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쓸모없네. 연애가 진짜 연애지, 가짜 연애가 있어?”
그러고 보니 아직 로비지, 라는 생각에 막 출입구를 지난 수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연애는 다 연애죠.”
일단 그렇게 장단을 맞춘 뒤 막 건물을 나오자 초가을의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느꼈던 그대로 볕도, 기온도, 습도도, 더없이 쾌청한 완벽한 날이었다.
* * *
“어? 이 차예요?”
회사 바로 옆 건물로 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수현은 현규와 함께 다가선 차 앞에서 진심으로 감탄사를 흘렸다. 컨버터블이 아닌 그냥 세단임에도 과할 정도로 눈에 띄는 차였다.
위압적인 보닛 디자인이나 세단치고는 높은 차체, 그리고 주차장 한 칸을 꽉 채운 사이즈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독특한 색감이었다. 저 색 때문에라도 어디 가서 사고는 못 칠 것 같았다.
“긁히면 수리비 많이 나오겠다…….”
빛 아래서는 은색처럼 반짝이지만 어두운 데서 보면 연한 회색빛이 섞인 백색에 가까워 보이는 독특한 색감의 차였다. 한국에서 이런 색감의 페인트를 구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에 생기지도 않은 긁힘을 걱정하자 막 운전석에 타려던 형이 마치 비난하듯 이쪽을 바라본다.
아무 말 없이, 이번에는 진짜 화가 났는지 인상을 쓴 얼굴에 지레 찔려 되물었다.
“……왜요?”
“……너, 그 말 두 번째야.”
“아……? 아…….”
아무래도 필름이 날아간 날도 같은 말을 했던 모양이다. 예상보다 많이 사라진 기억과 또 상상 이상으로 일관성 있는 본인의 성격에 뺨을 긁적이며 조수석에 올라타자 운전석에 타 시동을 건 형이 내비게이션을 켠다.
그러곤 곧 그 위에 또박또박 글자를 적어 넣는다.
‘구청’이라고.
“구청은 왜요?”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안전띠를 매며 그렇게 묻자 형이 별일 아니라는 투로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볼일이 있어서.”
“전입 신고하시려고요?”
그런데 나는 왜, 라는 생각에 되묻자 형이 그대로 차를 몰아 주차장 출구로 향한다.
“오늘 아침에 첩보가 있었어.”
“……첩보요?”
‘전쟁하세요?’라는 뜻을 담아 수현이 운전 중인 현규를 바라보자 현규가 짜증이 난 듯 수현의 이마를 툭 친다.
“얌전히 얘기나 들어.”
“네…….”
“어제 네 얘기 듣고 혹시나 해서 어머니랑 동생한테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아침에 연락이 왔는데…….”
거기까지 말한 현규는 떠올리기만 해도 짜증이 나는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곤 작게 “망할 영감탱이.”라고 하는 소리에 수현이 현규의 눈치를 살피고 있자, 잠시 후 감정을 추스른 현규가 다시 말을 잇는다.
“아버지가 주말에 나랑 주영이 결혼 발표를 하실 모양인가 봐.”
“……결혼요?”
“그래.”
“……주영이랑요?”
그 말에 막 커브를 돌아 비탈길로 올라서는 차 안에서 현규가 수현을 힐끔 돌아본다.
너 방금 뭐 들었냐, 귓구멍이 막혔냐는 사나운 그 눈빛에 수현은 금세 태도를 바꿨다.
“큰일이네요…….”
바로 어제 자신과 연애한다고 그 난리를 치곤 오늘은 커플링, 아니 프러포즈 링까지 자랑하고 다녔는데 주말에는 다른 상대와 결혼 발표라니…….
“형, 진짜 인간쓰레기 되겠어요.”
이 정도면 사회면에 나오겠는데요, 라고 수현이 속없이 중얼거리는 꼴에 현규가 이를 악문 채 수현에게 마지막 경고를 한다.
“이수현, 늘 말하지만 넌 입을 좀 조심하는 쪽이 좋겠어.”
“아니, 동물의 왕국…….”
……의 왕자니까, 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한 번 뺨을 세게 꼬집는 현규의 손에 수현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래서요? 대책은요?”
“어머니가 최대한 막아 보겠다고는 하셨는데 아버지가 말을 들을 리가 없지. 주말에 집안 모임인 척 상견례하고 거기서 결혼 발표할 모양이야. 너와의 스캔들은 모두 오보라고 무마할 예정이고.”
“그걸 누가 믿어요?”
회사 사람들이 다 봤는데, 라고 수현이 황당해하자 현규가 수현에게 현실을 알려 준다.
“회사 사람들이야 입 막으면 그만이고, 결혼 발표 났을 때 다들 모르는 척 눈감아 버리면 그만이니까.”
“블라인드는요?”
“블라인드야 낭설도 많으니까. 그리고 바보가 아닌 이상 결혼 발표 나면 작성자가 알아서 삭제하겠지.”
눈치라는 게 있다면, 이라는 현규의 말에 그러고 보니 그럴 것 같다고 수현도 수긍했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어쩔 수 없다.
“그럼, 형하고 주영이 결혼은 진행되는 거예요?”
그럼 내가 왜 그 고생을 하고 사내에서 공개 연애까지 한 건데, 라고 수현이 허망해하자 속도를 높여 달리던 현규가 힐끔 수현을 바라본다.
“그래서 확인해 두겠는데 그 결혼이 진행되길 원하지 않지? 너도?”
“전혀요.”
“그럼, 그 결혼을 확실하게 박살 낼 방법이 있다면?”
“있어요?”
“물론.”
“……형이 거절할 수 있는 거예요?”
“할아버지의 압박도 있으니 나도 마냥 거절하기는 어려워. 주식을 증여받았을 때 서른까지 결혼한다는 조건이었으니까.”
처음 듣는 그 이야기에 수현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서른까지요?”
“응. 내가 결혼 안 하게 생긴 모양인지 그 조건을 거셨어.”
“아, 그렇게 생겼어요.”
대표님을 반면교사로 삼아 절대 결혼 안 하고 실컷 즐기기만 하게 생겼다고 수현이 솔직한 평을 내놓자 현규가 입술 끝만 올려 웃는다. 그러곤 더 말도 하기 귀찮다는 듯 수현의 이름만 부른다.
“이수현…….”
나긋하게 살짝 톤을 낮춘, 낮은 도 음의 목소리에서 수현은 재빨리 현규가 하고 싶은 말을 캐치했다.
“닥칠게요.”
“……눈치는 없지만 생존 본능과 학습 능력은 있어서 다행이야.”
“……비꼬는 게 아니라 형이 워낙에 화려한 미인이라 그런 거예요. 진짜 엄청 눈에 띄는…….”
바람둥이처럼 생겼어요, 라는 말은 학습 능력이 있기에 하지 않았다. 아니, 생존 본능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여간 형 멋있어요. 우리 중·고등학생 때도 형 좋아하는 애들 많았으니까…….”
살기 위해 양심을 저버린 수현이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외모 찬양까지 하자 현규가 조금 기분이 풀린 듯 표정을 풀고 웃는다.
그리고 곧 되묻는다.
“너는?”
“……네?”
“너는 어땠냐고?”
너도 나 좋아했냐는 물음이었다, 그건. 그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순간 수현은 잠깐 생각에 잠긴 채 눈을 껌뻑이다 작게 중얼거렸다.
“……그보다는 좀 껄끄러웠던 것 같은데……요…….”
양심상, 도저히 더는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솔직한 답을 하자 다시 현규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진다.
“왜?”
“잔소리가 심해서요.”
“내가 언제?”
“만날 때마다 했어요. 말 안 통해서 보고 있으면 속 터진다고.”
“그건 팩트니까.”
“팩트니까 잔소리죠.”
이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잔소리가 바로 그 ‘팩트’라는 게 수현의 의견이었고 현규도 그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 없었다.
공부 안 하는 애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잔소리가 너 왜 공부 안 하냐는 소리니까.
“말은 잘해…….”
차라리 말이라도 못하면 짜증이라도 덜 날 텐데, 라고 중얼거린 현규는 느긋하게 4차선 도로를 가로질렀다. 차의 속도를 줄이며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수현을 힐끔거리던 현규는 천천히 오른쪽 차선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수현의 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려왔다.
그 소리에 서둘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본 수현은 화면 위의 메시지를 확인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큰형이 지금 신분증 들고 회사로 오래요.”
“……신분증?”
“네. 갑자기 왜 다들 내 신분증을 찾죠?”
우리 집이 망해서 혹시 내 명의 대출이 필요한가, 라며 수현이 막 메시지를 보내려는 모습에 현규가 수현을 만류한다.
“잠깐.”
“네?”
“지금 점심 먹으러 멀리 나와서 못 돌아간다고, 나중에 연락드린다고 해.”
“……어…… 네, 뭐…….”
밥 먹으러 나온 건 사실이니 그대로 말하면 된다며 수현이 빠르게 메시지를 적는 사이 느긋하게 차를 몰던 현규가 갑자기 액셀을 세게 밟아 속도를 올린다.
순식간에 높아진 차의 속도에 메시지를 발송한 수현이 놀라 현규를 바라봤지만 현규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더욱 속도를 올렸다.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겼는지 막 신호가 바뀌려는 사거리를 순식간에 지나며 현규가 다시 오른쪽 차선으로 붙으며 수현에게 묻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 결혼을 완전히 무산할 방법이 있다면, 할 생각 있어? 아니,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완전히 끝내 버릴 수 있다면, 어쩔래?”
“……완전히요?”
“100% 완벽하게.”
다시는 시도는커녕 엄두도 못 내게, 라는 현규의 단언에 수현이 놀라 되묻는다.
“그런 방법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