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면?”
“있다면 해야죠.”
“어떤 일이라도?”
“뭐든지요.”
“진짜 뭐라도?”
이틀 전 밤과 같이,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라는 현규의 경고에 수현이 문득 말을 멈추곤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딱 10초가량 고민하던 수현은 이내 결론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폭행, 살인, 강간, 마약, 음주 운전만 아니면 뭐든요.”
그러니까, 약간의 사기나 날조 같은 범죄는 괜찮다고 수현이 정확히 선을 긋자, 현규가 다시 한번 묻는다.
마치 각서라도 받으려는 듯.
“진심으로?”
“진심으로요.”
“그 말 후회 없겠지?”
“절대요.”
모처럼 단호한 태도에 현규가 그런 수현이 마음에 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그 말 믿어 보지.”
“전 한 번 한 말은 꼭 지켜요.”
그러니까 형이나 약속 지키세요, 라는 수현의 말 뒤로 40미터 앞에서 우회전하라는 내비게이션의 안내가 울려왔다. 그 소리에 우회전 신호를 켠 현규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곧 오른쪽 일방 통행길로 들어선다.
처음 와 보는 구청 건물을 보며 수현이 “크네.”라고 감탄하던 사이 느릿한 속도로 일방 통행길을 달리던 차가 곧 구청 입구로 들어서더니 실외 주차장에 멈춰 선다.
“내리자.”
좁은 주차 공간 안에 꾸역꾸역 큰 차를 주차한 현규가 바로 시동을 끄자 커다란 구청 건물을 올려다보던 수현이 안전띠를 풀며 지극히 상식적인 의문을 내뱉는다.
“그런데, 전입 신고는 주민센터에서 하지 않아요?”
“내려.”
조금 전부터 이상하게 급해 보이는 현규의 재촉에 서둘러 차에서 내린 수현은 빠른 걸음으로 현규를 따라 구청 건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라 구청 앞은 꽤 붐볐다. 점심시간에 볼일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붐벼 웅성거리는 분위기에 현규와 함께 입구로 올라가던 수현은 현규를 보곤 이쪽으로 다가서는 양복 차림의 남자를 보곤 멈칫했다.
“죄송합니다, 점심시간에.”
남자를 발견한 현규가 먼저 그에게 인사를 건네자 지긋한 나이의 남자가 정중하게 대꾸한다.
“괜찮습니다. 이거, 윤 이사님께서 보내신 서류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만나자마자 서류만 건네주곤 돌아선 남자가 곧장 주차장으로 향해 가는 모습에 그가 누구냐고 물으려는데 갑자기 손목을 잡혔다. 그리고 곧 그에 대해 입을 열 틈도 없이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형에게 질질 끌려 들어가야 했다.
“어……. 어어…….”
진짜 눈 깜짝할 새 구청 안으로 들어선 형은 지체없이 자신을 이끈 채 무인기 앞으로 다가가 등을 떠밀었다.
“가족 관계 증명서 출력해.”
“……가족 관계 증명서요?”
“응.”
전입 신고할 때 그런 게 필요했던가, 수현은 곰곰이 떠올려 봤지만 딱 한 번 해 본 경험상 필요한 건 전월세 계약서와 신분증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현규 형의 경우는 전월세 계약서가 없어서 현재 실거주 중인 자신의 서류가 필요한 건가, 라고 물으려는데 이미 수현을 버리고 진열대 쪽으로 간 현규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열더니 그 안의 서류를 꺼내 꼼꼼하게 살펴본다.
그러곤 곧 그 서류에 뭔가를 기입하는 모습을 본 수현이 전입 신고서는 여기에 있을 텐데, 라고 의아해하던 차에 자신의 차례가 왔다.
“가족 관계 증명서…….”
대학 시절부터 몇 번 뽑아 본 적이 있었던 터라 순조롭게 무인기에서 서류를 뽑은 뒤 형에게 다가서 그것을 내밀었다.
“여기요.”
“신분증은?”
“여기.”
주머니에 있던 지갑에서 신분증까지 꺼내 건네자 자신을 쭈욱 훑어보던 형이 서류 위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무심히 말을 던진다.
“너 설마 상의가 검은색만 있는 건 아니겠지?”
“흰색도 있어요.”
직업상 편한 옷이 좋기도 하고 또 세탁할 때 분류가 편해 독립한 뒤에는 검은색 아니면 흰색만 입고 있었다. 그것도 세탁할 때 신경 안 써도 되는 면 종류로만.
“고등학생 때까지는 옷을 잘 입었던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된 거냐, 라는 현규의 생략된 진심을 알아챈 수현은 민망한 듯 목을 긁적였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삼촌이 곱게 키운다고 예쁘게 옷을 입혔는데, 대학에 들어간 직후 삼촌이 유학까지 가는 바람에 스타일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삼촌이 옷을 골라 줬는데 삼촌 유학 가면서 제가 사기 시작했거든요.”
“……해준 형?”
“네.”
그러니까 형이 잘 입는다고 생각한 부잣집 막내아들 룩은 삼촌의 취향이라고 알려 주자 형이 빠르게 서류를 채워 가며 말을 돌린다.
“……주말에 쇼핑할 테니 시간 비워.”
“옷 사 주시려고요?”
“사는 건 네가 사야지.”
내가 왜 네 옷을 사 주냐, 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게 맞다. 형이 내 옷을 사 줄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자면 형이 옷을 골라 줄 이유도 없는데…….
“여기 사인해.”
“……네?”
“사인.”
펜을 건네는 형의 재촉에 일단 펜을 받아 들고 형이 내민 서류에 사인했다.
“전입 신고할 때 동거인 사인도 있어야 되나 봐요?”
주거하지 않는 집에 무단으로 주소 이전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가, 하며 사인을 마친 뒤 펜을 형에게 돌려주자 서류를 들어 꼼꼼하게 훑어보던 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점심까지 먹으면 좀 시간이 걸릴 텐데…… 오후에 늦게 들어가도 돼?”
“전 괜찮아요. 그런데 형은 빨리 들어가야 하지 않아요?”
“개인적인 볼일 때문에 조금 걸릴 거라고 얘기해 놨어. 만두전골 먹을 거지?”
“네. 아, 만두 얘기하니 고추절임 좀 해야겠어요. 만두에 고추절임 다져 먹으면 맛있는데…….”
“그래.”
무심히, 거의 듣지도 않는 듯 대충 대꾸한 현규가 서류를 들고는 안쪽으로 가 번호표를 뽑는다. 그런 현규를 쪼르르 따라간 수현은 휴대폰을 꺼내 ‘전입 신고’를 치고 절차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검색을 해 봐도 동거인의 가족 관계 증명서가 필요하다는 글은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동거인이 같이 올 필요도 없어 보였다.
“저기, 형…….”
왜 내 신분증과 가족 관계 증명서가 필요한 거냐고 뒤늦게 물어보려던 찰나, 벨 소리가 울리며 오른쪽 창구 쪽에서 번호가 반짝였다.
‘가족 관계 등록 창구’였다.
전입 신고를 여기서 하나, 하며 창구로 다가서는 형을 따라가자 형이 직원에게 서류와 신분증을 함께 건넨다.
그런데, 신분증이 이상하게 많다.
전입 신고를 할 때는 본인 신분증만 있으면 되는데, 왜?
자신이 아는 것과 많이 다른 절차에 의아해하며 형을 바라보는데 마침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큰형이다.
[점심 먹으러 어디까지 간 거야? 오후에 꼭 들러. 신분증 꼭 지참하고.]
당분간 오전 근무만 해도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큰형의 메시지에 잠시 고뇌에 빠져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눈치가 빠른 건지 내가 유독 간파당하기 쉬운 유형의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 패턴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이러니 집을 나와도 꼼짝을 할 수 없다.
[신분증은 왜?]
그렇게 짧게 메시지를 보내자 곧장 답장이 온다.
[그럴 일이 있어.]
[그럴 일이 뭔데?]
계속되는 형의 메시지에 귀찮다는 듯 답장을 보낸 순간 서류를 받아 꼼꼼하게 체크하던 직원이 현규 형에게 묻는다.
“증인란에 증인 본인이 서명한 거 맞으시죠?”
“네.”
“네. 서류 잘 작성해 주셨고요. 결혼 축하드립니다.”
난데없는 직원의 축하 인사에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던 수현은 재빨리 현규를 돌아봤다.
그러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냐고 따지듯 현규를 바라봤지만 현규는 수현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직원이 건네주는 종이와 신분증을 확인하고 있었다.
“형…… 지금…….”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고, 수현이 현규에게 따지려는데 직원이 건네주는 종이와 신분증을 받아 든 현규가 들고 있던 봉투 안에 종이와 신분증 두 개를 넣고는 직원에게 인사를 건넨다.
“감사합니다.”
어울리지 않게 눈웃음까지 흘리며 직원에게 인사를 마친 현규는 태연하게 돌아서 본인의 신분증을 지갑에 챙겨 넣은 뒤, 수현에게 신분증을 돌려줬다.
“신분증.”
“그, 아니…….”