼 말해? 성질 급해서 예정일보다 열흘이나 빨리 나온 놈이.

무슨 태어날 날 얘기까지 나오냐 싶지만 다들 태어날 때부터 알아 온 사람들이다 보니 이렇게 되는 거다.

특히 큰형은 당시 6살이었으니 기억도 제법 있을 거라 어쩔 수가 없다.

- 하여간 너 할아버지한테 전화드리고 가서 애교 좀 부려. 너랑 삼촌 결혼해서 삼촌 우리 집 정식 가족 되는 날만 기다리셨는데 너 스캔들 크게 터진 거 보고 많이 실망하셨어.

“주영이랑 사귀는 거 뻔히 아시면서 설마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 우리 할아버지 집념을 우습게 보지 마. 나도 삼촌 주영이랑 잘 사귀니까 포기하시라고 했는데 연애야 하다 헤어지기도 하는 거니까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너까지 이 난리 난 거 보고 상심하셨어. 청첩장도 벌써 10년 전부터 준비하신 거던데.

“……10년 전이면 나 고등학생이었는데?”

- 원래 너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시키려고 하셨어. 그나마 그때는 삼촌이 너 너무 어리다고 절대 안 된다고 해서 미룬 거야.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사실 그때는 결혼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때라, 아마 그때 그냥 진행했다면 삼촌하고 그런대로 잘 살았을 것 같다.

애는 못 낳았겠지만…….

“그런데, 이상하게 아버지가 조용하네? 지금쯤 연락이 왔어야 정상인데. 아버지, 아직 몰라?”

이 정도로 일이 터졌으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아버지가 조용한 게 너무 이상했다.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더라도 대표님이 아셨으니 아마 아버지한테 전화해 한바탕했을 텐데…….

- 보고는 드렸는데 일단 두고 보신대. 오늘 바쁘기도 하시고.

“왜?”

- ……전화하시느라.

정확히 말하자면 친구들한테 자랑하느라, 라는 말에 수현은 탄식했다.

“아…….”

예상한 대로였다. 삼촌을 찬 주영이네 아버지가 탐내던 현규 형을 이쪽에서 잡은 게 기분 좋으신 거다.

역시 투명하신 분이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다만 한 사람이라도 행복한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행복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알았어. 그럼, 아버지는 전화 다 돌리고 정작 아들한테는 전화 안 했다는 거 생각나면 연락하시겠네.”

- 그렇겠지. 언제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이네.”

전화받기 귀찮았는데, 라는 말과 함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쭈욱 들이켜는데 슬슬 로비 저편에서 퇴근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럼, 끊어. 할아버지한테는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 그래.

타오를 때는 무섭게 타오르는 만큼 식는 것도 빠르게 식는 성격 그대로 오전에 그 난리를 치고도 막상 일이 정리되니 더는 용건 없다며 빠르게 끊긴 전화에, 수현은 휴대폰을 내려 둔 채 출입구 너머의 엘리베이터를 바라봤다.

아직 내려온다는 연락은 없었지만 정시 퇴근이라면 형도 슬슬 나올 시간이라 그쪽을 응시한 채 커피를 마시는데 메시지 알림음이 울려왔다.

[지금 내려가.]

짤막한 형의 메시지에 서둘러 잔을 비워 카운터에 반납한 뒤 막 출입구를 지나려는데 사원증을 두고 나온 걸 깨달았다.

“저, 안에 좀 들어갈게요.”

그간 몇 번 커피를 사 준 덕에 얼굴을 익힌 보안 직원에게 내가 사원증을 두고 나왔다고 하자 보안 직원이 문을 열어 준다.

“감사합니다.”

직원에게 인사를 건넨 뒤 서둘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는데 때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는 형이 보였다.

“형.”

일부러 왼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형을 부르자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선 형이 반가운 듯 눈웃음을 흘린다.

“피곤할 텐데 집에서 쉬지. 내가 가면 되는데.”

“괜찮아요. 근육통은 거의 나았어요.”

한나절 사이에 별일이 다 있었다 보니 아플 틈도 없이 회복했다고 자랑하며 형에게 다가서자 형이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튼튼해서 좋네.”

다정한 속삭임과 함께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형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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