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60)

* * *

오늘도 역시나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출근한 수현은 1시가 가까워 오자 슬슬 사무실을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오전 시간을 할애하여 야무지게 어제 다 못 끝낸 올해 연말 식단 짜기를 마무리한 뒤, 정확히 1시가 되자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오전 내 이쪽의 눈치를 살피던 윤 팀장님이 은근한 투로 묻는다.

“이 대리, 오늘 점심 같이할까? 올해 마지막 황태 냉면 어때?”

이제 추워지면 냉면은 못 먹으니까, 라는 윤 팀장의 제안에 오늘은 검은색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은 수현이 설레설레 손을 내젓는다.

“약속 있습니다. 혼자 드세요.”

“강 팀장하고?”

“네.”

“와, 사내 연애 너무 티 내는 거 아냐?”

“사랑과 감기는 못 숨긴다잖아요.”

이젠 알 게 뭐냐, 될 대로 돼라 싶어 수현이 후드티의 주머니 안에 지갑과 휴대폰을 넣고 나서자 윤 팀장이 수현을 부른다.

“그럼 하나만 묻자, 이 대리야.”

“뭐요?”

“그거 커플링?”

말하면서 왼손을 들어 경박하게 흔드는 윤 팀장의 손짓에 일제히 다른 직원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다들 이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수현 역시 그제야 ‘얘가 있었지.’라는 생각에 자신의 손과는 어울리지 않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이거요?”

“그래, 그거. 커플링? 아니면 프러포즈 링?”

그러고 보니 이게 뭐였더라, 라는 생각에 순간 수현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 급하게 받느라 그냥 커플링이려니 하고 받았는데, 반지 자체는 프러포즈 링 느낌도 난다.

아니, 실제로는 결혼반지로 가장 많이 쓰는 반지이긴 한데…….

“커…….”

일단, 공식적으로 사귄 지 일주일 됐으니 상식적인 선에서 납득 가능한 커플링이라고 답하려는 순간 그보다 빨리 뒤에서 답이 나왔다.

“프러포즈 링이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당한 답변에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사무실로 들어선 형이 다정한 눈길로 “기다렸지?”라고 속삭이며 다가선다.

“어?”

이게 프러포즈 링이었나, 라는 생각에 ‘저한테 그런 말씀 하셨어요?’라고 말하는 눈빛으로 형을 바라보고 있자 윤 팀장님이 “그렇지!”라며 책상을 두드린다.

“거봐! 내가 맞았지! 디자인이 프러포즈 링이라니까! 아싸!”

소고기 사 먹어야지, 하는 윤 팀장의 반응에 오매불망 현규를 바라보던 수현이 윤 팀장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팀장님, 내기하셨어요?”

“응. 마케팅팀 팀장이랑. 고마워, 이 대리. 내가 술 한잔 살게.”

“얼마 걸었는데요?”

“10만 원.”

그럼 나한테도 배당금 달라고 하려는데 어깨를 끌어당긴 현규 형이 웃으며 자연스럽게 팀장님에게 말을 건넨다.

“커플링이냐, 프러포즈 링이었냐가 오늘 내기였다면 다음 내기는 결혼할까 말까가 되겠네요?”

“……응?”

“그럼, 크게 거셔도 될 겁니다.”

이번엔 윤 팀장이 아닌 수현이 입을 달싹거린다.

“형, 결…….”

갑자기 결혼이라니 무슨 소리냐고, 수현이 물으려는 순간 수현의 어깨를 쥐고 있던 현규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뼈를 부러뜨릴 듯한 기세였다.

그건, 너는 말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와, 성질 급하네, 강 팀장. 벌써 결혼?”

“이건 내 거다 싶으면 시간 끌 거 없죠.”

“에이, 미리 얘기 다 됐던 게 아니고?”

블라인드에 그런 글 있던데, 진짜 정략결혼 아니냐는 윤 팀장의 의혹에 현규가 싱긋 웃는다.

“그럴 거면 이렇게 복잡하게 안 가죠.”

“그런가? 뭐, 하여간 축하해. 그럼 결혼 결정되면, 한턱 쏴.”

뭘 쏘고 말고 하건 간에 전 이게 프러포즈 링인 것도 방금 알았는데요, 라는 얼굴로 수현이 눈만 껌뻑거리는 모습에 현규는 재빨리 수현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그럼, 나중에 뵙죠.”

“그래, 강 팀장. 우리 이 대리 잘 부탁해. 나중에 술 한잔하자고.”

“네. 우리 수현이랑요.”

‘우리 이 대리’라는 윤 팀장의 말투를 거슬려 한 현규가 그렇게 받아치자 윤 팀장이 박수를 친다.

“이야, 진짜 좋아하나 보네. 아주 꼴값이야. 재수 없어. 빨리 헤어졌으면 좋겠네.”

생글생글 웃으며 커플들 다 망했으면, 이라며 악담을 퍼붓는 윤 팀장을 향해 현규는 태연하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오래오래 잘 사귀겠습니다. 그럼, 점심 식사 맛있게 하세요. 수현아, 나가자.”

자연스럽게 수현의 어깨를 잡아끄는 현규의 팔에 수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현규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면서도 되게 정신없이 흘러가는 상황에 의아해하는데 오늘따라 유독 현규 형이 다정한 음성으로 묻는다.

“점심 뭐 먹고 싶어?”

“아무거나요.”

“아무거나는 없어. 지금 먹고 싶은 거 말해.”

“오늘은 형이 사 줄 거예요?”

“오늘은 네가 아침을 했으니까 사 줄게.”

세상에 다시없을, 상냥한 연인 같은 속삭임에 수현이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빠르게 답한다.

“그럼, 만두요.”

“만두?”

“네. 만두랑 칼국수요.”

“잘하는 데 알아?”

“근처에 잘하는 데 있어요. 만두전골에 칼국수도 사리로 들어가는데 칼국수도 맛있어요. 좀 더 가면 손만두 전문점도 있는데 거긴 해물 칼국수 따로 시켜야 돼요.”

점심 시간이라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엘리베이터에서 수현이 근처 맛집 리스트를 읊고 있자 현규가 수현의 어깨를 넣고는 살짝 볼을 잡아당긴다.

“너 취직하고 먹는 데만 찾아다닌 거 아냐?”

일은 안 하고, 라는 말에 수현이 볼을 잡힌 채 장난스레 대꾸한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당연하죠.”

“그런데 왜 이렇게 살은 안 쪄?”

“퇴근을 안 시켜 주니까 그렇죠.”

“앞으로는 부지런히 좀 찌워. 같이 잘 때 뼈 부딪쳐서 아파. 참고로, 난 살집 있는 스타일을 좋아해.”

“형, 살집 기준이 다른 거 아니에요? 형 전 애인…….”

다 엄청 늘씬한 미형 아니었냐고 하려던 수현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채 신음을 흘렸다.

“아, 아! 아파요, 형.”

“저런, 네가 너무 귀여워서 손에 힘이 들어갔네. 넌 입 다물고 있을 때 제일 귀엽단 말야.”

그건 입 다물라는 소리였다.

내가 뭘 잘못 말했길래, 라고 억울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 시선이 있어 얌전히 입을 다물자 뺨을 꼬집던 손이 떨어져 나간다.

“아픈데…….”

“타자.”

뺨을 문지르며 웅얼거리던 사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이번엔 현규가 손을 잡아끌어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게 한다.

얼결에 오른손으로 그의 왼손을 잡은 채 올라탄 수현은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현규를 올려다봤다.

“왜?”

“지금…….”

또 두근거린다고 하면 글러 먹었다는 소리만 들을 것 같아 잠시 입술만 달싹이던 수현은 적당히 대화를 돌렸다.

“가게는 다음 블록이라 조금만 걸어가면 돼요.”

“그 전에 들를 데가 있어.”

“어디요?”

“가 보면 알아. 내 차 타고 가야 하니 오피스텔 건물로 가.”

“형이 운전하시게요?”

“응.”

“……해외에서 쓰시던 차 갖고 들어오신 거예요?”

“타던 차는 배편으로 들어올 거라 좀 걸릴 거야. 지금 타는 건 원래 한국에 있던 차.”

“그렇구나……. 그런데, 진짜 어디 가는 거예요?”

“좋은 곳.”

대답과 함께 수현을 내려다본 현규는 수현의 손을 가볍게 흔들며 눈웃음을 흘렸다.

누가 봐도 상냥한 애인의 그것 같은 그의 눈빛과 말투에 수현은 겸연쩍은 듯 뺨을 긁적였다.

이러고 있으니 진짜 연애하는 기분이었다.

그 감정이 신기해 수현은 눈을 반짝이며 현규를 불렀다.

“저기 형…….”

“말하지 마.”

뭔지 몰라도 들으면 속 터질 것 같으니까, 라는 얼굴로 수현의 말을 끊은 현규는 1층에 도착해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수현과 함께 내려섰다.

야박한 현규의 태도에 수현은 조금 볼멘소리를 냈다.

“들어는 보지…….”

“안 들어도 쓸데없다는 건 확실히 알겠으니까 말 안 해도 돼.”

“진짜 연애하는 것 같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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