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닌데, 라고 이야기하는 서늘한 현규의 시선에 수현은 얌전히 고개를 숙이곤 젓가락을 손에 들었다. 그러곤 말없이 멈췄던 식사를 이어 가는 수현을 응시한 채 현규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기를 잠시, 초조한 듯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두드리기 시작한 현규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따위로 나오시겠다?”
누굴 향한 언사인지 모호한 그 말에 수현이 조심스레 현규의 눈치를 살피자, 현규의 눈동자가 짙어진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뚫어져라 수현을 응시하는 그 시선은 언뜻 보기엔 차가운 듯했지만 손을 대면 델 듯 뜨거웠다. 불편할 정도로 열기가 느껴지는 그의 눈빛에 식사를 하던 수현이 움찔하자 현규가 그를 눈치채곤 서둘러 표정을 풀고 웃는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달콤한 시선으로 수현을 응시하던 현규는 옆에 있던 물잔을 들어 수현의 앞으로 밀어 줬다.
“마시면서 먹어. 체해.”
“…….”
“요리도 잘하고 먹는 것도 잘 먹고…… 눈치도 없고 겁도 없고…… 남의 말은 전혀 안 듣는 게, 아주 좋아.”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그 말에 수현은 살짝 몸을 뒤로하며 경계하듯 되물었다.
“……왜 그러세요…….”
“눈치가 없는 데에 비해 본능은 또 살아 있단 말이지. 귀찮게…….”
심사가 제대로 뒤틀렸는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던지는 현규를 수현이 여전히 눈만 껌뻑인 채 보고 있자 현규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어제 했던 약속 기억하지?”
“……뭘요?”
“네 결혼을 깨면 내 약혼도 깨게 도와준다고 했던 거.”
처음 듣는 이야기에 수현은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하며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 같기는 한데 구체적으로 그런 조건을 말한 기억은 없다.
도저히 떠오르는 바가 없어 난감해하는 얼굴로 형을 바라보고 있자 형이 싱긋 웃어 보인다.
“네가 취했을 때 얘기했어.”
넌 잊어버린 것 같지만, 이라고 현규가 덧붙인 말에 수현이 빠르게 눈을 굴린다.
“……그랬나요?”
“그랬어.”
어제 난 음주로 인한 심신상실 상태였으니 어제 한 계약은 무효 아닐까요, 라는 말이 수현의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 말을 하면 현규가 진짜 ‘법’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아 입만 벙긋 거릴 뿐이었다.
그걸로 수현이 그 계약을 인정했다고 판단한 현규가 환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여태껏 본 것 중 가장 자상해 보이는 그 미소에도 수현은 등골이 섬뜩해져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슬쩍 몸을 돌렸다.
갑자기 솜털이 곤두서는 건 신변의 위협이 느껴져서였다.
“일단, 식사부터 해.”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나중에.”
“지금 하셔도 되는데요.”
“아니, 나중에. 식사해. 나 잠시 통화할 일이 있으니.”
그사이 먼저 식사를 끝낸 현규가 자리에서 일어서 그의 휴대폰을 들고는 침실로 들어선다. 그 뒷모습을 따라가듯 수현이 목을 쭈욱 뺐지만 이내 침실로 들어선 현규는 문을 닫아 버렸다.
어차피 벽간, 층간 소음 따위는 신경 전혀 안 쓴 구조라 아무리 문을 닫아도 목소리가 전부 들릴 테지만 침실 안은 고요했다.
메시지를 보내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게 더 불안했다.
뭔가 아주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샤워를 한 뒤 잠옷으로 반소매 티셔츠와 반바지를 걸치고 침실로 들어서던 수현은 너무나 당당하게 먼저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현규를 보곤 멈칫했다.
조금 전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드레스룸에 들어갔을 때도 꽉 찬 드레스룸을 보고 놀랐고 샤워를 하고 나온 후에도 거실에 가득 찬 가방들을 보고 ‘아직도 짐이 남았어?’라고 기겁했는데 침실 안은 더욱 놀라웠다.
“형, 옷은 입으시는 게 어떨까요?”
초가을이라지만 밤에는 추운데, 라고 수현이 다 벗고 누운 현규를 보며 매너를 좀 지켜 주시는 게 어떨까요, 라는 말을 돌려 했다. 침대는 다행히 킹사이즈라 남자 둘이 자기에도 넉넉했지만 어쨌든 남인 두 사람이 같이 자는데 한쪽이 헐벗는 건 좀 불편하다.
하지만 현규는 단 한 마디로 거절했다.
“아래만 입으면 충분하지.”
그걸로 매너는 지켰다는 현규의 답에 수현은 가장 적절한 말을 골라냈다.
“이 집이 새벽에는 좀 추워요.”
“보일러 온도를 올리면 되지.”
“그럼 제가 더울 것 같은데요.”
“그럼 너도 벗으면 되지.”
네가 나한테 맞춰야지 내가 너한테 맞춰야 하냐, 하는 극히도 이기적인, 너무나 알파스러운 그 말에 수현은 더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그래, 더우면 벗으면 된다. 그리고 다행히도 자신은 더위를 많이 안 탄다.
“편한 대로 계세요…….”
안 그래도 편하게 있다, 라며 침대 헤드 쿠션에 기대앉은 현규는 태블릿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해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그의 태도에 수현은 휴대폰을 손에 든 채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먼저 잘게요.”
종일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데다 어제도 실상 몇 시간 자지 못한 채라 너무 피곤했다.
사실 샤워하는 중에 몇 번 졸다 벽에 이마까지 박은 터라 휴대폰 알람을 오늘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맞춰 둔 뒤 베개를 베곤 눈을 감았다.
그러곤 곧 수마에 몸을 맡긴 채 의식을 놓으려는데 머리 위에서 황당하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너무 여전하네…….”
퉁명스럽지만 애정이 담긴 음성 뒤로 바로 이마를 툭 치는 감촉이 느껴졌지만 바로 다음 순간 의식이 사라졌다.
그렇게 요란했던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 * *
이른 아침, 알람 소리도 없이 저절로 잠에서 깬 수현은 모처럼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어젯밤 일찍 잠들어 모처럼 장시간의 숙면을 취한 덕에 컨디션은 더없이 좋았고 근육통도 잦아들어 몸이 가벼웠다. 블라인드 너머로 느껴지는 희미한 여명도 기분 좋았고 약간 건조하면서도 더운 방 안의 온기도 상쾌하게 느껴졌다.
완벽한 아침이었다.
아니,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은 채 아침 발기를 하고 있는 현규 형의 존재를 제외한다면…….
지금은 오전 6시 30분. 이제 막 해가 뜨고 있으니 거기가 깨어나는 건 이상할 게 없다. 그래, 그건 인간의 생리 현상이니 놀라울 게 없다. 아니,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안 서면 걱정해야지.
이 상황에서 단 하나의 문제는, 자신이 불편하다는 사실이었다.
이건 너무, 노골적이었다.
아무리 하룻밤을 보낸 사이라 해도 눈을 뜨자마자 다른 남자의 거기를 이렇게 생생하게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현규가 깨기 전에 모르는 척 침대를 나가려 수현은 허리를 안은 현규의 팔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그러곤 막 그 팔을 밀어내려는데 걸리적거린다는 듯 형이 다시 허리를 끌어안는다.
거치적거리니 좀 닥치라고 조르기를 시전하는 게 분명한 그 힘에 얼결에 다시 형에게 안긴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게, 더 커졌다.
게다가 이번엔 허리가 아닌 엉덩이골 위에 닿아 있다.
둘 다 다행히 하의는 입고 있는 채였지만 그 형태나 감촉이 너무 적나라했다.
본 것도 아니고 만져 본 것도 아니지만 그냥 피부 위로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그 크기와 강도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건 진짜 좋지 않다는 생각에 다시 침대를 나가려 몸을 뒤척이자 이번엔 아예 형이 조르기를 시전한다.
그 힘에 알아챘다.
형이 깼다는 걸.
이건 무의식적으로 나올 수 없는 힘이다.
억세게 팔과 허리를 동시에 감아 누르는 힘에 숨이 막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저기, 형…….”
“…….”
“형, 저 일어나고 싶은데요…….”
“…….”
“형…… 저기요…….”
일어나신 거 아는데요, 라고 말하려는 순간 바로 뒤에서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워.”
닥치고 더 자라는 말을 함축한 한 단어에 움찔한 순간 그게 허벅지 사이로 들어왔다.
“저기, 형…….”
“…….”
“더 주무시고 싶으신 건 알겠는데, 아래만 좀 떨어뜨려 주시면 안 될까요?”
“…….”
“형, 너무 커요…….”
그 말에 허벅지 사이에 들어와 있던 그게 더 커졌다.
대체 얘는 왜 자꾸 커지는 걸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부풀어가는 그것에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져 몸에 힘을 주자 형의 팔에서 힘이 빠진다.
그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 몸에 서둘러 침대 위를 굴러 아래에 내려서자 형도 잠이 완전히 깬 듯 일어나 앉는다. 그러곤 까치집처럼 사방으로 뻗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잠에서 막 깨서인지 유독 예민해 보이는 표정뿐 아니라 아침이라 엉망이 된 머리를 신경질적인 손길마저도 섹시했지만 가장 섹시한 데는 그 아래였다.
얇은 가을 이불을 치우자 그 아래로 드러난 거기는 딱 보기에도 컸다.
그것도 너무 컸다.
저게 몸속에 들어왔었으니 몸살이 났던 것도 당연하다.
아니, 저게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공포감 때문인지 인체의 신비에 대한 경외감 탓인지 두근두근 시끄럽게 뛰는 심장과 열기가 오르는 얼굴에 서둘러 돌아서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