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60)

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라는 현규의 무언의 압박에 수현은 더는 변명하지 못한 채 작게 대꾸했다.

“……조심……해야죠.”

“좋아.”

말귀는 알아먹어 다행이라고 현규가 만족해하는 모습에 막 마트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수현이 현규를 힐끔 보곤 말을 건넨다.

“그럼 형도 그래 주세요.”

“뭘?”

“옛 애인이나 주영이 만나는 거 조심해 주세요.”

어쩐지 자신만 당하기는 억울해 수현이 현규에게도 똑같은 기준을 요구하자 현규가 웃는다.

“난 애인 연락처는 헤어지는 즉시 착신 거부 건 뒤, 연락처에서 삭제해. 주영이와는 연락할 일 없고. 만약 연락할 필요가 있다면 네가 하면 되지.”

전 애인들하고 어떻게 헤어졌길래 착신 거부까지 거냐?

어떻게 봐도 현규 형의 인간성을 의심하게 하는 말이었지만 본인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이 이상 얘기하는 건 월권이라 얌전히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렇죠…….”

“모처럼 마음에 드네. 착해.”

마치 강아지를 다루듯 칭찬한 뒤 현규는 다시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그 모습을 힐끔거리며 마트의 주차장으로 향하던 수현은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억울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히 서로 필요해서 하는 일이고 심지어는 자신이 먼저 권한 일인데 왜 자꾸 낚인 기분이 드는 걸까…….

“저기요…… 형.”

“말해.”

“저 자꾸 형한테 당한 기분이 드는데…… 기분 탓이겠죠?”

“응. 기분 탓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본능은 너 지금 제대로 낚였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수현은 그냥 기분 탓이라고 치부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니까.

하지만 가끔은 불편한 현실을 마주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넌, 진로를 잘못 선택한 것 같은데…….”

샤워를 하고 나온 직후, 12첩 반상 앞에 앉아 식사를 하던 현규는 진심으로 감탄사를 흘렸다.

작은 식탁 위에 가득 차려진 요리들은, 외형이나 냄새도 그럴싸했지만 맛은 더 좋았다.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도 밸런스가 정확히 맞는 것도 굉장한 부분이었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단 한 시간 안에 그 많은 음식을 해냈다는 사실이었다.

메인 요리인 해물탕을 비롯한 어묵조림과 버섯볶음, 그리고 계란찜과 각종 나물과 겉절이까지. 그 와중에 계란장까지 해 둔 수현에게 현규는 처음으로 경탄의 시선을 보냈다.

이 정도라면 요리를 잘한다고 자부할 만하다.

“그냥 요식업에 종사하지 그랬어.”

손이 큰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요리 자체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맛도 모양도 속도도.

“잠깐 그런 생각도 했는데 삼촌이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남겨 두고 잘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라고 해서요.”

“어째서?”

“스트레스받을 때 빠져나갈 길이 있어야 하는데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면 좋아하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고요. 그럼 빠져나갈 길도 없으니 가능하면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만 남겨 두라고 해서요. 그리고 오메가니까 아무래도 자택 근무가 가능한 직업이 좋다고 해서 공대를 갔죠.”

과도 삼촌이 정해 줬다며 자랑스러워하는 수현을 현규는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뭔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이었다.

“……나름 일리 있는 말이긴 한데 해준 형 말이라면 무조건 맹신하는 건 좋지 않아.”

“왜요?”

우리 집에서 제일 제정신인 사람이 하는 말인데, 라며 수현이 이해가 안 간다며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에 현규가 작게 혀를 찬다.

“성인이면 네 일은 네가 판단해야지.”

네 미래는 특히, 라고 현규가 다소 신경질적인 투로 받아치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수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야죠.”

빠른 수긍 후 수현 역시 막 숟가락을 들려는데 거실 쪽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왔다.

“제 거예요.”

오늘 새로 온 거실 테이블 위에서 반짝거리는 건 자신의 전화였다.

빨리 전화 안 받고 뭐 하냐고 화를 내듯 요란하게 울려 대는 벨 소리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테이블에 던져 둔 휴대폰을 손에 든 수현은 바로 위에 뜬 이름에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직감했다.

아버지였다.

친구들하고 통화 다 하고 이제 드디어 아들하고 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신 모양이었다.

“네.”

- 너 당장 강민혁 아들하고 결혼해!

수화부에서 울려 오는 굴착 공사라도 하는 듯 시끄러운 고함에 수현은 귀를 막고 서둘러 휴대폰의 볼륨을 낮췄다.

이 시각이면 어느 정도 화가 식었을 거라 생각하고 불륨을 안 내렸는데 아버지는 이제 시작인 모양이었다.

이어폰을 준비했어야 하는데, 방심했다.

지금이라도 이어셋이 필요할 것 같아 서둘러 가방을 뒤지며 무심히 대꾸했다.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말씀이세요? 그리고 강민혁은 또 누군데요?”

- 니네 대표!

“아…….”

그제야 우리 대표 이름이 강민혁이었구나 한 수현은 슬쩍 현규를 돌아봤다. 현규 역시 그 이름을 들은 건 분명했지만 굳이 아는 척하지 않고는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내 알 바 아니라는 태도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요?”

- 강민혁이 방금 전화해서는 자기 아들 결혼 진행할 거라고 염병을 하잖아! 이번 주에라도 결혼시킬 거라고 돼지 새끼처럼 꽥꽥거리길래 어디 해 보라고 했다, 내가!

“결혼이요?”

지금쯤이면 나랑 형이랑 동거한다는 거 다 알 텐데, 무슨 그런 염치없는 짓을, 이라고 당황해하는 사이 아버지가 빠르게 말을 이어 가신다.

- 그 빌어먹을 새끼가 갑자기 퇴근길에 전화해서는 아들 교육 좀 잘 시키라고 어디 반편이 새끼를 자기 아들한테 들이대냐고 고함을 빽빽 지르잖아. 그래서 내가 전국에 있는 네 아들이 하도 많아서 네 아들이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이 새끼가 막 중학교 때 일까지 들먹이며 쌍욕을 하더라고. 그래서 그래 봐야 네 아들은 내 아들하고 산다고 하니까 당장 결혼을 시킨다잖아.

그 통화 상황을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안 봐도 훤했다.

영감탱이들이 또 자기들 자존심 싸움에 애들 결혼을 끌어들인 거다. 물론, 시작은 아들들이 하긴 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결혼할 상대는 있고요?”

한 달 뒤 정도라면 모를까 이 상황에서 결혼 진행하면 그쪽도 여기저기 입방아에 오르내릴 텐데, 아무리 현규 형 조건이 좋아도 어떤 집에서 결혼을 진행하냐고 묻자 그러지 않아도 큰 아버지 목소리가 더 커진다.

- 내 말이 그 말이라고! 간악하고 야비한 서재민이 놈이 강민혁한테 약혼 생략하고 그냥 결혼으로 가자고 했다네? 이 썩을 놈들이 둘이서 짜고 내 뒤통수를 쳤다고!

서재민은 또 누구더라, 라고 고민하던 중 순간 그가 누군지 떠올랐다.

주영이 아버님이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절대 저 두 분은 아버지 뒤통수를 칠 일이 없다. 뒤통수는 믿는 사람한테서 맞는 게 뒤통수지, 서로 누가 먼저 망하는지 지켜보겠다는 관계에서는 성립할 수 없는 관용어였다.

- 이 새끼들이 분명히 짜고 치는 거야. 아까 네 아들 약혼자를 내 아들이 가로챘다고 놀렸더니 두고 보라고 강민혁 아들이 두 집 살림을 하든 세 집 살림을 하든 결혼 진행한다길래 내가 마음대로 해 보라고 했거든. 어차피 강민혁 아들은 너랑 결혼할 거라고. 그러니까, 빨리 현규랑 결혼해.

동거는 무슨 동거냐, 당장 결혼부터 하라는 그 말에 대답할 가치를 못 느껴 적당히 말을 돌렸다.

“……형하고 얘기는 해 볼게요.”

- 얘기만 하지 말고 당장 식장 준비부터 해! 아니, 진원이 이 자식이 벌써 식장 취소했나? 그 식장하고 청첩장 그대로 쓰면 되는데?

“오후에 취소했어요.”

- 그래? 아, 그런데 강민혁이 그 식장 잡으면 안 되는데? 젠장, 당장 다시 계약하라고 해야겠다. 혹시 모르니 이번 달 안에 빈 식장하고 센터들 전부 찾아서 내가 예약해야겠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영이와 현규 형이 식을 올릴 수 없게 하겠다는 아버지의 영양가 없는 야망에 수현은 진심으로 이런 어른은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사방에 민폐다.

- 식은 내가 못 올리게 알아서 할 테니 너 절대 서재민 아들한테 지지 마! 현규 꽉 잡아서 결혼부터 해!

“……어제는 삼촌하고 결혼하라면서요?”

어제 오후부터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자니 조금 억울해져 그렇게 항의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와 같이 당당했다.

- 그건 어제 일이고!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수현은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 뭘 알아서 해? 당장 결혼 준비부터 해. 식장 다시 잡고 청첩장 찍고 할아버지가 준비하시던 집 있으니까…… 잠깐, 또 전화 온다…….

그러고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는 듯 고요한 수화부 너머에서 미세한 진동 소리가 울려왔다. 아직 차 안인 모양이었다.

기사 아저씨 오늘도 아버지 고함 때문에 귀에서 피 나시겠구나, 하며 기다리는데 또다시 고함이 울려왔다.

- 서재민 이 썩을 놈이! 야, 끊어!

너 잘 걸렸다, 라고 외치며 빠르게 전화를 끊는 박력에 수현은 귀가 아파 휴대폰을 멀찌감치 떨어트렸다.

아무래도 주영이네 아버지가 또 전화나 문자로 아버지 신경을 긁은 모양이었다.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로 봐서는 적어도 앞으로 한 달간은 이렇게 매일 전화해서 서로 조롱하며 신경 긁고 말도 안 되는 허세와 허풍을 부리다 결국 일을 더 키울 게 뻔히 눈앞에 그려졌다.

설마 진짜 아버지가 결혼식이 가능한 모든 식장들을 예약하는 건 아니겠지, 했지만…… 아버지라면 가능하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렇게 나가면 저쪽에서는 맞불 작전으로 식장들을 전부 사 버릴 수도 있다.

쓸데없는 일에 돈과 열정을 쏟는 게 삶의 낙인 영감탱이들이다 보니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어쩐지 앞으로 되게 골치 아프고 복잡하고 피곤해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인상을 쓴 채 식탁으로 다가서자 이쪽 통화에 은근히 신경을 쓰던 형이 시선을 들어 무슨 일이냐고 묻듯 바라본다.

의문 가득한 그 시선에 곧장 비보를 알렸다.

“형이 대표님의 아성을 무너뜨리실 수도 있겠어요.”

너무 비약적인 그 말에 현규가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는 눈빛으로 수현을 바라보자 현규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수현이 현규가 지금 처한 비극적 상황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우리 아버지랑 대표님이랑 통화했는데요…….”

“그런데?”

“대표님께서 이번 주말에 약혼 건너뛰고 주영이랑 형 결혼시킨대요.”

“…….”

순간 막 나물을 집던 현규의 젓가락이 멈칫했다. 생각보다 커져 버린 상황에 현규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을 쓰자 수현이 더 비극적인 사실을 알려 준다.

“아버지가 그 얘기 들으시곤 형하고 저랑 결혼하라고 압박 중이에요. 서 국장님하고 대표님 엿 먹으라고요.”

이러다 형 같은 날 결혼식 두 번 잡히게 생겼어요, 라고 수현은 조금 안쓰럽다는 얼굴을 했다.

만년 발정기로 유명한 대표님도 이 정도 스캔들은 못 일으켰는데, 현규는 그 부친도 이루지 못한 중혼 스캔들을 일으키게 생겼다.

안타까워하는 수현의 눈빛에 현규가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수현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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